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청동 찻잔 소견

한국 차 불교 흥망성쇠와 연관

천년 전 찻잔서 차문화 읽어내

 

고려 청동 찻잔

차(茶)의 기원은 몇가지 이설(異說)이 있긴 하지만 기원전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중 한 분인 신농(神農)씨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불을 지피고, 농사를 시작한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왕이다. 어느 날 그가 나무 아래서 물을 끓여 마셨는데, 나뭇잎 서너 개가 주전자에 떨어져 우러난 물을 마셨는데 그 차맛에 감탄하여 계속 마셨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신농씨가 수백가지 풀을 먹다 독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고 어느 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다. 그 때 바람을 타고 푸른 잎사귀 하나가 신농의 입으로 떨어졌는데, 이 잎을 먹자 정신이 맑아지고 모든 독이 해독되었다. 그 잎이 바로 찻잎인 것이다.

또 다른 전설은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의한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참선을 하던 중에 졸음을 쫓기 위해 우연히 찻잎을 씹어 먹었는데, 바로 정신이 맑아지고 졸음이 없어져 큰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그가 졸음을 쫓기 위해 두 눈썹을 잘라서 던져 버렸는데, 그 곳에서 차나무가 생겨나서 차에 졸음을 쫓는 성분이 생겼다고 한다.

차의 학명(學名)을 뜻으로 풀어보면 ‘중국의 동백나무’라는 뜻인데, 동백과 과목(科目)에 속한다. 중국이 차의 기원지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차의 명칭에 있는데, 차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인 차(茶)와 영어이름인 티(tea)가 모두 중국에서 나온 것을 보면 그렇다.

복건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은 차의 집산지로 중국 전역에서 만들어진 차는 이곳으로 모여서 차시장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육로로 차를 수입한 나라들은 광동성 발음인 ‘차’를 사용하고, 해로로 차를 수입한 서유럽의 국가들은 복건성 발음인 ‘티’로 불렀다.

차에 관한 문헌 중에 동진(東晋)시대의 상거(常)가 쓴 화양국지(華陽國志)엔 중국 남방 파촉지역에 향기 좋은 차가 있어 주나라 무왕에게 공납하였다는 자료가 있는데, 이를 보면 이미 3천년 이전에 차의 재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본기 흥덕왕 3년(828년)에 중국차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고 적혀있다.

다성(茶聖)으로 알려진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 초의(草衣)는 한국의 다도의 대표 인물이다. 그가 다도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시대부터 심었던 차나무 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차는 불교가 융성했을 때는 발전하다가 조선시대에는 배불(排佛) 정책 때문에 시들해졌다.

우리의 차는 불교와 흥망성쇠를 같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찌 됐든 초의사상은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그의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승가서는 차보다는 커피를 더욱 즐겨한다. 중국의 보이차 등 가격이 폭등하고, 저질의 하품들이 고가로 진열되는 상황에서 도저히 경제적인 비용과 저급한 품질의 차를 마실 수 없었던 관계로 많은 스님들이 차를 포기하고 커피로 돌아섰다.

커피의 기원에도 많은 설화가 있지만 에티오피아의 고산서 살던 칼디라는 양치기가 염소들이 어떤 나무의 붉은 열매를 따먹고 흥겹게 뛰노는 것을 보고 따먹은 데에 유래한다고 하는데, 근처 이슬람 사원의 승려들이 잠을 쫓는 효능이 있는 것을 보고 많이 퍼졌다고 한다.

이 찻잔은 비록 거의 천년(千年)의 세월을 지나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특이하게도 커피잔의 모습과 똑같이 생겼다. 물론 고려시대 당시에는 찻잔으로 쓰여졌을 이 잔이 커피잔의 원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무척 신기한 일이다. 무엇을 마시며 수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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