[909호 10월 10일]의심치 말고 못났든 잘났든 자기 주인공을 믿으세요

▲ 그림 최주현

 

인생은 각본대로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문) 세월이 흐를수록 모두 자기 팔자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에 부닥치면 내 팔자가 그런가보다 하고 또 낙담을 하게 되지요. 정말 제 생각이 맞을까요? 우리의 인생은 각본대로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답) 이것은 지금 윗눈썹에서 밑의 눈썹을 내려다보지 못하는 격이나 마찬가집니다. 각본대로 마음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항상 고정됨이 없다고 그러죠? 각본대로 주어져 있는 것이 마음이 아니고 각본에서 벗어난 마음이 되기 때문에 이 마음도 쓰고 저 마음도 쓸 수 있는, 체가 없는 것이 이 마음이다 이겁니다. 만 가지 마음을 낼 수도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음식을 갖다 놨을 때도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이게 물로 생기고 뭘로 생기고, 다 알아도 그걸 집어먹고 줄 줄 모른다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다 알아도. 그와 똑같은 겁니다. 도라는 것은 한생각에 의해서, 밀접한 문제가 있는 거는 한생각에 의해서 자기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의 문제에 있는 거고 참, 이거를 얘기를 해도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참 큰 문젭니다. 어떤 사람은 각본대로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스스로서 각본대로 주어져 있다는 걸 생각하거든요. ‘이거는 절대로 못한다. 이렇게 이렇게 돼 있는 거니까 이건 이렇게밖엔 될 수 없다.’라는 게 스스로서 주어져요, 자기한테. 이건 색을 보고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 체 없는 그 마음에 한 찰나의 부동자세한 그 에너지의 뜻은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것이 스스로 나와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큰 그릇을 들이대면 큰 그릇에 담기고 작은 그릇을 들이대면 작은 그릇에 담긴다 이 소립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에너지는 항상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항상 수시로 나오기 때문에, 내가 큰 그릇을 대면 큰 그릇에 담기고 작은 그릇을 대면, 용도에 따라서 대면은 작은 그릇에 담긴다. 이 담기는 이 자체가 무엇이라고 비유를 할까? 내 한생각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의 한생각에 달려 있는데 여러분이 이 지금 색을 보고 취하고 물질세계로서의 이 용도에 따라서 수없이 보고, 내고 들이고 내고 들이고 살면서 이게 습이 됐단 말입니다. 미지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회전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거든요. 생각조차도 해 보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보이는 데 지금 우리가 법도가 이렇고 몇 항 몇 조에 이거는 이렇게 되어 있고, 이렇게 되니까 이거는 아주 각본대로 주어져 있는 겁니다. 이건 각본대로 아니면은 안 되는 거죠. 그러나 팔자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팔자 운명은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팔자 운명 속에서 어떡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바로 생각입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이것이 이렇게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수박은 수박씨가 자기를 자기 안에다 넣어 놓고도 바깥에서 수박씨를 찾는 겁니다. 이럴 수가 없어요. 어떤 청년이 와서 “내가 길가를 가니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 이러거든요. “야, 이놈아. 둘이 아니라는 걸 너한테 네가 가르치기 위해서 지금 침을 놓는 건데 어떻게 해서 그래 남이 너를 주시한다고 생각을 하느냐? 이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이놈아. 왜 너는 너한테 만날 속아!” 이러고 했습니다.

그렇듯이 이 마음 자체가 너무도 광대하면서도 묘하고 묘하면서도 신비하고 신비하면서도 위대한 겁니다. 사람의 마음자리 하나가 그렇게 천만 가지로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자기 끌고 가는 마음을 내가 지금 어떻게 표현을 해야 좋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런 얘기도 하고 저런 얘기도 했는데, 지금 내 팔자가 금방 가서 차에 치여 죽을 팔자라고 해도 “팔자를 가서 보니까 스님, 앞으로 닷새만 있으면은 꼭 이게 병이 들리지 않으면 죽겠답니다.” 이러거든요. “허무한 소리 하지도 마라. 네가 생각하기에 달렸어. 이놈아, 그런 것 아예, 눈물 피 이런 걸 많이 흘렸기 때문에 아예 그런 것 흘리지 말고 살아. 편리하게 살아라. 종교는 편리한 거다. 인간이 고등동물로 태어나 90% 100% 이게 부처 될 가능성이 있다고 그런 거는 인간이 그렇게 물리가 터지고 지혜가 터지면은 그대로 도다. 그러니 편리하게 살아라.” 이럽니다.

그럼 팔자 운명이나 이런 거 보는 사람 다 굶어 죽게 생겼죠? 그런 거 저런 거 우리가 따진다면은 스스로서 이 마음이 말입니다, 이거는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를 가만히 보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옳다 그르다 하는 게 스스로 생기나. 스스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주어진다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겁니다. 구태여 그렇게 나쁜 데로 끌고 가려고 해서가 아니라 규정을 지어 놓기 때문입니다.

고정관념에 고정되게 그냥 자기의 방침대로, 자기가 보고 듣고 사는 대로 그냥, 본 대로 그냥 습대로 그냥 내놓는 거죠. 그런데 그 물리가, 글쎄 백지장 하나 사이도 안 되는 고 물리가 왜들 안 터집니까, 왜? 이것을 뭐라고 표현을 해야 옳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쉬게 됐는데 신이 한 짝이 떨어졌더랍니다. 그래 신을 툭툭 털면서 그거를 맞추려고 그러니까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 하는 소리가 “너는 그 신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신을 버려 봐라. 신으려고 하지 말고 버려 봐라. 네 가죽신도 있는데 왜 버리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무슨 생각이 나느냐 하면 신을 놓치면은 내 발바닥이 아픈데 어떻게 가겠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따 하는 소리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자기가 얘기도 안 했는데 “그래, 발바닥이 아파? 발바닥이 아프고 그래서 그 신을 벗지 못하겠다고? 이놈아, 벗어 봐! 신이 저절로 생길 테니까.”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게 이치에 닿지도 않잖아요, 도대체, 그 사람으론.

그런데 얼마 거리가 멀지 않은 데에서 어느 노인네가 신을 잔뜩 만들어 놓고선, 미투리를 만들어 놓고 파는 게 아니라 길 가고 오는 사람한테 주는 거예요. 그래서 밥도 얻어먹고 신도 얻고 노비도 얻고 아, 이러고 가게 되니까 그때서야 그 물리가 조금 터져 가지고선 ‘야, 나도 이 길로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나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길로 산으로 올라가서 공부를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예전에 어느 스님한테 들은 얘긴데요, 우리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한테는 이해가 안 가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금방 지금 병이 들어서 죽게 됐다. 의학적으로 봐도 그렇고 이건 죽게 됐다. 이걸로서 표현을 할 수밖에 없어서 이러는 겁니다. 그랬는데 자기가 생각하기를 말입니다, 자기가 끌고 다니려면 자기가 고쳐서 끌고 다니든지 자기가 그냥 부숴버리든지 맘대로 해라 하고선 맡겨 두니까 그것이 다 해결이 났고, 오줌으로 뭘로 다 그 나쁜 게 다 나가고 다 해결이 났답니다. 그것이 어디 나변에 있느냐 하지만 그런 일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나하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이렇게 볼 때 100% 하면 70%는 그래도 웃을 수 있고 기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봅니다. 그럼 왜 30%는 없는가? 30%는 마음이 닿지 않아서 못할 뿐 아니라 너무 기울어서 못하고 이런 수가 많습니다. 그럼 색을 보고 취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생활이 과학인 줄 모르고 의학인 줄 모르고, 모든 게 이 생활이 진리인 줄 모르고 행하는 분들에 의해서는 기복으로만 나가기 때문에 이거는 팡이죠. 자기가 그렇게 위대하고 정말 신비하고 그렇게 당당하다는 걸, 도도하다는 걸 모르거든요, 모두가.

우리가 어떠한 문제를 세워 놓고 잘되겠다고 앨 쓰기 이전에 우리가 진실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그 여건이 주어져 있다면 우리는 뭐든지 아니 할 수 없는 겁니다. 아니 할 수 없고, 아니 될 수 없고. 우리는 행복을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단, 우리가 만들어서 행복을 가져오고 또 고에서 빠져나오고 또 병고에서 빠져나오고 가난에서 빠지고, 우리는 계발하는 겁니다. 계발도 정신계발이 아니라 심성계발로서의 정신으로 오관을 통해서 다섯 가지의 구슬이 스스로 돌아갈 때 우리는 그것이 계발이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러니 그 팔자 운명 이런 것도 각본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선(禪)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문) 참선 공부 하는 방법도 간화선이니 묵조선이니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은데 요즘은 간화선이 대세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 선에 좀 관심이 생겼는데 어떤 방법으로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답) 요즘은 사람들이 모두 묵조니 간화니 하고서 모두 좌선들을 하고 화두들을 쥐고 이럭하고 있는데 외려 화두를 잡고 오히려 막고 있어요. 그게 끊어질까 봐 걱정, ‘이거 어느 스님한테서 받았는데….’ 하는 그 착. 어느 스님이 따로 있나요? 내가 이 세상에 나오고부터 내가 화두요 내가 공했는데, 나로부터 생기는 거지 거기에다 덧붙여서 또 그놈의 게 끊어질까 봐 걱정, 결제하면 결제하는 대로 결제했다고, 하루 8시간이고 9시간이고 앉아 있는 것이 능사가 아니에요. 서는 것도 서는 게 아니고 앉는 것도 앉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는 나가서 일하고 앉아 있을 틈도 있었지마는 지금은 지금대로 뛰면서 생각하지 않으면 못 사는 세상이거든요. 그게 전부 참선이에요. 그렇게 돌리지 않는다면 생활 불교가 어떻게 되며 진짜 참선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스님네들만 공부하지 스님네들 아닌 사람들은 전부 공부 못하겠네요? 벌어먹어야 할 테니까. 벌어먹는 것이 전부 참선인데 말입니다. 이것저것을 다 일일이 따진다면 언제 길은 가겠습니까.

나는 예전부터 법당에 몰래 들어가서 밤을 새우고 새벽이면 몰래 나오고 그러기도 많이 했어요. 꼬박 그냥 앉아 있기도 하고, 밤을 새워서. 그것도 누가 앉으래서 앉았으면 못 앉았어요. 아, 다리가 굳어서 앉아 있겠어요, 밤새도록? 내가 앉고 싶으니까 앉아 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앉고 싶으면 앉고 서고 싶으면 서고, 내 마음은 결제 해제도 없다 이겁니다. 모든 것을 전체 놓고 돌아간다면 그 결제 해제가 없으면서도 결제 해제가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걸로 그냥 하는 겁니다. 너무도 아주 슬기롭게 넘어가거든요, 모두가. 유(有)의 법 무(無)의 법을 무시하지 않고 항상 이렇게 평등하게 맞춰 가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화두가 아니다 기다 하기보다는 지금 현대의 과학문명이 발달된 이 시점에서 우리가 빨리,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이렇게 걸려서 그것은 어렵거든요. 지금 시대가 너무 발달이 돼서 잘들 사람들이 안다고 할까요?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는 게 많기 때문에 그걸 들고선 있으면 이 머리가 터질 거 같은 거예요. 아는 게 많기 때문에. 그걸 들고 있어도 그대로 이거를 순수하게 이렇게 곧장 일직선으로 들어가질 못해요.

그러니까 조금 즉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나 하는 것을 모색해서 얘기하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게 주인공이다 하고 이름을 세워 놓은 것도 방편이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방편이자 그건 실질적인 거예요. 이게 공이자 색이고, 색이자 공이니까. 그래서 기둥 주를 하나 세워서 공으로서 이걸 붙잡지 않으면은 거기 소용돌이까지 들어갈 수 없으니까, 내가 그 주인공이라는 걸 하나 세워 놓고, 일부러 세워 놓고 모든 것을 들이고 내는 것이 거기서, 나오는 것도 거기요 들어가는 것도 거기요, 일거일동을 항상 자기는 지켜보면서 그렇게 하다 보면은 거기서 진짜 의정이 머리를 들고 나온다 이겁니다. 진짜 화두가 거기서 나와요. 그래, 지금 시대에 쉽게 하는 방법을 내가 토론하는 거지 그 화두를 드는 것이 잘못이다 잘됐다 이런 게 아니에요. 지금 현대 이 변천해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는 즉시 들어가야 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들이고 내는 거를 의심치 말고 들이고 내라 이겁니다. 의심치 말고 자기 주인공을 자기가 믿어라 이거예요. 딴 사람이 화두 준 걸 믿지 말고 못났든 잘났든 자기 주인공을 믿어라 이겁니다. 이 세상이 생겼고 나로부터 바로 종교가 생겼고 나로부터 들이고 내는 것을 알게 된 거지,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가 바로 태초요, 그 태초의 근본이 바로 나 자신의 마음이니, 바로 나로부터 화두인 것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의정이 생기는 거고 그걸로 인해서 생활이 생기는 거고 만법이 생기는 거고 그런 건데 어디에서 그 만법의 이치를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주인공에 모든 것을 몰락, 이 전체에 합일된 주인공에 몰락 놔 버리세요. 모든 거를 거기다 일임하고 놔 버린다면, 일거일동 일체 다 놔 버린다면, 놔 버리고 감사함도 믿음도, 들이고 냄도 그 한군데서 들이고 낸다면 바로 거기에서 의정이 진짜 나올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시대로 봐서는 즉각 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고 봅니다.

자기 주인공에 몰락,
이 전체에 합일된 주인공에 몰락 놔버리세요.
모든 거를 거기다 일임하고 놔버린다면
일거일동 일체 다 놔버린다면
들이고 냄도 그 한군데서 들이고 낸다면
바로 거기에서 진짜 의정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시대로 봐서는 즉각 들어갈 수 있 길입니다.

알 수 없는 꿈만 꾸게 되는데
문) 평소에 그래도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는데 꿈에서라도 큰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자꾸 이 모습 저 모습으로 알 수 없는 꿈만 꾸게 되니 참 답답합니다.

답) 꿈에 모습으로 같이 다닌다고 해서 같이 다니는 게 아니거든요. 즉 자긴데, 뭘 또 모습을 같이 이어서 보려고 하느냐 이겁니다. 자기가 지금 그대로 앉았는데, 거기에 자기가 둘이 아닌데. 이 모습은 집과 같은 겁니다. 한 집에 들어 있으면서 왜 바깥에서 그 모습이 자꾸 오길 바랍니까. 그거부터 벌써 둘이라는 거 아니에요? 왜 그런 데다 신경을 씁니까, 본래 그냥 같이 있는데. 본래 같이 있으니까 그 모습이 안 나타나죠. 그러니까 일일이 각각 보일 리가 없어요. 아, 그런데 본래 같이 있지 않으면 왜 그 모습이 나타나지 않겠어요? 둘로 보는 사람은 일일이 모습이 각각 보입니다. 자기가 살아나오는 습에 의해서, 인연에 따라서 그 모습으로 항상 보이거든요. 아는 사람 모습으로 보이는 거죠.

그런데 딴 사람의 부모로 보인다고 해서 ‘에이구! 조상들이 또 어떻게 됐나 보다.’ 이렇게 걱정을 하거든요, 또. 그럭하지 말라 이겁니다, 인제는. 조상이 보이면 그 뜻이 뭐냐. 그건 부처님도 그게 될 수 있어요, 내 부처가 말입니다. 그렇게 그 사람으로 화해서.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은 상대방끼리 항상 살던 그 습이 있기 때문에, 그걸 떼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만약에 고조부라면 고조부 얼굴을 봤어야죠. 그래서 아버지 모습으로 또 보이는 거예요. 고조부가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 어느 친구로 나타나고.

그래서 이게 세 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든 꼭대기에서 자기를 지배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부모로 보이고, 부처님으로 보이고, 윗분으로 보인다 이거야. 그리고 동등하게 보이고 또 아래로 보이고. 이것이 자기 인연이에요, 다. 모습만 바꿨을 뿐이지 모두가 바로 자기 본부에서 나온 것이니 바로 나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모습이 나타난 걸로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습 따라 끄달리지 마시라 이겁니다.

자식이 자꾸 빗나가요
문)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 녀석이 하나 있는데 자꾸만 속을 썩이고 빗나가기만 합니다. 어떻게 자식의 마음을 잡아야 할는지요.

답) 우리가 가정에서 남편을 리드하는 것도 그렇고 아내를 리드하는 것도 그렇고 좀 폭넓게 리드해 나갈 수 있는, 말로 얘기해서 공을 다 깨트리지 말고 안으로 굴려서 그 사람의 마음과 더불어 그저 무전으로 통할 수 있는, 서로 연결이 돼서 서로가 잘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지혜를 행해야 합니다.

자식도 그렇습니다. 자식도 뿌리를 깊이 박혀 줄 수 있는 거는 반드시 마음으로 해야지, 입으로 놀려서는 자꾸 빗나가요. 입으로 말을 해 가지고는, 저 왜, 밀가루 반죽해서는 그냥 그냥 요렇게 주무르고 조렇게 주물러서 남 나가려야 나갈 틈이 없게 만들지 마시고, 그 세대는 그 세대대로 있고 어른은 어른대로 세대가 있어요. 지금 발전해 나가는 애들의 생활과 어른의 생활과 또 노인네들의 생활은 다 다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활달하게 놔두면서 안으로 굴리게 되면 거기까지도, 내 전화를 돌리면 거기까지 버튼이 눌러지듯이 그 애는 모르지만 그 애 원소 자체는 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소 자체가 걔를 끌고 다니는데 아주 잘 끌고 다니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걱정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하루 이틀 안 들어왔다 하더라도 거기다만 넣으면 스스로 돌아져서 경험을 하고선 오히려 들어와서 안 나가요. 안 나가. 공부 잘한 거죠, 뭐.
이렇게 되는 이치를 여러분이 못 믿고,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요. 자기의 그 턱밑에 있는 보배를, 자기가 자기를 못 믿고 항상 겉으로 끄달리면서 관세음보살, 무슨 보현보살, 뭐 강으로 나가서 물에다가 밥 띄우고 또 물에다가 고기를 사다 넣고 이런 행동들을 해서 무슨 소득이 있느냐 이겁니다. 항상 같이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멀리 외국에서 전화가 와서 “스님, 급한 일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랬을 때 내가 만약 몸으로 비자를 내 가지고 간다 하면 그거 할 수 있겠습니까? 해결할 수 없죠? 이미 죽은 뒤에 가게요? 또 죽은 뒤에도 못 가죠, 늦어서.

그래서 이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기 때문에 수없이 수만 개가 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꿔서 할 수가 있습니다. 아프다면 의사가 돼 주고, 가난하다면 관세음보살이 돼 주고, 일찍 죽는다면 칠성부처가 돼 주고, 지장이 돼 주고, 수없이 그렇게 바뀌는데, 한생각 한생각이 찰라찰라 그렇게 바뀌는데 왜 그것들을 모르고 끄달리느냐 이거예요. 자기를 이날까지 미생물에서부터 억겁을 거쳐서 끌고 온 자기의 주인을 왜 못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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