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신의 주인공만이 너를 도와줄 수 있다 [904호 9월 5일]

 

▲ 그림 최주현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한자리에 앉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또 대구 불자 여러분께서 이렇게 자진해서 자리를 마련한 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불자님들이 마련한 자리에 함께 하고 있지만 내가 잘한다고 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원하시지 않는다면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외국에 지원이 열 군데나 생겼는데 모두 여러분처럼 거기 신도님들이 자진해서 만든 것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한국의 돈을 가져가서 미국에 지원을 만들거나 이러진 않았습니다. 여기 한국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알면 얼마나 알며 또 설법을 한들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그러나 설법이라는 건 이론적으로,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오고 가지 않으면서도 오고 갈 수 있는 이심전심이라는 것이 있으며, 오고 가지 않으면서도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히 오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하셔야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49년이라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여러분에게 ‘너부터 알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부터 안다면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다, 서로 통신할 수 있고 서로 볼 수 있고, 서로 말할 수 있고 서로 마음을 알 수 있고 서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오신통이라는 것을 쉽게 풀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컴퓨터나 탐지기나 망원경이나 통신기나 팩시밀리나 그런 것을 가지고는 감당하기가 어려울 미래의 정신계의 모든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현실에서 굴리면서 사는 이 도리를 아셔야 부처님의 골수를 안다 할 것입니다. 골수를 알지 못하더라도 넓게 생각을 해서 이 시대를 한번 관찰해 보신다면 내 마음의 세계가 그렇게 오고 가는 자리가 없으면서도 오고 갈 수 있고, 넓고 좁고 길고 짧고가 없으면서도 여러분이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그 기반이 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모두가 여러분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기복으로만 믿어서 물질의 노예가 되느냐, 아니면 내면세계의 노예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서산 대사가 문지방 양쪽에 발을 딛고 “내가 나가겠느냐, 들어가겠느냐?” 하고 사명 대사한테 물었듯이, 여러분이 똥이 급할 때 ‘내가 이 똥을 누어야 옳은가, 안 누어야 옳은가?’ 하고 생각을 하면서 똥을 누십니까? 그와 같이 여러분은 여여하게 놓고 가시면서도 그렇게 놓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생활 불교이자 과학입니다. 미래도 여기 있고 과거도 여기 있고 현재도 여기 있는데 그 현재마저도 공해서 우리는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해서 조금 아까 말한 것도 벌써 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착과 아집과 욕심을 떠나지 못해서 전생에서부터 배낭에 짊어지고 나온 고(苦)덩어리를 놓지 못한다면 앞으로 사대가 흩어져서 무너지더라도 그 고의 배낭은 다시 짊어지고 또 와야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갖은 고통을 다 받으면서 괴롭게 살고 계시는 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작으나 크나 고통은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몸뚱이 속에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살면서 인과로써 지은 악업 선업의 고덩어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컴퓨터에 입력이 된 숙명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력이 돼서 거기 모여 있던 의식들이 자꾸만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입력이 됐다가 나오는 것을 거기다가 다시 맡겨 놓는다면 바로 현실에 입력을 되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앞서 입력된 것은 다 무너져서 없어지고 현실에 입력하는 것만이 되돌아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무에서 유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헤아릴 수 없는 그 의식들은 어떤 것이 올바른 판단이고, 어떻게 해야 좋고, 어떻게 해서 이렇게 움직이는지를 모릅니다. 인간의 마음만이 나쁘고 좋은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잘 쓰라는 거죠. 여러분이 한생각 하는 대로 몸뚱이 속의 그 의식들은 다 따라 줍니다. 강도질을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면 강도질을 하게끔 충동질해서 강도질을 하게 만들고, 선의 길을 닦고 좋은 일을 하겠다 하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의식들은 그대로 따라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과 선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러분 마음에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악의 인연을 맺는 것도 그 자리, 선의 인연을 맺는 것도 그 자리인 것입니다. 넓게 좀 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자리에서 생각해 본다면 마음은 체가 없어서 지구 바깥으로도 나갈 수 있으며 여기 앉아서 여러분네 가정에도 갔다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광대무변하니 여러분 그 마음 마음이 얼마나 중요하고 보배로운 마음이겠습니까?

그러니 마음 마음을 잘 쓰시라 이겁니다. 가정에서도, 즉 밥을 먹을 때도 애들한테 “얘들아! 엄마 마음, 아빠 마음, 이 세상의 일체 선지식들의 마음, 일체가 다 한마음이란다. 그러니까 한마음에 감사하면서 먹어라. 그래야 엄마한테도 아빠한테도 고마운 줄 알지 않겠느냐.” 하고 감사하게 먹게 할 때에 그것이 가르침이요. “그 한마음 속에서, 네가 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 세상도 벌어지고 상대성도 생기고 엄마도 있고 모두 벌어진 거니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물리가 안 터지더라도, 공부가 안되더라도 거기다가 맡기고, 그렇게 해서 물리가 터지도록 하고 그래라. 이 세상에서 너를 누가 도와주겠느냐? 네 자신의 주인공만이 너를 도와줄 수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해 줄 때에 자녀들의 뿌리는 썩지 않고 아주 싱싱하게 됨으로써 바로 나무와 가지와 이파리가 푸르고 성성할 것입니다.

가정을 떠나서 부처님 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부부지간이나 형제지간이나 또는 부모 며느리 사이 딸 사이에 서로 마음이 어긋나지 않게 하는 태도와 부드러운 행과 부드러운 말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화목하게 만들 수 있고 돈도 저절로 따라 들어오게 만들 수 있고 가난도 없앨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들이 부잔데 어찌 가난하겠습니까? 마음이 가난하면 바로 가정도 가난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녀들이 나가서 안 들어온다, 어떠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한마음에 맡겨 해결할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전력은 네 전력이나 내 전력이나 똑같습니다. 전구는 저렇게 따로따로 있지만 전력은 다 똑같다는 거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살림살이하기도 바쁘고 죽겠는데 아들 따로 딸 따로, 부모 따로 남편 따로 기도드려 주고 이런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전구는 각각 있지만 전력이야 어찌 각각 있으랴. 내 한마음의 스위치가 올라가면 우리 식구가 다 밝게 불이 들어올 수 있다.’ 하고 진실하게 믿으면서 여러분은 내 자신의 주인공에 ‘한마음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고 물리가 터지게 해 줄 수가 있고, 좋은 데로 가게 할 수도 있고 또 오래 살게 할 수도 있고, 또 어떠한 재난이 있다 해도 모든 것은 거기서 해결할 수 있다.’ 하고 모든 것을 맡겨 놓되 해결이 되면 감사하게 거기 놓고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이지 누가 행복을 갖다 줘서가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러고도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여러분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아주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합니다. 요즈음 가만히 볼 때 인구는 늘어 가고 병은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보면 참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길을 걷다 봐도 그렇고 텔레비전 봐도 그렇고, 무슨 쓰레기든지 그냥 아무 데나 버려서 썩어 문드러지면 거기서 안개 같은 세균이 눈에 보이지 않게 나옵니다. 그것이 어디로 가는 줄 아십니까? 인과가 뭡니까? 인연이 뭡니까? 여러분이 버린 거라면 여러분의 마음이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컴퓨터에 입력이 되는 겁니다. 도청기가 거기에 부합이 돼 있거든요. 남은 몰라도 여러분의 양심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인과응보요, 업보가 되는 것이요, 그것을 면치 못한다고,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썩으면 나무뿌리가 썩고 우리는 썩은 물을 먹게 되고, 그 세균은 버린 사람의 인연을 따라서 쫓아옵니다.

바로 여러분 마음 한생각에 물리가 터지고
모든 것을 항복을 받아서
모두 내줘도 줄지 않고 들여놔도 두드러지지 않는
이런 세계를 파악한다면
삼천대천세계가 한 주먹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유스럽게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느 누가 쓰레기를 버려서 썩어서 세균이 생겼다면 입력이 되고 도청기가 있으니까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다가 들어오는 겁니다. 중심을 두지 않은 껍데기 빈집이, 들어가니 압니까, 나가니 압니까? 털구멍을 통하고 눈구멍을 통하고 귓구멍을 통하고 콧구멍을 통해서 그 세균성은 그냥 자기한테 부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들면 한 가족이 모두 그 병든 사람을 보며 같이 괴로워하고 고통을 받게 되는데 그런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저이는 스님인데도 왜 부처님에 관한 얘기는 안 하고 뭐가 잘났다고 저렇게 생활에 대해서만 저러나?’ 이러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이 여기서 한생각이라도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이 아니다’라고 생각을 하신다면 정말 여러분은 꼭 겪어 볼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아파 보고, 자기가 괴로워해 보고, 자기가 경험을 안 해 본다면 그 아픔을 몰라서 남의 말 듣듯, 남의 말 하듯, 남의 행 하듯 이렇게 그냥 무심하게 넘어가지마는 전 안 그렇습니다. 저는 어떤 때는 “저 사람은 병을 잘 고친대.” 이런 흉을 듣습니다. 여러분이 들어 본 중에 내가 병 고쳐 준다고 한 일이 있습디까, 없습디까?

여러분의 몸뚱이가 지수화풍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라는 재료가 여러분 속에 충만히 있으니 여러분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여기저기 가서 빌지 말고 내 내면세계 그 깊은 마음속의 해결력을 믿어 보세요. 아픈 것도 내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 거기다가 맡겨 놓고 산다면 자기 내면이 그대로 의사가 됩니다. 지금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찰나에 관세음보살이 됐다가 칠성이 됐다가, 지장이 됐다가 지신이 됐다가 용신이 됐다가, 이렇게 한생각에 마음이 찰나찰나 화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바로 네 마음 한생각에 물리가 터지고 모든 것을 항복을 받아서, 모두 내줘도 줄지 않고 들여놔도 두드러지지 않는 이런 세계를 파악한다면 삼천대천세계가 한 주먹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자유자재권을 가지고 자유스럽게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다는 거지요. 여러분이 이런 공부를 해서 내 몸속의 중생들을 제도해서 천백억화신으로 만드시고 여러분 가정을 이끌어 나가시면서 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나라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얻는 데 목적을 두십시오. 우주와도 직결이 돼 있고 세상과도 가설이 돼 있으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서 그것은 즉시 무에서 유로 나올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마음속에 재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99%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그 마음입니다. 돈이 드니 마음을 그렇게 못 씁니까, 피곤하니 마음을 그렇게 못 씁니까? 여기 가나 저기 가나 참선이요, 여기 가나 저기 가나 바로 자기 자리요, 여기 가나 저기 가나 바로 그것이 좌선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이 편안하면 좌선이요 마음이 복잡하면 망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고무줄 같은 인생에 뜬구름 같은 이 모습이 다 흩어지고 나면 뭐 남는 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정신력, 나의 마음의 차원을 그대로 가지고 또 태어납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물질로 치달아서 노예가 된다면 여러분이 죽어도 그 의식 영혼들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말하자면 몸에 있는 중생을 제도 못했기 때문에 자기 인과로써 뭉친 선악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바로 눈앞에 보이니 한 발짝도 떼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고다음에 이차적으로는 여러분이 물질적으로 그렇게 착이 줄줄이 붙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물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내 몸이 그대로 있는 줄 알고, 영혼들이 물을 건너가야 하는데 물에 빠져 죽을까 봐 배 오기를 기다리고 죽 섰으니, 오백 생을 기다린들 배가 오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죽으나 사나, 스님이든 스님이 아니든, 기독교든 가톨릭교든 불교든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한 항아리 속에서 지금 구르고 있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빠져 죽을까 봐 건너가지 못하니까 불교에서는 ‘저 언덕을 넘어서 저 물을 건너가세. 같이같이 건너가세.’ 하는 뜻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하는 것이고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한 것도 역시 그런 뜻이다 이겁니다. 자기의 좋고 나쁘고 한 그 마음, 자기로부터 수북하게 나오는 그 악마 같은 마음, 요만한 것 가지고도 괜히 신경질 내는 마음, 남의 탓을 하는 마음, 남을 원망하는 마음, 이것들이 그냥 배어서 항상 그렇게 하다 보면 여러분은 아마 생전 가도, 오백 생이 가도, 천년만년이 가도 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을 벗어나서 부처님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있기 이전에 여러분이 있고 여러분의 생활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 생명이 내 생명이요,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요, 부처님 몸이 내 몸이니 둘이 아닌 까닭에 아무렇게나 아무 데나 놓고 절하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세상과 나와 둘이 아닌 까닭에 일정례를 올리더라도 마음을 둥글려서 내가 정성스럽게 할 수 있다면, 어디다가 절을 해도 바로 자기 주인공에 자기가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고깃덩어리에다가 절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똑바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공부를 해서 내 가정과 사회 국가 세계를 잘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세계를 잘되게 하려면 우주를 알아야 되고 우리나라를 조절하려면 세계를 조절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 ‘해라’ 이래서 하는 것도 아니요, ‘말아라’ 해서 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 바로 자유인인 것입니다. 무슨 누구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보이는 데서 남한테 보시를 한다면 그것은 보시가 아니라 여러분이 욕심에 처해 있는 거고 상인이 물건 팔아서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무주상 보시를 하되 함이 없이 하라.’ 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있기 이전에 우리들의 마음이 그래야 되겠지요.
그러니 우리의 목적은 어떤 것인가? 지금 과학도 물질 만능으로 가고 있지만 우린 정신계와 물질계의 교차로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정신계를 무시한다면 아마도 살기가 급급해지리라고 믿습니다. 적었던 인구가 이렇게 많아진 걸 보십시오. 또 화산이 일어나도 과학자들이 그것을 재료로 삼아 연구함으로써 많은 이득이 있었듯이,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를 해서 활력소를 넣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능력과 오고 감이 없는 오신통 자체가 바로 재료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시라 이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보는 천안통,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팩시밀리, 바로 신족통. 전체의 소리를 듣는 무전통신기, 바로 천이통. 또 여러분을 보기만 해도 어디서 왔는지 과거를 전부 아는 숙명통 컴퓨터가 있는 거죠. 그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자꾸자꾸 현실에 나오는 것을 운명 팔자라고 이름을 붙여 놓고 여러분은 창살 없는 감옥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자기를 구덩이에 빠뜨릴 수도 있고 구덩이에서 나오게 할 수도 있는 보배입니다.

그러니 그 오신통에서 벗어나야만이 됩니다. 지금 시쳇말로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 봐도 도가 아니니라. 이 세상을 모두 다 들어도 도가 아니니라. 또 과거를 잘 안다고 해도 도가 아니니라. 남의 속을 빤히 잘 안다고 해도 도가 아니니라. 가고 옴이 없이 대천세계를 다 가고 온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그 다섯 가지 오신통에서 벗어나서 오신통의 바퀴를 굴려야만이, 법바퀴를 굴려야만이 바로 누진, 즉 레이더망으로 벗어나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거죠. 레이더망이 바로 들어오는 거, 나가는 거, 통신하는 거 이 세 가지 소임을 맡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두뇌도 안으로도 통신, 바깥으로도 통신, 그리고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도 바로 거기서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두뇌만이 아니라 지구의 모든 문제들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섭류가 어디에 있을까요. 먼 데서 찾으려고 애를 쓰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모든 물리가 터진다면 아마 망원경으로도 탐험을 못하는 것을 여러분의 천안으로, 바로 마음의 눈으로 세계를 다 볼 수 있으며 세상을 다 볼 수 있으며, 조절할 수 있으며 들을 수 있으며 가고 올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아나가는 것만이, 그저 취직해서 일 다니고 집안에서 살림하고 애 낳고 기르고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걸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착실하고 부지런하게 살되 그렇게 움죽거리면서 활력 있게 사는 놈이 누구냐는 얘깁니다. 그렇게 하라고 그러는 놈이 누구냐? 마음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여러분의 몸을 끌고 다닙니다. ‘가자’ 그래야 가고 ‘오자’ 그래야 오고 ‘이렇게 하자’ 그래야 하지, 하기 싫은 놈의 걸 억지로 안 합니다. 여러분, 여기 오실 때 오고 싶어서 왔지 오기 싫으면 안 왔을 겁니다.

그런데 이 절만 절이 아니라, 강당만 강당이 아니라 여러분의 안방도 바로 여래의 집이며 여러분의 몸도 여래의 집인 것이며, 어느 한 군데 여래의 집 아닌 자리가 없고 여러분의 한마음 아닌 자리가 없습니다. 사장이 있으면 직원이 있듯이 말입니다. 직원이 없으면 사장이 없고 사장이 없으면 직원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상대성의 원리로서, 삼위일체로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하늘과 땅도 역시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1년 8월 25일 국내지원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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