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호 9월 26일]이 세상만사가 부처님 법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 그림 최주현

여러분께서 8월 추석을 지내시는 뜻을 우리가 한 번쯤은 음미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분이든지 밥 먹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옷 입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물 안 먹고 사는 사람 없고, 불 쓰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땅 딛고 다니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8월 추석이라고 하는 것은 일년 내내 농사를 지어서 우리가 첫 곡식을 밥을 지어서 놓든 떡을 해서 놓든 무엇을 해서 놓든,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일체 만중생과 더불어 같이, 이 지수화풍이나 또는 무정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마음들을 한데 둥글려서 그 마음으로 깊이 감사함에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이것을 따로따로 얘기하는 거보다도 몰아서 얘기하는 것이 간단하고 쉬울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럼 그 마음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것입니다. 무한량이라면 무한량일 수 있고 작다면 바늘 구멍 하나 안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생각해서 진실하게 감사함을 느낄 줄을 모두 모릅니다. 더군다나 가깝게 있을수록 더 감사함을 모릅니다. 없으면 당장에 생명을 유지 못하는데도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 쓰는 거와 불 쓰는 거와 땅을 딛고 다니는 거와 공기를 쐬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또 일체 만물을 통해서 공부를 할 수 있고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고, 또 상대성 원리로써 개발을 할 수도 있고 창조력을 기를 수도 있고 창조를 해낼 수도 있는, 그러한 모든 여건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은혜를 생각할 수가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일체 만물만생 전부가 다 흙이든지 무정물이든지 식물이든지, 지수화풍을 막론하고 더불어 모두가 평화스럽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게끔 돼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질 못합니다. 평화스럽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여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들이 물질세계의 50%에만 전전긍긍하니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내가 산다느니 내가 했다느니 내가 말했다느니, 그리고 망한 거는 또 타의에 의해서 망했다느니 저 사람 때문에 우리가 못살게 됐다느니, 이러한 문제 등이 모두 여러분의 마음에 사무치기 때문에 밝게 내다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천당 지옥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이 이 마음이 진정코 무서운 도리라는 것을 한번 음미해 보십시오. 일체 만물만생이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로 낳는 거나 알로 낳는 거나, 화해서 낳는 거나 질척한 데서 낳는 거나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정물도 식물도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고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느냐? 전력이 똑같듯이 인간의 불성의 씨는 다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마음들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모습을 지어가지고 나옵니다. 우리가 박씨를 심었으면 박이 나죠. 박 싹이 나고 박이 또 열리죠. 그러나 마음의 불씨라는 것은, 마음의 씨라는 것은 박씨도 아니요 사람씨도 아니요, 이것 씨도 아니요 저것 씨도 아닌 자체의 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먹는 대로 입력이 돼서 그것이 현실로 모습을 들고 나오고, 바로 현실로 모든 생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을 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보다도, 벌레가 되느냐 짐승이 되느냐, 날아다니는 새가 되느냐 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무서운 것은 둘째치고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가 자식들을 낳았을 때 거기까지도 미치게 됩니다. 부모가 살인을 저질렀다거나 사상이 그르다 해서 만약에 부모한테 어떤 판정이 내려졌다면 그 자식까지도 연관이 되듯이.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 어떻게 생활을 하느냐,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 어떻게 말을 하느냐 이런 문제 등이 현실에 결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두렵게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은 사람의 모습으로써 이렇게 살지만, 한순간에 꿈같이 내 몸이 사대(四大)로 흩어져서 제각기 물로 돌아가고 흙으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고 불로 돌아가는데, 원점으로 다 돌아가는데 여러분은 하나도 가져갈 게 없어요. 몸도 가져갈 수 없고 보물도 가져갈 수도 없고, 재산도 가져갈 수가 없고 또는 부부와 자식도 가져갈 수가 없고, 모든 권속도 가져갈 수가 없고 권리도 아무것도, 친구도 아무것도 가져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말하자면 악업이든지 선업이든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림자처럼 따르는 것이 바로 업식입니다. 그 업식으로 말미암아 모습을 사람으로 가지고 나오느냐, 짐승으로 가지고 나오느냐, 벌레로 가지고 나오느냐, 새로 가지고 나오느냐, 독사로 가지고 나오느냐, 개로 가지고 나오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은 사는 게 뭐, 살아나가다 보면은 어떻게 되겠지 하고 이렇게 방치하는데, 여러분이 사람의 의식으로 생활을 하고 사시다가, 만약에 새 새끼나 짐승이나 땅 속의 벌레나 독사가 짝짓기 하는 데 자동적으로 들어간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이 세상을 잘 보십시오. 넝마는 넝마전에 있고 금은 금방에 있습니다. 깡통은 깡통전에 있고 무쇠는 무쇠전에 있습니다. 사람들도 천차만별로 끼리끼리들 모두 모이는 겁니다. 그와 같이 자동적으로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모습을 짓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의식으로 살다가 짐승 모습을 가지고 나왔을 때는 아무리 울고 발버둥이쳐도, 개로 모습을 가지고 나왔다면 ‘멍멍’ 짖을 수밖엔 없는 겁니다. 새로 나왔다면 새로 지저귈 수밖엔 없는 겁니다. 아무리 말을 하고 눈물을 흘려도, 간절하게 말을 해도 세상 사람은 들어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답답한 거 자체가 지옥입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재나 쌀이나 곱게 해놓고 뭐가 됐는가 발자취를, 발자국을 보는 유래가 있었죠. 구렁이가 됐으면은 그 재를 가지런히 해놓은 거기에 구렁이 표시가 나고, 사람이 됐으면은 사람 발자국 표시가 나고 이랬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지옥이 우리 눈앞에 그냥 널렸고 천당도 눈앞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 일이 현실에 진실로써 그냥 막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앞에 지금 닥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생각들 하시는 겁니다. 금으로다가 반지를 만들었다면 반지가 아무리 찌그러졌어도 금방에 가서 다시 재생돼서 나오지만 무쇠나 넝마라면은, 깡통이나 그런 철 종류라면은 가서 재생이 돼도 철 종류로 그냥 나오는 겁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내 앞길이 세세생생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도 관련이 되고 자식에게도 관련이 되는 겁니다.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반면에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이러는 것이 모두 그대로 입력이 됩니다, 그대로. 이걸 소홀히 생각 마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한 가지로다가 표현을 하겠습니다. 병원에 가서 어떠한 ‘병이다’ 하면은 거기에서 그냥 깜빡 마음이 죽습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거죠. ‘아이구, 이젠 죽었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반면에 그것이 그대로 입력이 됩니다. 체내의 모든 의식들에게 하나로 그냥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한 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죠. 잘못되는 것도 입력이 돼서 잘못되는 거, 잘되는 것도 입력이 돼서 잘되는 겁니다. 입력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컴퓨터는 물론 사람이 넣는 것만 입력이 되지만 이 자동적인 심성의 콤퓨타는 아주 여러분의 세세한 것까지도, 큰 거나 작은 거나 세세한 것까지도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현실에 그냥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고 지은 거는, 알고 입력이 된 것은 현실에 알게끔 나오고, 모르고 입력이 된 것은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 과정에서 천차만별의 이 마음 도리가 이렇게 귀중하고 이렇게 엄청난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이거는 과거에 어떻게 살았다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과거도 현실이요, 미래도 현실입니다. 영원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내가 일러드리는 것은, 그렇게 과거에 살 때 입력이 된 것이 현실에 나오는 거니까 현실에 나오는 것마다 두려워하지 말고 물러서지 말고, 자기가 땅을 걸어가다 엎드러지면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자기한테서 나오는 것을 자기한테다가 맡겨놓고 잘된 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잘되게 돌리는 것도 거기다.’ 하고 맡겨놓고 지켜보고 체험해라. 이것이 본래 참선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놓고 입력을 시키면 과거에 입력이 됐던 것이 자동적으로 없어지면서, 넣으면 넣는 대로 자동적으로 그릇이 비고 또 넣으면은 또 비고 이렇게 넣으면 넣는 대로 그릇이 비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이런 쉬운 방법을,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길을, 아주 손쉽게 여여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한생각이 모자라서 내다볼 줄 모르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 먹어보지 못해서 맛을 모르고, 듣질 못해서 생각이 나질 않아서 항상 독 속에서 내 마음이 빠져나오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몸뚱이가 독이라면 독 속에서 나와야 내 몸뚱이 독을 마음대로 굴릴 수가 있는 건데, 당신네들 이 몸이 항아리라면 항아리 속에서 나와야 그 자기의 몸뚱이 항아리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으면서 어떻게 항아리를 굴린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과거에 살 때 입력된 것이 현실에 나오는 거니까
나오는 것마다 두려워하지 말고 물러서지 말고
땅을 걸어가다가 엎드러지면 자기가 그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자기한테서 나오는 것 자기한테다 맡겨놓고
지켜보고 체험해라.
이것이 본래 참선이다.

 

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면 팔만대장경을 모두 다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금강경』이나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이런 걸 보면 그냥 단번에 그 뜻이 들어오는 겁니다, 단번에! 전자에 못 알아듣고 ‘이게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이러던 것이 그냥 단번에 ‘아, 저거는 무슨 뜻이고 저거는 무슨 말이고….’ 이런 것이 아주 단번에 옵니다. 이 세상 만사가 부처님의 법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깐요. 우리들의 법을 빼놓고 부처님 법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마음이라는 게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빛깔도 없지만 이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광대하고 무변한 것을, 한생각이면 두루 할 수 있는 것을, 한생각에 바늘 구멍에도 들어갈 수가 있는 그런 마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누가 그렇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누가 뺏어갑니까? 누가 갖다줍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계시니까 이 세상을 자유스럽게 살 수가 없는 거죠. 그렇게 생각이 듭니까? 이해가 갑니까?

대중: 예.
큰스님: 이해가 가셔야 될 겁니다. 여직껏 그래도 마음공부라고 이끌어왔고 여러분과 같이 한마음이 돼서 이렇게 길을 걷고 있는데, 내가 항상 얘기하죠. 여러분의 마음이 전깃줄이라면 내 마음도 전깃줄이 돼서 한 전깃줄이 내 전깃줄에 와서 닿으면은 불이 밝게 켜지는 것뿐이라고. 그래서 이 전깃줄도 아니요, 저 전깃줄도 아니다, 단, 마음과 마음이 전깃줄과 전깃줄이 맞닿듯이, 마음과 마음이 닿으면은 밝게 불이 들어와서 한가족이 다 밝게 살 수가 있는 거다 이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문제든지, 어떤 가정도 그렇고 넓게 생각한다면은 어떤 지역도 국가도 다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여기 지역이 공동 묘지였습니다. 공동 묘진데 공동 묘지의 그 시체들을 각자 이렇게 태운 게 아니라 그냥 한데 몰아서 갖다가 뿌려버렸단 말입니다, 여기 공동 묘지로. 그러니까 사람이 해를 당할 수밖에. 도둑이 생기고 사람이 다치고, 한 사람은 죽어버리고 이렇게 되니까,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처음 여기에다 절을 짓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해골이 하나하나가 쭉 그냥 물밀듯이 밀어닥쳤습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여러분이 공부한 대로 어디 대답해보십시오. 그걸 어떻게 해야만이 없앨 수 있겠습니까? 예?

신도1(남):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큰스님: 말로만 그래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하하하. 이 마음 속의 진실과 또 극치적인 나라는 게 없고 상대도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 지금 말씀하신 거와 마찬가지로 여래가 되죠. 이 여래, 이 자체는 어떠한 부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모두가 돌아가는 자체가 그대로 여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이 마음공부하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아, 둘이 아닌데 뭐.’ 둘이 아닌데 해도 체가 없는 거니까, 나도 마음이 체가 없는 것이요 상대도 체가 없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입력을 한다면 모두 두드러지지 않는다. 마음 속에 이 세상을 다 넣어도 그릇이 작지 않고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꺼내도 줄지도 않고. 아시겠죠?

그러한 것은 말로 하는 게 아닌데 방편으로써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듣고 한데 떨어지지 않는다면 법이 될 것이고, 내가 말을 하는데도 한데 떨어트리지 않고 말을 한다면 이것도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듣는 자와 하는 자가 항상 둘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한데 합쳐져서 밝아질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네가 했다 내가 했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한 사이도 없고 내가 말한 사이도 없고, 나도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고. 그 원인이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었을 뿐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그러면 이것으로써 그만 하고 질문이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삼배를 올리는 질문자에게) 삼배를 일배로 하세요. 허허허. 몸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삼배가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질문자1(여): 스님, 간단하게 제가 무와 유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산 사람들이, 전체가, 무와 유가 같이 이렇게 산다는 걸 근래에 와서 더 절실하게 느끼거든요. 그래 제사(祭祀)라든가 이런 걸 지낼 때 집안 전체 싸움이 난다거나 이랬을 때에, 그 무의 세계에서 요런 문제를 만든다는 거를 제가 느꼈어요. 숙모님이 추석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는데 그분 돌아가신 이후로 산소를 갔다 오다가요, 그 이웃집에서 삽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한 사람은 도망가고 뒤에서 삽을 들고 도망간 사람을 잡으려고 그러고, 연속 연속 낫을 들고 들어가고 몽둥이 들고 쫓아가는 그런 문제들도 무의 세계에서 이 문제가 있다는 걸 제가 이렇게 알게 돼가지고 생각을 해보니까 전체가 무와 유가 이렇게 같이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큰스님: 그런데 무도 아니요 유도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정신세계에서만 하는 것도 아니고 물질세계에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발생이 되고 가라앉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재(齋)를 지내거나 천도를 시키거나 하더라도 그게 오래 걸렸습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그것이 부러지지 않게 하느라고 천천히 갔던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저 찹쌀가루 전병 부쳐서 세 조각 아니면 일곱 조각, 일곱 조각 아니면 아홉 조각, 열두 조각 이렇게 해놓고…. 일체 부처님의 조상이나 이 중생들의 조상이나 따로 없으니까 모두가 한 조상, 한마음의 조상으로서 일체 영령들에게 다 할 수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게. 표시! 저 불 켜놓고 향 켜놓고 물 한 그릇 떠놓고 그거면 족합니다.

그래서 이 영령들이 상을 차려놓으면은 상 차려놓았다는 스님네들의 마음부터 벌써 캐봅니다. 상 차려놓았다는 생각을 벌써 영령들이 알거든요. 그 상 차려놓은 것만 알게 된다면 영령들이 어떻게 천도가 됩니까? 먹을 생각만 하겠지. 그러니까 우주 전체 그 한 티끌만도 못한 우주를 한꺼번에 거기다 제시한다면, 우주 삼세를 다 제시한다면, 문을 열어준다면 그건 저절로 천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천도가 됐는데 왜 또 지내느냐, 이러겠죠? 그거는 죽어도 마음들은 체가 없기 때문에 이 공간 안에 꽉 찰 수도 있고 천도가 됐다 하더라도 그거는 그 자식들이 은혜를, 부모의 묵은 빚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하는 것도 되고 둘째는, 그 밑에 자식을 기르는데 제도를 하기 위해서도 한다 이겁니다. 그게 아니라면은 그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그 방편을 쓰더라도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그렇게 방편을 써서 그 죽은 영령들도 산 사람들의 영령들도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다는 사실을 모두 여러분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님들이 돈만 받고선 상을 안 차려줘. 이런 데가 어딨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냥 상 차려주고 목탁이나 두들기는 데로 가야지 별수없죠.
질문자1(여): 집안 사정으로 인해서 제사를 양쪽 집에서 지내거든요. 큰집, 작은집에서. 그래서 저는 요 근래 제 마음자리에다 제사를 지내고는 제사 지내러 두 집에 다 안 갑니다. 그냥 내 마음자리에 전생이 있다면….

큰스님: 이거 봐요. 좀 사람이 쥐락 펴락이 있어야지. 바늘을 끼었다 뺐다 끼었다 뺐다, 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해야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지 이게 쥐었다 폈다 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사람이 못 돼. 그러니까 제사를 지낼 때에 가더라도 마음으로서 그렇게 하면은 아무리 큰집에서 그렇게 차렸다 하더라도, 마음으로서 당신은 그렇게 하면서 거기에 모두 응해서 따라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또는 영령들도 좋고 이게 다 좋은 거 아닙니까? 댁이 마음이 흥락하고 좋으면은 조상님도 좋고. 그런데 그 몸뚱이가 뭘 잘났다고 거기를 안 갑니까? 하하하. 그놈의 ‘나’라는 거를 빼놓지 못하기 때문에 안 가고 간다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것까지도 마저 빼놓고 슬근슬근 물레방아 돌아가듯 슬근슬근 돌아가십시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2년 9월 20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