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앙굿따라 니까야>

▲ 그림 박구원

 

나는 이럴 때마다 놀란다. 우리가 알기에는, 그분은 깨달으신 분이 아닌가. 그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주만상의 근본 이치를 깨달은 것이라 배웠지 않던가. 깨달음의 내용은, 어려운 말로 하면, 연기(緣起)라는 말로 정리된다. 연기의 이치를 깨달아서 부처님이 되셨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그렇긴 하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배우고 가르쳐 오는 동안, 어쩌면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가르침이 추상화(抽象畵)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저 하늘 위에서나 벌어지는 일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아함경>이나 <니까야>를 통해서, 그분의 언어를 좀더 가까이에서 들어볼 때마다 새삼 느끼는 바가 적지 않다. 그분은 추상화를 잘 그렸던 화가가 아니다. 구상화(具象畵)를 즐겨 그리셨다. 아니, 어쩌면 사진작가였는지도 모르겠다.

인간들의 삶의 모습에, 인간들이 일상에서 쓰고 있는 마음씀씀이(用心)를 조용히 들여다 보신다. 카메라 앵글을 들이댄다. 아주 가까이 대고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클로즈업(close up)한다. 그 장면을 크게 인화하여, 우리 눈 앞에 대준다. 보라, 이것이 그대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그대들이 연출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 무상한 세월 속에서 ---.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같다.

이런 느낌을 받는 장면이 한 둘이 아닌데, 그 중에서 특별히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을 많이 찍어서 보여주신다. 사진작가들이 다 그렇겠지만, 부처님 역시 놀라운 관찰자이다. 세밀하게 지켜보시고 있다. 그 분의 관심은 저 하늘의 별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삶의 모습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사실주의자였다. 그는 현실의 인간들을 다음과 같이 유형화(類型化)한다.

① 묻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의 결점을 드러내는 사람과 다른 사람의 칭찬거리를 드러내는 사람.
② 질문을 받더라도, 다른 사람의 칭찬을 말하지 않는 사람과 다른 사람의 결점을 말하지 않는 사람.
③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사람과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는 사람.
④ 질문을 받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과 자신의 자랑거리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①에서 ④에 이르는 각 항목에서, 앞 부분에 해당하는 사람은 ‘저열한 사람’이고, 뒷 부분에 해당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있다.(일아 역편,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pp.515-516. 참조.) 나는 ‘저열한 사람’일까, ‘훌륭한 사람’일까? 혹 질문을 받지 않았을 때 남의 허물을 드러내는 정도는 아니라 해도, 질문을 받는다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수준은 아닌가?

도대체, 왜, 부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나와 타자가 대립하는 언어생활이야말로 ‘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기인(起因)하여 ‘나’를 더욱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나’를 없애고, 그 ‘나’를 내다버림으로써, 나는 ‘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타자와도 하나로 어우러지고, 타자를 위해서도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훗날, <천수경>의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으로 이어지는 길이 바로 <앙굿따라 니까야>의 이러한 말씀에서 시발(始發)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 나는 다른 사람이 묻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의 결점을 제3자에게 말한 일이 없는가? 오늘 하루, 나는 다른 사람이 묻지도 않는데, 나의 장점을 과대포장하여 제3자에게 선전한 일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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