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6호 9월 19일]한 걸음 한 걸음 자유인으로서 보람 있게 살 수 있어야

▲ 그림 최주현

 부처님 법을 알고 싶습니다

문) 절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부처님 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좀 알기 쉽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사실 부처님이라는 것도 이름인 것입니다. 그것은 즉 말하자면 똑바른 ‘참사람’, 참사람이라는 것이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 참사람 되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말고 또는 참사람 아니 된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점의 공한 자리에, 공한 데서 나오는 거 공한 데다 다시 놓는다면, 다시 맡겨 놓고 믿음을 진실하게 갖는다면,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바로 거기에서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서 알게 되고, 그때는 부처님의 마음도 모든 중생들의 마음도, 모든 걸 다 알게 되며 남한테 해하지 않는 마음,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이 됩니다. 이 자비라는, 헐고 깨끗하고 더럽고 이런 것이 몰락 없는, 높고 낮음도 없고 부처 중생도 없는 고러한 한 점의 그 내놓을 게 없는 이런 빈 그릇 자체가 바로 우리가 찰나찰나 나투면서 밝게 비추어 주는 바로 손 없는 손이요, 발 없는 발이요, 길 없는 길이라. 이름하여 평손이요, 평발이요, 이것이 바로 한 손 들어서 천지를 삿갓으로 쓰고 한 손 들어 해와 달을 꿰어 굴리면서, 한 발 들어 이산 저산 푸른 산 한 발 디디니, 목마르면 물 마시고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는 말이 얼마나 참사람의 마음이겠습니까?

참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여러분이 목마를 때 물 먹겠다 하고 계산하고 먹습니까? 무심으로 그냥 떠먹습니다. 그게 바로 참사람의 활용이에요. 여러분이 금을 가졌다면 그걸 얼른 내놓지 않지만 걸레를 빨아 쥐었다면 빨리 내던질 겁니다. 빨리 빨아서 얼른 짜서 놓습니다. 금을 가졌더라도 그렇게 빨리 짜서 걸레 놓듯 하십시오. 신발 벗어 놓고 올라가듯. 아시겠습니까? 금을 가졌다고 해서 이걸 소중히 생각하는 건 절대 금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갖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관리인만 되라는 얘깁니다. 착을 두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고 분수를 알고 살고 건너뛰지 못할 걸 건너뛰다가 개천에 빠지지 말고, 구덩이에 빠지지 말고 서서히 침착하게, 산이 태산같이 이렇게 있으면 서서히 돌아가고, 구덩이가 있으면 구덩이에 채워 놓고 물이 흐르듯이, 이렇게 침착하게, 어떠한 악조건이 닥친다 하더라도 안으로 굴리면서 그 자기 주인공 한 점에,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온 거니까, 자기로 인해서 나온 거니까, 잘못했든 잘했든 자기가 있으니까 나온 거니까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고서 한번 안으로 굴려서 바로 다시 놓는 그런 그 침착한 마음, 그리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을 갖는다면 스스로서 수레바퀴 돌듯 합니다, 시간과 공간도 없이.

이것이 참사람의 법입니다. 부처님의 법이라기보다도 참사람의 법을 알아야 그 부처님의 가르쳐 주신 그 뜻도 알 것이요, 우리가 한마디 한마디 해 놓으신 그 뜻을 바로 우린 지금 현실에 맞추어서 현실의 용어로 대치해서 그것을 서로에 이득이 있고 공덕이 되게끔 이렇게 전달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악조건의 구정물 핏물 고름물을 전부 한데 합쳐서 말갛게 만들어서 생수물을 해서 떠 주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한 방울의 생수가 아니라면 이건 전달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의 그 뜻을 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마디 같이 안 해도 오고 감이 없이 전달이 되고, 미국이다 할지라도 그 마음만 내면은 서로 전달이 되고, 돌하고도 말을 하게 되고 일체 만물과 더불어 같이 서로 말을 하고 서로 듣고, 서로 공생하고 공체로서 돌아가는 조화를 이루니 그것이 바로 보살이며, 부처며, 그것이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를 자기한테다 두고 자기 몸뚱이는 탑돌이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변소에 들어가면 부처가 없습니까? 법당의 형상만 부첩니까. 그 형상이 자기 형상이요, 그 마음이 내 마음이요, 모두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아마도 부처님이, 그 부처님 마음이 바로 자기 마음이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것을 부처가 알고 부처가 아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으니 자기는 껄껄 웃을 겁니다. 한 번 하늘을 쳐다보고 웃고 한 번 땅을 내려다보고 눈물을 흘려서 자비로서의 이 만물을 다 양식으로서 적셔 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반문해 보십시오. 나는 이날까지 살면서 ‘부처가 돼야지. 내가 위대하게 돼야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왜? 사람은 어디까지나 지옥을 거치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듯이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자기가 경험 안 해 본 것은 아픈 줄도 모르죠. ‘아! 남이 그렇게 아팠다더라.’ 이런 정도지, 그렇게 실감나게 아파 보지 못합니다. 어디고 한 번씩은 다 들어가서, 물 속에도 빠져보기도 하고, 불 속에도 뛰어들어 보기도 하고, 떡그릇에도 엎드러져 보기도 하고, 번연히 알면서도 엎드려져 보는 그러한 패기가 있어야 하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이 공부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자면서 먹을 줄 알아야 하고, 먹으면서 쌀 줄 알아야 되고, 싸면서 잘 줄을 알아야 한다. 이건 끊임없는 길을 말하는 겁니다. 자는 것은 푹, 우리가 모든 것을 한 점에서, 그 공한 한 점에서 나오는 거 한 점에다 다시 맡겨 놓는 작업을 하는데, 습이 다 떨어져서 녹아 버리니까 그만 푹 쉰 거를 말하는 겁니다. 그 푹 쉰 사람이, 빈 그릇이 된 그 사람이 만약에 이 모든 법을 굴린다면 하나 깔축없이 걸림 없이 굴릴 거라 이겁니다. 담았다 꺼냈다 담았다 꺼냈다 해도 항상 그릇은 비어 있을 테니까. 그러니 그렇게 담았다 꺼냈다 담았다 꺼냈다 하는 게 아니라 담으면 싸 버려요, 담으면 싸고 담으면 싸고. 싸면서 또 자. 이 세 가지의 뜻이, 우리가 평생을 배워도 못다 배우는 이런 진리가 거기에, 근본이 거기 들었어요. 자고 먹고 싼다 하는 그 세 마디에 다 들어 있다 이겁니다, 부처님 법이.

이 도리에는 꿈도 생시도 없고 낮과 밤도 없는 것입니다. 동ㆍ서도 둘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잘 적에도 길을 인도하는 당신이, 모든 걸 내고 들이는 당신이 나를 잘 이끌어서 나의 사량적인 이 분별을, 모든 거를 길을 밝혀 달라고 하는 그 마음으로서 그냥 관하고, 도대체 참 당신은 내가 알 길이 없으니까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진실된 마음으로서 화두를 잡고, 내 공한 몸뚱이가 화두니 그 몸뚱이에서 나오는 거 몸뚱이에다 다시 놓고, 믿고 거기에다가 모든 걸 놔요. 그런다면은 자기가 억겁을 거쳐서 나온 그 습, 종문서는 몽땅 타 버릴 테니까. 내놓을 수 없는 원자력이거든요. 자력이 돼서 그냥 닿기만 하면, 갖다 놓기만 하면 타 버리는 거죠. 그래서 스스로서 자기 눈에서는 자기 모르는 눈물이 스스로 흐르게 되고, 그 흐르게 되는 눈물은 바로 그 습의 업이 그대로 녹아 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진짜로 나는 여기를 믿고 다닙니다. 나는 공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자기를 자기가 못 믿어요. 자기를 자기가 못 믿고 자기가 자기 부처를 못 믿고 자기 형상만 보니까 자기를 자기가 못 믿죠. 자기 그 공한 빈 그릇을 모르니까. 고정된 게 어딨다고 그게 비지 않았다는 겁니까, 모두가. 자기가 어디 있나요? 어떤 사람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요? 남편을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요, 부모를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요, 자식을 만날 때 자기라고 할까요. 순간순간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는데. 그러니 공했다는 건데, 그렇게 무수히 나오는 그 자체가 바로 그 공한 데서 나오는 것이니 거기다가 맡겨 놓고 자기는 거기서 형성된 거니까 그대로 공부하다 보면은 그대로 자기 마음과 실상이 나와요, 그대로.

저의 업보 탓일까요?

문) 저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하고 후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는 패스했지만 변변한 직업조차 없는 터라 결혼은 꿈도 못 꾸는 상태입니다. 이런 게 모두 저의 업보 탓인지요? 그렇다면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지요?

답)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는 살림에, 생활에, 생명에 의해서 돌아가는 대로 이렇게 사는 것이 그대로 여여하며, 소소영영하며, 무한하며 이렇게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업보가 많아서 이렇게 저렇게 됐다고 모두들 하곤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알지 못하면 모든 걸 업보라고 그렇게 단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을 하지 마십시다. 업보가 있다고 단정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마음 한생각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업보가 있다 하더라도, 바로 자기가 수억겁을 지었다 하더라도 한생각을 돌리면 그 억겁은 무효로 돌아갑니다.

내가 항상 얘기합니다. 저 녹음테이프에 어떤 말을 잔뜩 넣었습니다, 끝까지. 그랬는데 한 순간에 그 테이프는 바로 다 지워졌습니다. 왜? 내 마음이 한생각 달라져서 돌아가다 보니까 자기가 해 놓은 말과 그것이 다 지워져 버렸어요, 어느 순간에.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억겁을 내려오면서 죄업과 인과, 유전성 이런 것을 다 지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지은 거고 바로 내 주인공에 의해서 모두 이렇게 된 것이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지은 거니까 바로 그 지은 데서 해결을 볼 것이다.’ 하는 그런 믿음을 갖고 놓는다면 일순간에 지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용광로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거기에 맡겨 놓고 물러서지 않고 믿음이 진실하다면 어느 거든지, 즉 말하자면 진화 안되는 것이 없고, 또 진화가 된다 하더라도 끌려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섭리대로 가는 거하고 내 자유껏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하곤 다른 겁니다. 기계도 고장이 나면 바로 조립한 사람한테 이 기계를 고치라고 맡겨야 자기가 조립을 했기 때문에 어디서 고장이 난 걸 틀림없이 알기 때문에 금방 고쳐 놓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못났든지 잘났든지 자기가 형성시켰고 자기가 억겁을 끌고 나왔고 또 진화를 시켰고, 차원을 내리고 높이는 거는 자기 성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업보에 억눌리고 유전에 억눌리고 모든 그런 것에 끄달리지 말라 이겁니다. 그것부터 끄달리지 말아야지 그것에 끄달린다면 공부 못합니다. 내가 배웠다, 내가 안다, 권위가 있다…, 무엇이 그 공부하는 데 마음에 붙겠습니까? 그러한 권세도, 권위도, 또 학식이 높은 것도, 못 배운 것도, 아무것도 붙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선량하고 겸손하고 믿음 있고 눈이 새파랗게, 불빛이 나듯이, 즉 말하자면 정열적인 믿음, 그러면서도 항상 유순하게, 순조롭게, 스스로, 요렇게 믿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하치 못한 사람이 따로 있고 또 위대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린 동등한 인간으로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냥 갈 수 없다는 결론에서 억겁을 거쳐 오면서 쓰라린 아픔에 이어 가는 그 피를 흘렸기에 우리는 더 피를 흘릴 수가 없고, 더 아픔을 당할 수도 없고 더 속박당할 수가 없고, 더 노예로 살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스럽게, 자유인으로서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자유스럽게 보람 있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힘든 남편 내조 잘하고 싶은데…

문) 요즘 바깥 살림이 어렵다보니 직장생활 하는 남편이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제가 남편 내조도 잘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가고 싶은데 어찌해야 잘할 수 있을까요.

답) 여러분이 보살이 돼서 내조를 하되, 바깥에서는 남편을 앞에 세우더라도 항상 내조가 거름이 돼서 어머니가 돼 줄때는 어머니가 돼 주고, 딸이 돼 줄 때는 딸이 돼 주고 또 친구가 될 때에는 친구가 돼 주고 또는 동생이 돼 줄 땐 돼 주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그 지혜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에 애하고 어른하고 만나면 말이 안 통하죠? 그렇게 돼선 안 됩니다. 애를 만나면 내가 애가 돼 줘야 돼요. 어른을 만나면 어른이 돼 줘야 하고요. 이렇게 해 나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신다면 바로 우리 가정 기상대가 참 훌륭할 거예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가 기상대를 가지고 논의하는데 그런 비오는 기상대만 가지고 얘기가 아니라 우리 지금 가정에도 기상대가 있지 않습니까. 착 보니까 벌써 기상이 쭈굴쭈굴합니다. 그냥 꾸물꾸물하고 검은 구름이 끼었다 그러면 비올 거거든요, 그게. ‘아, 꾸물꾸물하구나. 이거 비오기 직전이구나. 그러니까 이거는 방지를 해야겠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우리는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애들의 기상도 그렇고, 어른의 기상도 그렇고, 전체의 기상도 그렇고. 그럼 위에서 하나 기상이 나쁘면 아래까지 내려오거든요. 어느 한 부분만 비가 와도 그쪽은 다 응달이 집니다. 꾸물꾸물하거든요. 그러니 활짝 개이게 됐나? 이것도 우리가 어머니들로서의 딱딱 들어가 맞게끔 살펴야죠. 그것이 어디까지나 우리가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높게만 두지 마세요. 얕은 사람을 위해서 심부름꾼입니다, 높은 사람은. 언제나 윗사람은 심부름꾼이지요. 그래서 여북하면 부처님께서도 ‘똥친 막대기’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자체가 애들을 길러도 그 기상을 잘 봐서 “공부하라!” 이렇게 하고 싶어도 좀 검은 구름이 끼었다면 “얘, 좀 쉬었다 해라.” 차라리 요렇게 해 주면은 속으로 ‘아이, 쉴 사이가 어딨나, 뭐. 해야지.’ 이러지마는 “얘! 얼굴 찌푸리고 있지 말고 공부나 좀 해라.” 이런다면 그거는 벌써 비가 오기 시작을 합니다. ‘나는 우산 쓰고 그냥 나갈 거야.’ 이럭하거든요. 그러니 그러한 가정의 기상대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기상대만 있는 게 아니라 또 이 몸뚱이에도 기상이 있거든요. 야, 요 간이 기상이 나쁘냐, 좀 꾸물꾸물하느냐. 옆구리가 결리느냐, 이마가 걸리느냐. 이게 다 기상이에요. 통신기상. 그러니 우리가 모든 게, 하나를 알면 열 가지를 방지할 수 있는 그런 우리 삶의 보람을 가질 수 있는 거. 이것이 바로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며 우리들의 법이면서도 이것이 여여한 도로 승화될 수 있는, 도(道)라는 이름이 도가 아니라 우리가 실천으로 옮길 수 있다면 그게 도거든요.

그리고 높은 것만 알고 높은 말만 제일이라고 하지 말고 얕은 것이 있기 때문에 높은 게 있고 밥 한 숟가락이 있기 때문에 한 사발이 있지, 만약에 한 숟갈이 없다면 한 사발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한 숟갈 양이나 한 사발 양이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비행기로 가는 거나 마차로 가는 거나 이것은 어느 게 빨리 간다고 할 수가 없어요. 상식적으로는 비행기가 빠르다고 할 테죠.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초월된 데서는 이게 빠르다 저게 빠르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물질이 빨리 가고 늦게 가고 그럴 뿐이지, 우리 이 마음의 도리는 마음대로 빨리 갈 수도 있고 줄일 수도 늘릴 수도 있다는 그 점,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점이 여러분한테 다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각자의 자기의 차원에 따라서 가정에 아프거나 뭐 안되는 일이 제가끔들 있겠지만 그 주인공에다가 모든 거를 맡겨 놓고 관할 수 있다면 남편도 가정도 기상이 좋아질 것입니다.

어떤 스님들을 보고 실망한 일이 있는데…
문) 저는 절이 좋아서 가끔씩 절에 가곤 하는 합니다. 그런데 신도들을 대하는 어떤 스님들의 모습에서 실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수행자라기보다 그냥 살림꾼 같다는 분별심이 일어나 속상했습니다. 스님이라면 우리와는 좀 달라야 되지 않겠는지요.

답) 스님네들도 그렇지마는 여러 신도님네들도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자세는 스님네들도 신도가 잘못되고 잘되고, 예쁘고 밉고 그런 걸 보지 말아야 하고, 여러 신도님들도 스님네들이 밉고 예쁘고, 또는 잘하고 못하고 이걸 봐서는 안 됩니다. 자세가 말입니다.
우리는 한 철 놀러왔다가 가는 겁니다. 도시락 싸 가지고 왔든 못 싸 가지고 왔든, 잘 입고 왔든 못 입고 왔든, 한 짐 지고 왔든 한 짐을 못 지고 왔든 우린 놀러왔다 바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점으로 갔다 다시 돌아오곤 하는 것이죠. 인생살이의 반복된, 쳇바퀴 돌듯 하는 이 진리를 우린 파악을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거하고 우리 스님네들이 생각하는 거하고, 또 스님네들이 이 도량에서 행하는 법하고 여러분이 살림을 하면서 살아나가는 행하고, 여러분이 가만히 음미해 보십시오. 한번 인간의 젊음을 불사르고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된다는 게 그렇게 수월친 않습니다. 그 한 가지만 봐도 여러분은 숭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먼저 인사를 해야 할 것만 생각하고 ‘에이, 그 스님. 아무 것도 아니야. 아상이 있어서 그냥 뭐 안 해. 뭐, 신도들 봐도 그냥 획 돌아가고 마는 걸.’ 이렇게 생각하시지도 마세요. 그거는 바깥으로 끄달리는 겁니다. 또 스님네들이 ‘아이구, 신도들이 인사도 안 하고 돌아가는데….’ 이렇게 해서도 그건 바깥으로 끄달리는 겁니다. 양면이 다 그렇죠.

우리가 놀러왔던 길에 어떠한 게 조금 잘못됐든 잘됐든 자기 할 일만, 어디가 뭐가 떨어졌으면 주워서 얹어놓고, 또 밥이 없는 사람을 보면 밥을 같이 나누어 줬으면 됐고, 또 짊어지고 오지 않은 사람은 같이 나누어 줬으면 됐고….
그저 ‘잘한다’ 이런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금세 그 자리에서 봤으니깐 그냥 하고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남한테 칭찬받으려고 하지도 말고 가는 거 쫓아가서 하려고 하지도 말고 오는 거 마다하지도 말고, 오직 공부하는 데는 그저 관하고 정진하는 거, 모든 거는 바깥에서 끄달려서는 안 된다는 점,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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