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옛성길 그리고 각황사

조망 좋고 걷기 편한 옛성길
한 걸음 안에 도심과 숲길 있어
대강백이 손수 낸 각황사 오솔길
“지혜란 물 건널 때 배를 타는 것”

한 해 중 가장 밝았던 저녁이 지나고, 지키며 견뎌야 하는 새로운 계절의 문턱에 선다. 영혼이 육신을 필요로 하듯 자연은 계절에 깃들어 있고, 영원한 육신이 없듯 자연은 새로운 계절에 깃들어 간다. 푸른 잎들이 푸른 과거를 놓고, 흙이 메운 곳엔 가을꽃이 돋아 있다. 폐부 끝까지 파고드는 대기와 망막의 구석구석을 걷어 젖히는 푸른 하늘을 대신할 말을 찾을 수 없다. 가을이다. 한가위 다음날인 10월 1일 북한산 둘레길 7구간인 옛성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각황사를 만났다.

직지사 강원의 강주를 지낸 의룡 스님이 1966년에 북한산 기슭에 세운 각황사. 지나던 객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회랑에 앉았다.
옛성길은 탕춘대성 암문 입구에서 북한산 생태공원 상단까지 걷는 약 2.7km 길이며, 모두 걷는 데는 약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옛성길은 성문을 통과하는 길이다. 부드러운 흙길을 밟으며 옛성길을 오르면 탕춘대성 암문을 지난다. 전망대에 이르면 족두리봉을 비롯해 향로봉과 비로봉, 사모바위, 승가봉, 나한봉, 문수봉, 보현봉 등 북한산의 봉우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기자는 녹번동에서 시작되는 산책로를 통해 중간 지점인 전망대부터 걸었다. 전망대는 서울시가 지정한 우수조망명소다. 소나무 숲이 울창한 옛성길은 걷기 쉽고 곳곳에 쉼터가 있어 탐방객들이 많이 찾는 구간이다. 전망대를 지나 약 500m 정도 걸으면 구기터널과 연결된 대로와 만나게 된다. 거기서 둘레길을 버리고 대로를 건너 구기터널 쪽으로 걸으면 터널 입구에서 각황사 가는 길을 만난다.

서울시가 전망명소로 지정한 옛성길 전망대에 서면 북한산의 봉우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각황사 가는 길은 터널 바로 앞의 계단길에서 시작되는데,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아스팔트길에서 한 발작만 옮기면 숲길이 시작된다. 둘레길을 걷다가 걸어도 좋고, 처음부터 각황사길을 생각하고 시작해도 좋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불광역에서 내려서 구기터널 쪽으로 700m 정도 걸으면 구기터널이 나온다. 터널에서 각황사까지는 약 900m다. 도심에서 갑자기 들어선 각황사 숲길은 문을 열고 들어온 길이 아니라 담을 뛰어 넘어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길이다. 달리는 자동차의 굉음과 도심의 소음들이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다가온다. 흙이, 가을꽃이, 숲이, 개울이, 시작된 가을이. 기자는 2006년 5월에 각황사를 찾은 적이 있다. 각황사 조실 의룡 스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각황사는 의룡 스님이 1966년에 세운 절이다. 흙 위로 드러난 소나무의 뿌리가 힘겨운 발밑을 받쳐주고, 숲 끝에 닿을 듯 서있는 깊은 하늘이 손목을 잡아끈다. 각황사 가는 길은 각황사를 지은 의룡 스님이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내리며 손수 낸 길이다. 각황사를 세웠던 그 때는 길이 없었다. 계곡을 따라 발을 적시며 다녔다고 했다. “차를 타고 들어가는 것보다 오솔길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해요. 개울로 다니던 것을 절을 지은 후 다음 해에 오솔길을 냈어요. 울도 담도 없으니까 계곡 전체가 도량이죠. 얼마나 좋습니까?” 환하게 웃던 스님이 떠올랐다. 그렇게 스님의 발자국을 따라 20분 쯤 걸으면 각황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울도 담도 없는 각황사 입구에서 코스모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다. 조실 스님을 찾았던 그날, 코스모스 대신 그 자리에 조실 스님이 서 계셨었다. 경사진 길 끝에서 반갑게 웃고 계시던 스님이 다시 떠올랐다.

각황사 가는 길
“부처님 광명으로 환한 도량이 바로 각황사에요. 그믐에도, 비가와도 환합니다. 장마가 져도 개울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지요.” 탑하나, 종하나 없다. 법당 하나, 작은 텃밭 두 개. 백구 두 마리. 그리고 걸어온 오솔길 하나. 그 때도 그랬다. 의룡 스님은 김천 직지사 강원의 강주를 지낸 대강백이다. 스님은 2011년 5월 원적에 드셨다. 스님은 관응, 탄허, 명봉 스님으로부터 경전을 익혔고, 강맥을 이었다. 그리고 서른 살 때 지금의 각황사에 삼매정수선원을 짓고 평생 공부했다. 도량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스님이 안 계시다는 것뿐이었다. 스님 몸 하나 겨우 누일 작은 방도 그대로였다. 그 때 이 작은 방에서 스님의 법문을 들었었다. “지혜라는 것은 별 것 아닙니다. 물을 건너갈 때는 배를 이용하고, 산을 올라갈 때는 자신의 다리를 이용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또한 모래를 시루에 담고 떡이나 밥을 지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들은 시루에 모래를 담고 불을 땝니다.” 스님은 뵐 수 없었지만 각황사엔 대강백의 기억이 있었다.

마당에서 백구가 짖는다. 백구를 묶어놓은 줄이 풀려 백구 한 마리가 도량을 돌아다닌다. 묶여 있는 백구가 백구를 보며 짖는다. 등산객이 걱정스럽게 절 식구를 찾는다. “백구 줄이 풀렸어요. 달아나면 어떡해요. 빨리 나와 보세요.” 공양주가 문밖으로 얼굴을 내며 말했다. “백구는 어디 안 가요.” 백구는 풀린 줄 끝에 돌아와 있었다. 그랬다. 백구는 달아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묶어놓지 못해 어지럽고 걱정스러운 세상이다. 백구도 법문을 하고 있었다. 등산객은 다시 길을 시작했다. 각황사 뒤 쪽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 계속 걸으면 향로봉과 비봉 쪽으로 갈 수 있다. 등산에 뜻이 있다면 각황사를 들러 봉우리까지 올라가도 좋고, 다시 내려와 둘레길을 걸어도 좋다. 북한산 둘레길은 구간과 구간이 계속 이어지는 길이어서 걷고 싶은 만큼 걷고 내려오면 된다. 물론 시작도 편한 곳에서 시작하면 된다. 각황사를 뒤로하고 다시 오솔길을 걷는다. 다시 도심의 소음이 들려온다. 북한산 기슭 한 편엔 대강백이 손수 길을 내고 손수 지은 도량이 있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강맥을 이은 대강백의 이름이 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 오솔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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