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염주

평상복 차림의 이하응 모습

염주는 복잡한 심정 보여줘

흥선대원군 영정
 

인사동의 끝자락에 위치한 안국역에 가면 사적 제 257호로 지정된 운현궁(雲峴宮)이 있다. 바로 이 곳이 원래는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는데, 지금은 그 일부가 덕성여대의 교사(校舍)로 쓰이고 있다. 조선 26대 왕인 고종이 12세까지 자라던 장소이고, 명성황후가 세자빈이 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소설가 금동(琴童)김동인(金東仁)이 1933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그의 대표작인 소설이 바로 이 궁의 이름을 땄다. 〈운현궁의 봄〉이라는 이 소설에서 흥선군 이하응의 일대기를 흥미진진한 사건을 번갈아 연결하면서 재미있게 윤색해서 쓴 것을 어린 시절 읽은 적이 있다.

이 곳에서 흥선군은 서원을 철폐하고, 경복궁을 중건하고, 세제를 개혁하는 등의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고, 지금은 서울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개방되어 유물전시관을 개관하고, 고종이나 명성황후의 가례를 재현하고, 국악공연 등의 공연을 진행하는 곳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고종 2년(1865)에 절을 중창불사했는데 그곳이 바로 흥천사이다. 그의 지원으로 각도(各道)에서 시주를 받아 절을 다시 지었다. 이때 그는 흥천사라는 이름으로 복원하도록 하고, 휘호를 내렸으므로 지금도 만세루에 그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조 원찰중에 최초의 사찰인 이 절은 태고종의 노스님들이 거주하면서 퇴락했던 것을, 지금은 낙산사를 성공적으로 중창불사하신 정념 스님께서 중창을 맡아 강북을 새로이 대표하는 고찰로 만들어가고 있다.

사찰 내에는 아직도 보물로 지정될 만한 귀중한 불교문화재가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태조 이성계가 지었던 사리전이다. 중종 5년(1510) 3월에 중학의 유생들이 이단을 쓸어버린다고 불을 질러 보물, 불경과 통도사에서 전해오는 우리나라 유일의 석가여래의 사리만을 안치한 이 전각이 불타버렸다.

또 하나는 세조 7년(1461)에 제작한 흥천사 대종이다. 일제시대에 덕수궁에 옮겨져 현재까지 걸려 있는 것이다. 흥천사 종명(鐘銘)은 특히 세조 당시 최고의 명필이었던 정난종(1433~1489)의 글로 더욱 귀중한 종이다.

만약에 대종을 다시 절로 옮기고, 사리전을 다시 건립하고,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다시 모신다면 한국의 중심인 서울에서 불교를 대표하는 대찰이 될 가능성이 많은 절이다. 한 때는 140명의 스님들이 거주하던 큰 절이였다니 지금 돌아보면 많이 아쉽다.

여기 소개하는 영정은 도화서 화원인 희원 이한철과 혜산 유숙이 1869년에 그린 그림이다. 비단에 담채로 아름답게 그린 이 영정은 평상복차림의 이하응이 의자에 좌정하고 않아 그림을 그리고 낙관을 찍거나 사무를 본 흔적이 있다.

크기는 133.7×67.7㎝이고 보물 제 1499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이다. 이 영정이 특이한 것은 조선조에 그려진 많은 영정들과는 달리 고인의 평소 생활을 책상위에 놓여져 있는 많은 지물(持物)들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칼자루 없는 장검이 책상에 비스듬이 기대있고, 책상위에는 인주함과 붓, 자명종과 찻잔, 안경과 향로 등이 있다. 여기서 유교를 국시(國是)로 한 조선의 군주로서 그가 항상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불교유물이 있다. 바로 염주다.

염주는 수주(數珠)·송주(誦珠)·주주(呪珠)라고도 하며 염불의 횟수를 기억하는 구슬들을 꿴 것이다. 〈목환자경〉에 의하면 “번뇌를 없애고자 하면 목환자 108개를 끼워서 항상 지니되, 앉거나 걷거나 눕거나를 막론하고 불법승(佛法僧)의 명칭을 외우고 외울 때마다 목환자 하나씩을 넘겨 그 수가 많아질수록 업장이 소멸되어 더없이 안락한 과보를 얻는다”한다.

이하응 거사가 손에 쥐고 돌리곤 했던 이 단주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춘추전국시대처럼 파란이 많았던 조선왕조의 말년을 살았던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는 법구(法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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