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교의 기수 반영규 거사

1970년대 ‘자비의 소리’ 발간

4쪽 포교 전단지 폭발적 인기

아함경 읽고 부처님 가르침에 눈떠

찬불가 100여곡 작사…테이프 배포

 

도심속 음악회 ‘붓다콘서트’ 열어

100명 문화 후원인 조직이 꿈

 

“찬불가는 제 염불이고 서원입니다. 부처님의 법음을 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문화 포교죠. 하지만 찬불가를 제대로 아는 불자들은 많지가 않아요. 어쩌면 현재의 찬불가는 사찰 합창단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는지 모르죠. 이게 우리 불교문화의 현실입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찬불가를 통해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제 서원입니다”

작사가 반영규 선생(83)은 자신의 서원을 이렇게 말한다. 불법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문화 포교에 반평생을 바친 반 선생. 그는 지난 40년간 찬불가 100여 곡을 작사했고, 최초로 청년 불교 합창단을 결성하고, 청소년들을 위한 ‘붓다의 메아리’ 공연을 열고, 불교문서포교지 ‘자비의 소리’를 발행하며 그의 전법 서원을 실천해 왔다.

 

도심 속 ‘붓다콘서트’를 열다

그리고 팔순을 넘긴 지금에도 문화 포교에 대한 그의 서원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그는 좋은벗풍경소리(회장 덕신스님)와 함께 매달 전석 무료 붓다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7월부터 시작해 매달 열리는 붓다콘서트는 ▷다함께 노래를 ▷법문이 있는 이야기콘서트 ▷찬불가 작사 작곡자 초대 ▷작은 사찰 합창단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대중들에게 찬불가를 알리고 관객과의 소통을 꾀하고자 마련된 붓다콘서트는 매 회 350여 관객들이 참석하는 등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는 늘 도심에서 상설 불교 콘서트를 열고 싶어하던 반 선생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찬불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찬불가 음악회를 열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재정적인 면에서나 인력적인 면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변 도움도 받고 사비를 들여 과감하게 시작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관객들이 크게 호응을 해주니 참으로 기쁘고 고맙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현재의 붓다콘서트는 시작부터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어렵게 시작 했지만 공연비용을 줄이고 줄여도 최소 600여 만원 가량의 경비가 들어간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공연은 현재 적자를 면하지 못하는 상태다. 하지만 그는 지금 보이는 어려움보다는 더 큰 미래를 보고 이 콘서트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람료를 받을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 음악을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무료 콘서트를 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출연진에게도 무료 공연을 부탁하기보다는 적게나마 출연료를 주고자 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출연자와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며 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공연문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반 선생은 붓다콘서트를 불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공연으로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콘서트를 알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현재 그는 사비를 들여 붓다콘서트 로고가 새겨진 배지 1천 개와 오프너 1천 개를 제작해 배포하며 붓다콘서트 알리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열린음악회는 누구나 한번쯤 보고 싶어하는 공연이잖아요. 그런 공연처럼 우리 붓다 콘서트도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 불교인의 축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공연을 시발점으로 불교 음악을 살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콘서트를 보러 오고 대중들이 동참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야죠”

그는 불교음악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동참인 1백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의견을 밝힌다. “세상에는 많은 불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문화에 관심을 가진 불자들도 많겠죠. 100 만원 후원자 100명만 모아도 우리 불교문화를 알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불자들이 문화 포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문화 포교의 서원을 세우다

반영규 선생은 재가불자로 문화 포교에 뛰어든 지 40년여 년이 되었다. 어렸을 적 불전에 공양미 올리는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불교는 기복신앙이라고만 생각했다. 결혼 해서 아내 권유로 절에 나가기는 했지만 역시나 이때도 기복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접하게 된 〈아함경〉 등 불교 서적을 통해 부처님 법의 위대성에 눈뜨기 시작했다.

“당시 종로 일대 서점에서 불교 서적을 접하게 됐어요. 부처님 법이라는 게 이렇게 좋은 줄 그때야 알게 됐죠.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서적들이 일본어로 돼 있다는 거였어요. 우리 글로 된 포교문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렇게 시작된 것이 ‘자비의 소리’ 입니다”

당시 편집ㆍ출판 계통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그는 문서포교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는 한 불교 출판편집자에게 이 계획을 말했더니 그는 너무 순진한 발상이라며 만류했다.

1년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조계사에서 우연히 만난 혜일 스님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 좋은 생각이라며 꼭 해보라고 용기를 주셨다. 그렇게 1973년 1월 혜일 스님의 글 ‘버릇 세계’가 실린 ‘자비의 소리’ 첫 호가 탄생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4쪽짜리 포교 전단지 1만 5천 장은 전국 사찰과 군부대 교도소 등에 배포됐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각 사찰에서 전단지를 보내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이후 ‘자비의 소리’는 최대 5만 장까지 인쇄 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당시 일반인들을 위한 포교지가 없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매우 반응이 컸어요. 군부대와 교도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비의 소리’를 읽었죠. 배타고 해외로 나갔던 해군 한 명은 몇 달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종이가 닳을 때까지 보고 또 보고 했다더군요. 50대 전후의 불자라면 ‘자비의 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그즈음 반 선생은 찬불가를 통한 포교에도 박차를 가한다. 노래만큼 좋은 포교가 없다고 생각하던 그는 작사를 시작했고 작곡가 故 서창업 선생 등이 곡을 붙였다. 서울대 작곡과에서 공부한 신예 작곡가 서창업 선생은 이를 계기로 찬불가 작곡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의 창작곡은 다양하다. 청소년들의 주제곡이라 할 수 있는 ‘붓다의 메아리’를 비롯해 ‘뉘우치오니’ ‘산사의 봄’ ‘날마다 좋은 날’ ‘자비의 나라’ ‘무상계’ ‘사래밭 아리랑’등의 창작은 물론 교성곡 ‘사바의 바다’ ‘불 밭에 피는 꽃’ 오페라 ‘나무꾼과 선녀’ 등도 창작했다. 이후 많은 이들이 함께 참여를 하면서 그의 가사는 더욱 빛을 발했다. 박범훈 前 중앙대 총장과 김회경씨가 곡을 붙이기도 했고 김영임 등의 가수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지금까지 작사한 노래만도 100 여곡이 넘는다. 재가불자 작사가로서 찬불가 운동에 참여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반영규 선생으로 불교 음악사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주목 받는 인물 중 한 명이라 말할 수 있다.

“불교 음악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심이라고 생각을 해요. 가사와 곡을 쓰는 사람 모두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혼을 실어 부처님 가르침을 담아야 진정한 찬불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가 작사한 많은 노래 중에서도 아내와 연관된 노래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무상게’는 30여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며 지은 시에 박범훈씨가 곡을 붙인 작품이다.

‘곱디 고운 베옷 입고/꽃신 신고 가는 님아/이승의 짐 훌훌 벗고/고이 가소 정든 님아/사바 고해 괴롬일랑/한강물에 띄우고/지난날 맺힌 한/바람결에 흩날리고’

이 곡은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낸 남편의 마음이 절절하게 배인 작품으로 불교계 49재에서 단골 천도가로 애송되고 있다.

이후 찬불가는 자비의 소리에 악보와 함께 배포 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찬불가를 알리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활자와 악보만 보고 찬불가를 알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테이프를 만들어 보급하자는 결심을 하고 당시 찬불가에 관심을 가져주었던 몇몇 스님들의 도움으로 수개월에 걸쳐 테이프를 제작했다. 이렇게 찬불가 테이프는 자비의 소리와 함께 전국에 무료 배포됐다.

“당시 악보와 함께 찬불가 가사가 담긴 자비의 소리를 배포했죠. 그런데 어떻게 찬불가를 배우냐는 문의가 쇄도했어요. 그래서 동명여고 학생들과 함께 녹음실을 찾아가 찬불가를 녹음해 테이프를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찰에도 일반 가정에도 녹음기가 없었어요. 당시 국내에서는 녹음기 생산이 되지 않았고 일본에서 몰래 기계를 들여와야 할 정도로 녹음기가 귀한 시절이었죠. 그래서 절에서는 부잣집 신도의 카세트를 빌려 노래를 듣는 진풍경이 벌여졌죠”

 

세상의 희망이 되어

늘 청년들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생각하던 반 선생은 청년들을 위한 새로운 포교를 생각하게 된다. 바로 합창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재가자들이 조직한 삼보법회가 풍전호텔에 공간을 빌려 일요법회를 열고 있었어요. 법회가 끝나면 청년들을 모아서 서창업 지휘자와 함께 삼보 합창단을 지도했어요. 이후 조계사 도선사 등의 사찰 합창단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이는 불교계 합창단의 효시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가 뿌린 문화 포교의 씨앗은 나날이 번성해 갔다. 이후 사찰마다 많은 합창단이 생겨났고 찬불가 작곡가들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씩 합창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더니 사찰마다 합창단 창립이 유행하다시피 했죠. 자고 일어나면 사찰 합창단이 생긴다고 할 정도로 합창단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당시는 불교 쪽에 인력도 많았고 젊은층의 호응도 컸어요”

이후 반영규 선생은 동덕여고 김재영 선생과 함께 각 학교 불교 학생회를 주축으로 한 합동음악법회 ‘붓다의 메아리’도 창단하게 된다. 청소년이 희망의 씨앗이라고 생각했던 반 선생은 서울 지역 중고등학교 불교 학생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개념의 공연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대학로 흥사단 건물을 빌려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 불교 학생회와 함께 음악 공연과 연극 꽁트 등을 공연했죠. 탤런트 이순재, 권투선수 홍수환, 학사 가수 유승엽, 애국지사 김관호 씨 등을 초청해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도 있었죠. 회를 거듭할수록 관중들이 늘어나서 더 큰 장소로 무대를 옮겨야 할 만큼 반응이 좋았어요. 지금의 청춘콘서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공연은 승승장구 했죠”

이런 문화 포교의 원력은 그의 역 저서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반 선생은 〈자비의 소리〉 〈나무 석가모니불〉〈희곡집 아자타사투왕〉〈붓다-그 생애와 사상〉〈새로운 마음의 불교〉〈아함경으로 배우는 불교〉〈법화경 30일 공부〉 등을 펴냈다. 또한 재단법인 대원정사 출판부의 주간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당시 월 10여 권의 서적을 출판하면서 〈빛깔 있는 책〉 등 불교도서 출판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대원정사 출판부에서 일할 때는 정말 다양한 책들을 출간했죠. 당시는 추석과 설 명절만 빼놓고는 매일 출근해서 일을 했다고 할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포교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9년까지 군법사가 없는 군부대를 찾아가 15년 동안 법회를 열고 찬불가를 가르쳤다. 초파일 때는 군인들에게 수계식을 해주고 크리스마스에는 찬불가 경연대회를 열며 군포교에도 매진해 왔다. 삼선포교원신도 회장을 역임하면서 등산법회를 열어 절이 있는 산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론 수원 포교당 신도들과 불교 문화재 답사를 하는 등 최근까지도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본지와 함께 혜초 교성곡 공연 때 무대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던 그는 다양한 불교 공연 무대를 만들어온 장본인기도 하다. 지난해 그는 부처님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교성곡 가사를 완성했다. 이제 그의 서원은 이를 무대에 올려 전세계인이 감동 받을 수 있는 불교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예수님의 이야기지만 전세계인에게 사랑 받는 작품이죠. 불교는 훨씬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고 훨씬 더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왜 이런 이야기가 없는지 안타까웠습니다. 불교에서도 이런 공연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교성곡가사를 썼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연극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요. 요즘 흔히 말하는 원소스멀티유즈의 콘텐츠인 셈이죠. 이를 통해 많은 불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자 합니다”

반 선생은 현재 침체된 불교가 융성하기 위해서는 문화 포교가 더 활성화 되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품바도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공연을 해요. 불교 공연도 마찬가지에요. 관객이 있고 호응이 있어야 흥이 나 공연을 하지요. 지금 우리는 불교문화의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대부분의 스님들은 사찰 건물 불사에만 힘쓰지 문화 포교에는 관심이 없어요. 세계의 지성들은 불교에 눈을 뜨고 있는데 한국 불교는 계속 거꾸로 가고 있죠. 재가불자들이 힘을 합쳐 다시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문화가 다시 살아 나야 합니다”

반 선생은 이렇게 불교문화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재를 따끔하게 질책했다. 하지만 이런 반영규 선생의 모습에서 우리 불교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오늘도 우리 불교문화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고 있는 반영규 거사의 모습을 통해 우리 불교 문화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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