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에 끄달리지 마시고 항상 내 중심에 의해서 사세요 [903호 8월 29일]

 

▲ 그림 최주현

초발심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문) 인터넷을 통해 큰스님 법문을 보다보니 발심하는 마음이 생겨서 얼마 전부터는 절에도 다니면서 마음공부를 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초발심자에게 명심해야 될 것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데 공부라고 할 건 없지만 초발심에서 예를 들어 얘기하자면, 첫째에 믿음과 진실과 물러서지 않음과 또 근실함과 자기 분수력, 언제나 분수를 상실하면 욕심이 되니까요. 그러한 것을 지키면서, 진실도 그저 진실이란다고 뺏다 끼었다 할 그러한 아량, 지혜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하더라도 남을 이익하게 할 수 있는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참입니다. 그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저 거짓말하지 말란다고 그저 나쁜 소리든 좋은 소리든 갖다가 들입다 해 놓곤 싸움을 붙이거나 그런다면 이거는 진실이라도 진실이 아닙니다, 이거는. 이게 융통성이 있어야지 이거는 곧이곧대로 하다가는 뭐 회사엔 다 다녔고, 또 여자도 살림을 그 화목하게 살려면 어렵고, 이런 문제가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을 이렇게 해 나가는 데에 첫째에, 즉 말하자면 돌장승이 돼라. 내 모든 걸 한데 모아서 그 한 점의 마음에서 들이고 내고 하는 그 자체가 움죽거림이 없으니 돌장승과 같다 이 소립니다. 이거 돌장승과 같아야 한다, 사람이. 그러면 그것은 뭐냐 하면 들이고 내는 걸 한데 모아 놓으니까 임신이 되는 것과 같다 이럽니다. 그러면 임신을 만들려면 다 놔야 임신이 되는 거죠, 한데 뭉쳐서 놔야. 들이고 내는 걸 한군데다가 둬야 차차 차차 임신이 된다. 이건, 즉 말하자면 방편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이해를 잘하세요. 또 어린애란다고 정말 어린애 낳는 걸로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래서 임신이 되면, 임신이 되기 이전에 초발심에서 한데 모아서 임신이 되게끔 하는 문제. 또 임신이 되면은 임신이 되는 대로 잘, 배 속에 있는 거를 잘 성장을 시키는 데의 문제. 고담에 어린앨 낳게 되면 잘 안으로 굴려서 키우는 데 문제. 잘 키우는 것은 자기 안으로 굴리면서 항상 지혜롭게 내고 들이면서 체험하고 자꾸 이렇게 안으로 굴리는 게 자기를 자기가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서로 초발심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그 배우는 사람들대로 한 번씩들 얘기들도, 증언도 해 보실 만합니다. 또 애를 뱄으면 뱄다 증언을 하고, 살아나가는 데 이렇게 애를 배 가지고 “이렇게 나가는데 어떻게 해야만 건강합니까?” 하고 왜 병원에 가서도 이렇게 묻지 않습니까.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그렇게 서로가 질문을 하고 서로 증언을 하는데 한 사람이 그렇게 하면은 여러 사람들이 다 배울 수 있고, 또 자기가 잘못 생각했던 거를 똑바로 잘 생각해서 나갈 수 있게끔도 됩니다. 또 애를 낳아 가지고 또 이렇게 이렇게 한다는 증언을 하게 되면은 서로가 이게 보살행이요, 그것은 그것대로 한 사람이 그 공부하는 과정을 얘기하는데 백 사람이 그 과정을 따라가게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점검도 할 겸 우리가 서로 함이 없이, 즉 말하자면 애기를 낳은 사람은 함이 없이 할 것이요, 또 그 낳아서 기르는 사람은 함이 없이 그 말을 증언을 할 것이요, 애를 밴 사람은 밴 대로 함이 없이 증언을 할 것이요. 또 애를 배기 이전에 모든 것을 놓는 과정, 즉 종문서를 태워 버리는 과정을 겪는 데는 또 함이 없이 그 모든 거를 맡겨 놓고서 그냥 증언을 한다면 우리가 배우는 데 참 그 남들도 좋고 서로 좋을 것 같아요. 잠자코 듣고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러면은 여러분이 다 이렇게 같이 같이 공부들 할 수 있잖습니까. 또 생활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시는 게 좋아요. 그래서 남이 묻지 않는 거를 억지로 발사하지 말고, 정말 애를 배서 난 사람들은 바깥으로 발사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안으로 굴리면서도 남이 질문할 때는 그 사람에 알맞게 대답해 주고, 이렇게 하면서 모두 증언들을 하신다면 배우는 사람도 또는 배운 사람도 서로 지혜를 넓히며 또 배워 가면서 이렇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회초년생입니다

문) 저는 직장 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회 초년생입니다. 절에서 학생회 청년회 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막상 사회에서의 생활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선배님들도 업무 과중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인간관계로 인하여 많이 힘들어하는 걸 보면 제 앞길도 벌써 걱정이 됩니다. 스님, 제가 힘을 낼 수 있도록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믿음과 패기가 없고 용맹정진이 없다면 항상 방황하게 됩니다. 한 걸음을 떼도 무겁고 좀더 인내성 있게 떼어 놔야 할 거고, 생각을 해도 좀 무겁게 하면서 그 종종걸음을 걷지 않도록, 한 걸음을 떼어 놔도 백 걸음 못지않게 뛸 수 있는 그런 믿음과 패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체 이 한 몸을 우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각자 각자 이 몸뚱이 하나에 생명들이 수억 마리가 있는데, 그렇게 많은 양을 한데 포섭해서 그 인연에 따라서 여러 그 마음들이 종합해서 한데 모인 한 생명입니다. 이것을 그냥 넘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내가 하지 않으면 내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한 것만치, 죄도 선도. 그러니까 이걸 그냥 넘기지 마시고 좀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고 한번 해 보겠다는 패기가 물러서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데에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들고 어떤 때는 저런 생각이 들고, 수만 가지의 생각이 돌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일으키고 가라앉히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선장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의 구성된 선장, 즉 마음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즉 말하자면 원자력발전소가 자기 한 몸뚱이에 구성돼 있다면, 바로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데도 그게 맞뚫렸습니다. 바깥으로 열고 나가는 것도 그 문을 붙잡아야 하고 안으로 들어오려도 그걸 붙잡아야 합니다, 문을 열려면. 본래는 문이 없는데도 문이 있다는 겁니다. 문이 있는데도 문이 없다는 것은 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체가 없으면서도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성원리기 때문에 안의 버튼을 누르는 것도 바로 그 버튼이고 바깥에서 안으로 들이려도 바로 그 버튼을 눌러야 됩니다. 그런데 그 버튼 하나에, 안팎이 붙어 있는, 뚫린 그 버튼 하나에 줄이 만 개가 있다면 만 개가 죄 각각이라는 얘깁니다, 무전통신 줄이. 즉 법망에 그 무전통신 줄이 다 붙어 있어요. 그러면 그 붙어 있는 줄에 이건 우주의 버튼을 누르는 우주 줄이고 이거는 삼천대천세계의 줄이고 이것은 또 소천세계 중천세계 등등.

또는 우리 몸을 종합병원이라고 그런다면 거기는 다양하게 이비인후과도 있고 또 여러 가지 내과 외과 뭐, 전부 있습니다, 안과니 뭐니. 그런데 소소영영한 게 우리가 목이 아프면 벌써 나한테 신호가 온 겁니다. 그래서 이비인후과로 갑니다. 눈이 아프면 안과로 갑니다. 그런데 대의적으로 쓸 때는 이게 종합병원이라는 겁니다. 이 나라에서 볼 때는 이게 ‘종합병원’ 이러지 어떠한 이비인후과니 뭐 어쩌고저쩌고 이름 부르지 않습니다. ‘종합병원’ 이러죠. 그러니까 우리 몸뚱이 하나가 종합병원이라면 천체 종합병원의 근거지입니다.

내가 이 말 저 말 안 하고 넘어가면 고 뜻을 모르실까 봐 이러한 말을 합니다마는 임신을 해서 어린앨 뱄어도 그 탯줄을 잡지 못하면 그 전체 부위에서 나오는 그 액체의 자기 젖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탯줄을 언제나 자동적으로 잡고 있는 겁니다. 탯줄을 놓친다면 그 어린앤 떨어집니다. 살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그 탯줄을 잡지 않는다면 고아가 됩니다, 고아. 어디서라도 도와서 한마음 한뜻으로 돌아가야 될 텐데 돌아갈 수가 없고 자꾸 걸려요.

그와 마찬가지로 그 버튼은 안팎에 맞뚫린 하난데 수없이 우주 줄이 있고, 즉 말하자면은 세계 줄이 있고 또 국가 줄이 있고 또 사회 줄이 있고 또는 우리 가정 줄이 있고 내 몸의 줄이 있고 몸의 세포의 모든 기능의 줄이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하나, 이렇게 나한테 닥치는 대로, 예를 들어서 내가 몸으로부터 만약에 얘기를 하자면 아, 사무실에 나가서 상대를 만나서 일을 해야 할 텐데 참 까다롭다 할 때 바로, 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벌써 거기에, 내 이 바깥의 버튼에 벌써 신호가 온 겁니다, 안에서. 그러면 안으로 다시 버튼을 누릅니다. ‘이거는 여기에서 해 줄 수밖에 없다, 무전통신으로써.’ 하고. 그럼으로써 이걸 안으로 누른다면 바로 안에서 직접 그쪽 안으로 들어갑니다. 안으로 들어간 뒤에 바로 바깥 버튼을 또 누릅니다. 그럼 만나는 거죠.

그래서 안의 버튼을 반드시 누름으로써 내가 전화통에다가 먼저 전화를 하고, 알려 놓고 바깥으로 가서 만나는 것처럼, 이렇게 해서 만나게 되면 아주 유유히 돌아갑니다. 그러면 바깥에서도 나를 그렇게 그 상대방으로서 깔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아주 유유하게 조화가 이루어지고 안으로서 그렇게 마음이 따뜻하게 되자 서로가 서로를 양보할 수도 있고 서로 도와줄 수도 있게 되지만, 만약에 이 안으로서 통과가 안되고, 마음으로 통과가 안되고 거죽으로 말을 해 봤자야 그건 백문선이 헛문선이에요. 걸리고만 넘어갑니다. 그러니 안팎을 다 응용하고 그 활용하려면 이 무의 50프로, 유의 50프로가 맞먹어 들어가야 된다 이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사람이 살다 보면 지혜로운 생각이 났다가도 아주 옹졸한 생각도 납니다. 그러나 옹졸한 건 옹졸한 것대로 쓰이고 큰 거는 큰 것대로 쓰일 때 자기를 언제나 더 잘 압니다. 자기 환경을 너무 잘 압니다. 자기의 마음 씀씀이도 더 잘 알고 지금 자기 앞에 처해 있는 그 자체의 환경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너무 큰 거를, 자기한테 오지 않을 것을 크게 생각을 해서 욕심내지 않아도 내가 지혜가 자꾸 넓어지면 넓어지는 대로 지능이 발달되고 활용을 하게 되자 이건 점점 점점 자기도 모르게 넓어집니다. 넓어져서 우주도 삼킬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생길 때 비로소 스스로서, 남이 벌써 나에게 큰 그릇이라고 담깁니다. 내가 담으려고 하기 이전에 벌써 담깁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여러분이 적다 크다 없이 닥치는 대로 안으로 굴려서 안으로 그 버튼을 누르고서 하고, 또 바깥으로 나갈 때는 이 안에서 버튼을 누르고 이렇게만 항상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이지, 즉 말하자면 상품자리 중품자리 저 하품자리가 한데 합쳐진 즉,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믿음과 패기가 없고
용맹정진이 없다면
항상 방황하게 됩니다.
한 걸음을 떼도 무겁고 좀더 인내성 있게 떼어놔야 하고
생각을 해도 좀 무겁게 하면서
종종걸음을 걷지 않도록,
한 걸음을 떼어놔도 백 걸음 못지않게 뛸 수 있는
그러한 믿음과 패기가 있어야 합니다.

 

 

사는 게 참 천차만별입니다

문)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걸 보면 참 천차만별입니다. 법 없이도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죄를 짓고 감옥살이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등등. 이러한 인생살이가 다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해서 인과응보를 받는 것이겠죠?

답) 우리가 용광로에다가 헌쇠들을 다 집어넣고 다시 생산을 해서 내는 것은 물질이지마는, 우리 마음으로는 체가 없기 때문에 무쇠도 될 수 있고 금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차원은 누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하지만 자기 자신은 자기 마음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잘못하고 잘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주간 법계에서도 전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몰라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한 걸음 한 걸음이 참답게 나갈 수도 있는가 하면 그냥 마구 아무렇게나 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내 주장심이 아주 무서운 살인자가 될 수 있는 칼이 될 수도 있는가 하면 그 무서운 칼이 아주 연하고 잘 드는 칼이 돼서 여러분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칼이 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중심으로서 중력을 잃지 말고, 남의 말을 들어서 거기에 끄달리지 말고, 항상 내 중심에 의해서 살아라 이겁니다. 내 중심, 그 한마음 한 점 속에 일체 만물만생이 다 거기에 있고 그 일생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돼 봐야 보살의 행을 할 수 있지 부처님이 되지 않고야 어떻게 보살행을 하며 법신의 행을 하며 모든, 즉 말하자면 자비의 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네가 한 것이 이렇게 업이 많으니까, 이렇게 따진다면 바로 보살행을 못합니다. 이것도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업보가 많으니까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그런 것에도 걸리지 말고, 그 법에도 걸리지 말고 아무것도, 아무것에도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알면 죄를 짓겠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느 누구가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놓는 대로 본래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본래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게 그게 업이라면 바로 부처가 어디서 났겠습니까.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쓰라림을 겪어 오면서, 또 잘못해 가면서, 잘못한 거를 회개를 해 가면서 살아가는 도중에 부처가 나는 것입니다.

하치못한 사람이 따로 있고 또 위대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린 동등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냥 갈 수 없다는 결론에서 억겁을 거쳐 오면서 쓰라린 아픔에 이어가는 그 피를 흘렸기에 우리는 더 피를 흘릴 수가 없고, 더 아픔을 당할 수도 없고 더 속박당할 수가 없고, 더 노예로 살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자유스럽게 자유인으로서 한 걸음 한 걸음 보람 있게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 마음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어디다 대고 불공을 올려야 되는지요

문) 저는 불공하는 방법이 궁금한데요, 저는 계속 부처님에다 대고 했는데 엊그저께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마음에다 대고 기도를 하니까 그렇게 간절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뭐, 관세음보살을 찾을 때는 관세음보살 또 지장보살을 찾을 때는 지장보살을 마음에다 대고 생각을 하면서 불공을 하고 있는데 이게 맞는 건지 어쩐 건지 그 점에 대해서 말씀 좀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그건 요렇게 표현합시다. 한 사람이 하루에 몇 사람을 만납니까? 자주 하는 얘깁니다만 아들을 만나고 어머닐 만나고 할 땐 다 생각이 달라지고 행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죠. 그렇게 달라져서 나투어 돌아갈 뿐이지 한 사람이 백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만나고 한 사람이 열 가지 일을 하고 그러는데 그 한 사람이 한 가지 어떠한 일을 할 때 즉, 집안일을 하더라도 치우고 닦고 밥하고 뭐 빨래하고 이럴 때, 빨래할 때 내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밥을 할 때 내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하도 여러 가지를 하면서 돌아가니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관세음을 불러도 결국은 자기가 불렀고 또 용왕님을 찾았어도 자기가 불렀고, 자기의 마음이 간절하게 찾았으니까 자기 찾은 고놈이 바로 자기를 부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처는 열 가지 백 가지의 이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일체제불의 마음은 내 한마음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유생 무생이 다, 부처 중생을 따로따로 두는 게 아니라 내가 있기 때문에 남한테 맞기도 하는 거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남한테 좋은 소리도 듣는 겁니다. 나 빼놓고는 없죠. 그러니까 모든 게 나로 인해서 일체 만법이 생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러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이니 뭐 저, 산신이니 신중당이니 뭐, 칠성이니 또 용왕이니 약사보살이니 이렇게 쭈욱 해 놓았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한마음에 모두 있는 거지, 이름이 각각 있다고 그래서 그 이름대로 각각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자깁니다. 우리가 눈 달린 데 코 있고 코 있는 데 입 있고 입 있는 데 귀 있고, 요렇게 이름만 다 각각 있었다 뿐이지 다 한군데 붙어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걸 각각 찾고 각각 생각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이 법당의 부처님께서도 이 형상은 여러분의 몸이요, 부처님의 마음은 여러분의 마음이요, 그러니 나도 바로 여러분의 마음이요, 내 육신은 여러분과 같은 육신이요,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높고 낮음도 없고 그러면서도 아주 높고 낮음이 없는 그 가운데 거기에서 그렇게 생생하게 여여하게 새록새록이 묘법이 나온다 이겁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되고 싶은데…

문) 우리 주변에는 병들어 괴로워하거나 경제적으로 쪼들리거나 가정 문제로 힘들어하는 등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마음공부를 한다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그런 많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답) 이 마음공부라는 것은 자기의 그 핵, 즉 말하자면 원자 속에서의 입자, 입자 속에서 분자로 화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럴 때는 그 많은 사람들이 돼 주는, 보이지 않는 데 오고 감이 없이 그렇게 오고 가면서 내가 돼 주는 그런 반면에, 스스로서 자기가 한생각을 내면 빛보다 더 빨리 응해 줄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러 나라에서 실질적으로 실험을 해 가면서, 실천을 해 가면서 이 마음공부를 하고 있고 자기의 인연된 사람들, 아는 사람들을 다 그렇게 고쳐 주기도 하고 자기가 이끌어 주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가난을 면하기도 하고 또 가환을 없애기도 하며 이렇게 해 나가고 있죠.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자기 실천에 옮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이 마음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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