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영천 운부암

참배를 마친 순례단이 운부암을 나서고 있다. 순례단은 생사가 둘이 아니며 진속이 둘이 아니란 불이문을 나서며 성철 스님과 운부암을 가슴에 새겼다.
1939년 운부암 하안거 지내며 오도

팔공산 넘어 동화사서 오도송 읊어

경허·만공 등 선지식 선기 어린 곳

평생도반 향곡 스님 만나 절차탁마

8월 25일 ‘성철 스님 수행도량 순례단’ 300여 명은 여섯 번째 순례로 영천 은해사 운부암을 찾았다. 운부암은 팔공산 자락이 마치 구름처럼 감싸고 있는 암자다. 이 선기 넘치는 작은 암자에서 29살의 성철 스님은 오도했다.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성철 큰스님 수행도량 순례단’을 맞이한 영천의 하늘은 맑았다. 전날까지 폭우가 내린 팔공산 계곡에는 부처님의 법음 소리를 담은 옥수가 쏟아졌다. 구름 한 점 없이 개인 하늘에서는 뜨거운 햇살이 쏟아졌지만 스님의 원력을 되짚는 순례단의 열기는 그보다 더 뜨거웠다.

긴 시간을 달려 온 300여 명의 순례단이 은해사 대웅전 앞에 모였다. 은해사는 신라41대 헌덕왕이 즉위한 해인 809년 혜철 국사가 창건해 1200년간 경상북도 지역의 중심도량 역할을 해왔다. 은해사는 지금의 운부암에서 가까운 해안평에 세워진 해안사에서 시작됐다.

1545년 조선 인종 원년 큰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고 지금의 자리로 옮겨 절 이름을 은해사로 고친 것이다.이번 순례에서는 은해사 주지 돈관 스님이 직접 나와 순례단을 맞았다. 돈관 스님은 법회에서 성철 스님과의 인연들을 바탕으로 법문했다.

해인사 지조암 출신인 돈관 스님은 “고향 친정 식구들을 만나는 느낌”이라며 어렸을 적 성철 스님과의 선방에서의 일화를 들려줬다.

“해인사에서 첫 안거에 들었는데 졸다가 성철 스님에게 허리를 채여서 일주일 동안 침 맞으러 다닌 기억이 납니다. 스님은 책을 못 읽게 하셨습니다. 영어 공부하려고 공양간에 숨어 책을 보는데 스님이 와락 오셔서 책을 던지셔서 찢어진 책을 밥풀로 붙여가며 공부한 기억이 나네요.”

돈관 스님은 참가 대중에게 운부암이 성철 스님 뿐만 아니라 여러 수좌들이 수행정진한 곳이라고 전하며 그 기운을 받을 것을 축원했다.

이어 증명법사로 나선 원택 스님은 은해사 운부암에 머물렀던 향곡 스님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성철 스님은 평생도반인 향곡 스님을 운부암에서 만났다.

“성철 스님은 항상 운부암 뒷산에서 향곡 스님과 잣따기 내기를 해 향곡 스님 옷을 홀딱 벗긴 일화를 자주 이야기 했었습니다.”

깨달음의 반은 도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도반이자 스승이었다. 두 스님은 서로 절차탁마의 길을 돕는다. 향곡 스님은 봉암사 결사에서 성철 스님과 법거량을 하며 활연대오하고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의 조실로서 후학을 길렀다.

스님은 “성철 스님이 운부암에서 오도했다는 한 마을 노인의 증언이 있었는데 행장으로 남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가 깨끗하고 빛나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천추만고에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과거 성인들에 너무 집착하여 이를 버리지 못하면 본마음에 더 큰 병폐가 생기니 이를 버려야 참다운 지혜와 영원한 자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직 우리 본마음을 보기 위해 부처, 예수를 털어버립시다.”

대중들은 스님이 평소 말씀한 법문을 다시금 합송하며 은해사에서의 법회를 마무리 했다.

팔공산 자락이 연꽃잎처럼 감싸안은 운부암 전경
법회 이후 순례단은 은해사 계곡 사이 길을 통해 운부암으로 향했다. 711년 신라 의상 대사가 창건한 운부암은 예로부터 ‘북마하 남운부’라는 말이 전해지는 곳. 당대 고승인 경허, 만공, 동산, 운봉, 청담 스님이 수도한 곳으로 많은 선지식들이 수행처로 삼았다. 지금도 도량 곳곳에는 선기가 넘쳐 흐르는 것 같았다.

여기서 청년의 성철 스님은 한 철 수행으로 오도의 경지에 도달했다. 성철 스님은 팔공산을 넘어 동화사에서 오도송을 읊고 금강산 마하연사로 떠났다.

운부암을 찾은 순례단은 긴 돌계단을 올라 나무결이 그대로 보이는 보화루에서 다시 모였다. ‘보화(寶華)’는 뛰어나게 존귀한 꽃으로서 부처가 앉아 있는 연화대좌를 의미한다. 순례단은 보화루에 둘러 앉아 선원장 불산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참가 대중들이 선원장 불산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다.
진제 스님으로부터 법호를 받은 불산 스님은 전국수좌회 회장이다. 순례단의 말소리가 잦아들자 선원장 불산 스님은 조용히 성철 스님이 오도한 내용을 시작으로 법문을 시작했다.

“성철 스님은 선원에 오셔서 딱 네 마디를 하셨습니다. ‘자우지 마라, 말하지 마래잉, 어록도 보지 마래이!’ 마지막에는 신문도 보지 말라고 강조 하셨습니다. 선원 수좌들이 졸릴 시간에만 오셔서 그러셨습니다. 한바퀴 도시면 그 호랑이 같던 기운에 모두가 용맹정진했습니다. 참으로 그립습니다. 다시 못보니 아쉽습니다.”

지금의 행장에는 성철 스님이 1940년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오도송을 읊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러 증언과 친필이력을 보면 성철 스님이 오도한 곳은 운부암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불산 스님은 “이미 괴각으로 소문 나 금당선원 방부가 거절된 스님은 운부암으로 돌아와 안거를 나고 해재날 동화사 금당선원을 다시 찾아 해재 이후 남아있는 대중 앞에서 이를 읊으셨다”고 말했다.

운부암에서의 한 철 정진으로 깨달음을 얻은 성철 스님은 수행처로 유명한 금강산 마하연으로 떠난다. 하지만 오도한 그 자리가 못내 마음에 남았다. 성철 스님은 편지를 통해 향곡 스님을 다시 불러 그 자리를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

순례단은 이어 성철 스님이 정진한 선방을 보고 툇마루에서 차담을 나눴다. 안거 중이던 스님들도 일부 나와 대중들의 질문에 친절히 답했다. 무문관과 같은 작은 방에는 스님의 기상이 그대로 남아있는듯 했다.

성철 스님이 수행한 운부암 선방(오른쪽 끝방)
성철 스님의 선방을 둘러 본 정숙자 씨는 “성철 스님이 오도하신 곳을 보니 가슴이 벅차 오른다”며 “스님께서 정진한 그 모습, 말씀을 항상 기억해 마음공부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담고 순례단은 운부암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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