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단체 ‘작은손길’ 김광하 대표

▲ 사진설명 : 김광하 대표는 … 연세대 상과대학 졸업 후 백봉 김기추(1908~1985) 거사로부터 참선을 배웠다. 1980~87년 다국적 기업인 ‘필립 브러더스’에서 근무하다가 1987년 무역회사인 도이상사(주)를 창업했다. 1997년부터 경불련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을 후원하고 봉사활동에 나섰다. 2004년 봉사단체인 ‘작은손길’을 설립하고 노숙자 시설인 ‘사명당의 집’을 개원했다. 현재 작은손길 대표, (주)도이상사 사장,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편집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04년 ‘작은 손길’ 설립
10여년 깨달음으로 가는 봉사
회원모집 안하고
국가후원 안받고
상 안내기 가족과 약속
어르신 노숙자 독거노인 이주민 탈북자
눈이오나 비가오나 만나는 이웃

초기 경전 보급, 저서활동도 활발
아침·점심·저녁 ‘자기 점검’
“부르지 않아도 먼저 벗이 되자”
‘유마경’ 첫구절 가슴에 새겨

부처님 가르침을 의지해 청정한 삶을 살고자 서원한 이들을 불자라 말한다. 한국 불자들은 통념적으로 1000만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들 모두 진정한 불자의 길을 걷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처님 당시 인도 꼬살라국의 권력층들은 불자로서 자신들의 삶을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우리는 왕을 모시고 여러 궁녀들과 더불어 놀았지만 항상 세 가지 일을 조심했습니다. 첫째 바른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둘째는 집착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며, 셋째는 거기에 넘어지고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모든 재물은 늘 세존과 출가자, 재가자들과 함께 쓰며, 제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바른 사유를 실천했고,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이웃과 함께 나눠가질 것을 약속했다.  봉사단체인 작은손길(사륜의 집) 김광하(60·(주)도이상사 사장) 대표는 10여 년 동안 작은손길을 이끌며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해 왔다. 김 대표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혜택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그건 부처님의 가피다. 봉사를 통해 명예를 추구한다면 고행이지만, 나에게 봉사는 단지 수행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깨달음으로 가고자하는 서원
9월 5일 서울 신설동 풍물시장 인근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골목골목을 돌아 허름한 2층 단독주택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그는 환한 웃음을 띠며 “이곳이 작은손길 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는 “누추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집안 곳곳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거실을 끼고 있는 커다란 주방에서부터, 쌀, 과일 등을 보관하는 창고, 주말이면 네팔이주민들의 아지트가 되는 안방까지. 소중히 간직했던 보물상자에서 보물을 하나 둘 씩 꺼내놓듯 집 구석구석을 소개했다.

김 대표는 이곳에 매주 화요일, 금요일, 주말마다 들려 물품을 운반하거나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차량운행 봉사를 담당하고 있다. 작은손길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2시 종로 3가 지하철역 근처에 계신 400여 어르신들에게 차와 사탕 등을 보시하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에는 을지로입구역 근처에서 200여 노숙자들에게 음식 등을 보시한다. 또 매주 수요일마다 독거노인들에게 반찬배달을 실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탈북청소년들에게 장학금 전달 및 사진교육을 통한 재능보시, 외국인노동자들에게는 주말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입양청년들에게 숙식제공에도 나서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봉사활동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오전에는 방앗간에 맡긴 떡을 찾아 다른 봉사자분들과 함께 을지로, 종로를 돌며 커피와 함께 나눠 드려요. 그렇게 수 백 명에게 나눠 드리고 주변을 청소하고 다시 돌아오죠. 그게 제가 하는 일의 다예요,”

김 대표는 현재 중소 무역회사의 사장이다. 하지만 그는 평일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시간을 쪼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997년 로타리클럽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심한 매질과 노동력 착취를 당한다는 김해성 목사의 강의를 듣고 그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회를 통해 2년 간 후원을 시작했다. 그러다 2002년 서울 김포에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꾸려나가다 2004년 ‘작은손길’을 설립해 본격적인 현장 봉사활동에 나섰다.

“처음 ‘작은손길’을 설립하면서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어요. 그래서 가족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제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죠. 첫째는 회원모집을 절대 하지 않는다. 둘째는 지자체 및 국가의 어떠한 후원도 받지 않는다. 셋째는 절대 상(相)을 내지 않는다였죠. 제 힘으로만 올곧게 한 길을 걸어가다 보면 언젠간 뜻을 같이 할 사람이 나타날 거라 믿었어요. 오로지 수행으로서만 이 일을 하겠다고 가족들을 설득시켰죠. 그렇다고 제 재산 모두 털어서 이 일을 하는 건 아니에요. 처음엔 회원이 10여 명도 안됐지만, 현재는 알음알음 알고 찾아와 주셔서 130여 명이 넘어요. 제가 정말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거죠.”

‘작은손길’은 오로지 회원들의 후원금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김 대표는 “최근 불광사, 봉은사, 금륜사 등에서 탈북학생들을 위한 장학금도 지원해 줘 운영에 큰 어려움은 겪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눌수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김 대표는 ‘작은손길’을 이야기할 때마다 ‘봉사단체’가 아닌 ‘수행단체’라고 강조했다.

“‘작은손길’은 단순히 봉사만 하는 곳이 아니에요. 저희는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수행단체예요. 일반시민단체나 복지단체에서는 활동의 규모가 중요할지 모르지만 불자들에게는 마음을 살피는 수행이 근본이 돼야 해요. 불교단체의 활동은 하심(下心)이 중요해요. 마음을 낮출 때 관용과 화합이 이뤄지기 때문이죠. 봉사활동이라도 자신을 높이는 마음이 있으면 남과 경쟁하느라 바쁘고 각박하게 마음을 쓰게 돼요. 봉사활동을 하더라도 주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는 마음이 곧 불교의 겸손이죠. 봉사 활동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이에요. 자비심을 놓지 않고 겸손을 지키며, 보시를 통해 만날 때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 김광하 대표가 봉사자, 탈북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여름캠프에서 즐겁게 게임하고 있다.

김 대표의 이런 원칙 때문에 회원들도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상(相)을 내세우지 않는다. 조용히 노숙자들과 어르신들에게 다가가 음식을 나눠주고 돌아오는 게 전부다.

“간혹 학생들이 찾아와 ‘여기서 봉사활동을 하면 도장 찍어주시나요’라고 물어요. 그러면 바로 돌아가라고 말하죠. 상(相)을 내기 위해 찾아오신 분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세요.”

김 대표가 ‘무주상보시’를 고집하는 이유는 이것이 진정한 불교포교라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대표는 “‘무주상보시’를 실천할수록 이것이야 말로 진정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실감한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가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이 저의 서원이에요. 깨달음은 인간이 두려움, 미움, 고통 없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이런 깨달음을 봉사를 통해 실현하고 싶어요,”

실제로 김 대표는 10여 년 간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면서 서로 경계 없는 만남이 무엇인지 느꼈다고 설명했다.

“처음 저희가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줄 때 사람들의 경계가 심했어요. ‘저들이 우리한테 왜 음식을 주는거지’라는 의심이 든 거죠. 그런데 저희는 합장만 하고 음식을 나눠주곤 그대로 돌아와요. 그렇게 꼬박 10여 년을 하니 사람들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을 느꼈죠. 실제로 타 종교에서는 음식을 나눠주기 전 종교적 의식을 오랫동안 진행해요. 그러다 보니 그들도 ‘아, 내가 이 찬송가만 부르면 음식을 먹을 수 있구나’라는 조건이 성립되는 거죠. 하지만 저희들에겐 ‘저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도 없이 이 음식을 나눠주는 구나’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어떤 조건도, 경계도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진정 부처님 깨달음의 길로 가는 길이라 생각해요.”

김 대표는 얼마 전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소개 했다.

“한 탈북학생이 그러더군요. 처음엔 ‘왜 우리에게 이렇게 아줌마, 아저씨들이 잘해줄까’ 고민했대요. 그런데 1~2년이 지나도 아무런 대가없이 자신에게 한 결같이 대하는 모습을 보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나도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살라는 뜻이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봉사자들이 감동받았죠.”

‘작은손길’은 ‘무주상보시’의 의미만 이해한다면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회원으로 맞고 있다. 2년 전부터는 가톨릭 신자인 회원의 소개로 교회에 매달 쌀 80kg씩을 지원하고 있다. 이 교회는 맞벌이 부부 자녀들을 위해 무료로 공부방을 열고 저녁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김 대표는 ‘무주상보시’의 원칙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사람이다 보니 어려운 고비가 오면 ‘누가 나를 안 도와주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김 대표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더욱 자신을 점검했다. 또한 사석에서 만난 지인들에게도 절대 자신이 봉사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도와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 때 내려놓는 게 필요해요. 혹시나 형편이 나은 사람이 후원금을 적게 주면 ‘왜 저 사람은 이것밖에 돈을 안내지’라는 분별심이 들때도 있죠. 그럴 때 마다 내 자신을 경계해요. 또 명예욕도 버려야 되죠. 그래야 진정 피안으로 갈 수 있거든요.”

이밖에도 ‘왜 하필 부랑자와 노숙자를 돕느냐’는 주변의 질타에 한동안 속앓이를 한 적도 있다. 처음 ‘작은손길’은 노숙자쉼터로 출발했지만, 인근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로 6년 전, 현재 자리한 주택으로 새로 터를 잡았다.

“노숙자는 엄밀히 부랑자와는 달라요. 정상적인 사람들이 노숙자로 추락하기까지 대개 2~5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IMF이후 이런 노숙자들이 많이 늘어났는데, 그들은 직업을 잃거나 빚에 쫓겨 가정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값싼 고시원을 드나들다 결국 노숙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또 추위에 떨다보니 몸도 성한 곳이 없고, 정신질환을 앓는 분들도 많죠. 대개 우리가 아는 부랑자는 100명에 10명도 안됩니다. 저는 그분들께도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 서울 신설동에 위치한 ‘작은손길’

대학시절 불교와의 인연
처음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연세대 재학시절 독서서클에 가입하면서 부터다. 서클활동으로 불영사 수련대회에 처음 참가했다 스님들을 만난 후, 그는 불교에 점차 관심을 가졌다. 이후 대구 동화사 양진암에서 경봉 스님의 법문을 듣기도 하고 경전공부도 열심히 했다.

“젊은 시절,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한 굉장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억압받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통해 이 사회를 어떻게 타계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당시 법정 스님이 번역한 〈숫타니파타〉를 읽고 초기불교에 빠져, 휴학을 한 뒤 동국대 홍정식 교수가 강의하는 초기불교 강의를 도강하기도 했다. 그러다 1977~1978년에는 보림선원의 백봉 김기추(1908~1985) 거사를 찾아가, 1년 반 동안 백봉 거사의 시봉자로 지냈다.

당시 백봉 거사는 〈금강경〉 〈유마경〉 〈선문염송〉 등을 통해 재가불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하고 법문을 했다. 김 대표는 최근 1년 동안 백봉 거사의 가르침이 시대에 묻히는 것을 염려해 서울에 보림선원을 다시 설립하고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밖에도 4년 전부터 지난해까지 ‘법과등불’이라는 불교모임공부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편집위원을 맡아 초기 경전 보급에도 앞장섰다. 그는 〈금강경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무문관 강송〉 〈금강경-깨달음에는 길이 없다〉 〈노자 도덕경〉 〈길 위의 삶, 길 위의 화두〉 등 많은 저서를 펴내며 문서포교에도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이런 이념들을 접할수록 ‘수행을 통해 너와 내가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갈증이 더욱 커져만 갔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을 정확히 알기 위해 봉사를 통한 수행길에 올랐다.

“이론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다 보니, 사람을 볼 때 지적능력을 많이 판단했어요. 분별심이 심했죠. 하지만 봉사를 하면서 사람은 ‘행(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저보다 학벌도 낮고, 많이 배우지 못한 분들이 조용히 봉사활동을 하며 보살행을 실천하시는 모습을 보면 제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김 대표는 “자신이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것조차 다른 봉사자들의 공을 가로채는 것 같아 죄송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내가 무엇을 할것인가’, 낮에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저녁에는 ‘오늘 내 자신이 어땠는지’ 점검한다.

“〈유마경〉의 첫 구절에 ‘사람들이 부르지 않아도 내가 먼저 벗이 되어준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불교는 세상의 한 줄기 빛입니다. 저는 봉사라는 수행을 통해 두렵고, 경계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진리에 다가서고 싶습니다.”

이런 김 대표에게도 최근 고민이 하나 늘었다. 본래 10년만 운영하기로 했던 ‘작은손길’이 어느 새 만 10년을 코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제 화두가 ‘작은손길’을 언제까지 운영하는 가 입니다. 처음 가족들과 딱 10년만 하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새 세월이 이만큼 흘러 어르신들이 제 ‘형님’벌이 됐죠. 앞으로 언제까지 운영할 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작은손길’은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작은손길’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저만의 수행방식이었죠. 이건 정신적인 문제에요. 이 자체가 정의니까요. 만약 누군가 ‘작은손길’ 같은 단체를 운영하겠다면 그 분만의 방식으로 접근해야죠.”

〈화엄경〉 ‘보현보살행원품’에는 “깨달음은 중생에게 속해 있는 것이니, 만약 중생이 없다면 모든 보살들이 끝끝내 위 없는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뭇 생명의 고통과 자비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깨달음은 적어도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이 아니다.

김 대표는 중생들과 수행공동체를 실현하며 자신을 낮추고, 선(善)을 향해 노력을 기울였던 부처님의 삶처럼, 오늘도 불자로서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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