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가 이철수

대중적이진 않지만 항상 깨닫고 생각하게 만드는 ‘선화’를 계속하라고 법정 스님은 이철수 화백을 볼때마다 조언했다.
사랑하는 이를 뒤로 하고 울고 넘었다는 천둥산 박달재 아랫마을 사는 판화가 이철수 화백(59)집 앞, 잠자리가 한가로이 노니는 가지런한 논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마중 나온 이 화백이 말을 건넨다.
“우렁 각시 도움으로 벼농사 지은 지 한 십 오년 가까이 되었어요. 그전에는 집사람하고 둘이 꼬박 논에 매달려도 일이 그치지 않았지요. 김매다가 집사람이 쓰러진 적도 있을 만큼. 그런데 요즘에는 논에 들어가는 일이 거의 없어요. 먹을거리를 모두 길러서 먹으려니까 밭농사도 이것저것 골고루 지어요.”
확실하게 앞가림을 하고 산다는 말씀이다. 담쟁이가 소복이 덮인 벽 사이로 능소화 넝쿨이 운치 있게 늘어진 대문에 들어서니 잘 다듬어진 잔디 위로 활짝 핀 백련이 손들을 반긴다.

“제가 아주 젊어서 법정 스님이 번역하신 ‘부처님 일대기’를 봤어요. 반듯한 우리말로 번역한 부처님 일생을 만나면서 ‘이렇게 친절한 분이 계신가?’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중에 보니까 〈무소유〉란 수필집도 내셨더군요. 이런 인연이 쌓일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어요. 그랬는데 뒷날 제가 스님 대표작 〈무소유〉 표지 그림도 그리게 되고. 이렇게 만나고 또 흘러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하게 되었어요. 씨앗을 많이 뿌리신 분이세요. 저는 어려운 걸 어렵게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어려운 걸 쉽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을 따르고 존경했어요. 스님도 그런 분이셔서 옆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같이 가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어요.”
인터뷰 약속을 해놓고 나서 이 화백은 법정 스님을 언제 어디서 뵈었는지를 떠올리려고 지난날을 곰곰이 되짚어봤지만, 아스라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스님과 첫 만남을 떠올리지 못했단다. “처음에 청학스님과 같이 뵈었을 거예요. 〈불일회보〉 연재를 할 즈음이었다고 기억을 해요. 저는 사람들과 이야기 줄거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스냅사진처럼 화면을 떠올려요. 대사들을 떠올려야하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그냥 오다가다 장삼이사(張三李四)로 뵌 게 아니어서 긴장하면서 뵈었을 텐데도 어디서 어떻게 뵈었는지 도무지 기억 나지 않아요. 이오덕 선생님은 우리부부 주례를 서주셨는데도 처음에 어디서 뵈었는지 모르겠어요. 젊은 사람이 어른하고 뵌 걸 떠올리지 못하니 참 딱한 일이지요.”
사람마다 기억소자가 다른데 어쩌랴. 판화는 어떻게 하게 되었을까? “젊어서는 그냥 책만 열심히 봤어요. 70년 대 말 군대 제대를 하면서 세상이야기를 하는 그림이 별로 없기에 ‘나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보고들은 것이 적은 탓도 있었지만 문학은 세상이야기를 많이 하던데 미술엔 별로 없었어요. 책에서 이따금 외국 사례와 만날 수 있을 뿐. 그림을 시작하면서 세상이야기하기에는 판화가 가장 좋겠다 싶었습니다. 진보 쪽에 서서 청년기를 넘기면서 보니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가운데 실망감을 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더군요. 자신을 돌아보는 힘이 진보에 반드시 필요한 힘인데 저나 제 둘레 사람들이나 그런 생각이 너무 모자랐어요. 게다가 안팎이 다르지 않다는데 바깥에다 대고 손가락질하는 그림을 십년 가까이 그리며 살다보니까 ‘너는 어떤데?’하는 의심도 스스로 품게 되면서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판화전시회 도록 글을 직접 써 주실 정도로 법정 스님과 교분이 두터운 이 화백이 집문 앞에서 환히 웃고 있다.
미술사가들이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앤디 워홀이 캠벨 통조림 캔이나 바나나 따위를 실크스크린으로 그려내 독특한 세계를 이뤘듯이, 이철수 화백도 그 못지않게 이철수다운 세계를 펼친다. “출발은 오윤하고 닮았지요. 그런데 십년 가까이 지나니까 제가 보기에도 오윤하고는 다른 길로 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랬더니 가까이서 손을 늘 잡아주는 이현주 목사님이 기독교하고 할 때는 재미없었는데 불교하고 만나더니 날개를 달았다고 하고, 권정생 선생님도 ‘철수 안에 저렇게 예쁜 게 들어있었구나’ 말씀하시더라고요. 조금 조금씩 제 세계라고 할 만한 게 생긴 것 같아요. 날개를 다는 순간이 와야 하는데.” 이 화백은 그림에 변화를 가져오면서 불교다움과 만났다고 돌아본다. 불교와 만났다고 하지 않고 불교다움과 만났단다. 겸손하다. “〈불일회보〉하고도 그래서 연이 닿기 시작했어요. 청학 스님이 아무것도 없는 하얀 한지로 도배를 한 방에 앉아 있던 컷은 떠올라요. 아무것도 없어서 인상 깊이 남았어요.” 그런 인연이 뿌리 내리고 싹을 틔워 법정 스님이 밥값이나 하고 가야겠다면서 만든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소식지가 1995년 3월 창간되고 넉 달 뒤인 7월부터 소식지 얼굴은 이철수 화백 판화로 꾸몄다. 그 뒤로 이 화백 판화는 4년 6개월이나 맑고 향기롭게 정신을 오롯이 담아 맑고 향기롭게 운동가들에게 띄웠다. 법정 스님하면 떠오르는 수필집 〈무소유〉 3판을 낼 때도 강원도 산막 이미지를 오롯이 드러내는 이철수 화백 작품을 표지 그림으로 썼다.

“법정 스님이 괴팍하신 데가 좀 있잖아요. 그런데 그 괴팍하심이 우리 집에서는 존중받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웃는 일이 많았어요. 세상에서 당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 사람 밖에 없다고. 하하.” 이 화백은 웃으면서 부인 이여경 여사를 가리킨다. “가끔 오셨어요. 가을걷이를 하고 벼 타작할 때 당신도 팔 걷어붙이고 타작을 하곤 하셨어요. 저는 그런 스님 모습이 뵙기 좋았는데 모시고 온 분들은 어쩔 줄 모르던데요.” 이 화백은 법정 스님하고 당신이 연배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스님을 잘 챙겨드리지 못했다고 돌아본다. 스님 성정으로 보아 깍듯하지 않고 스스럼없기에 외려 편안해 하지 않으셨을까 싶다. 이 화백 화실에 들면 은은하게 청록빛깔을 띤 널따랗고 근사한 찻상이 반긴다. “어느 해인가 저 상을 가져다놨는데, 스님이 상을 보시고는 멈칫하시더라고요. 아주 잠깐, 그러시더니 얼른 수습 하시고는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어요. 상이 크고 좋아 보여서 앤틱이라 여기셨나 봐요. 그래서 집에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데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제가 칠이 되지 않은 말간 상을 사다가 다리 밑동 자르고는 끝을 뾰족하게 바꿔 직접 칠을 해서 다듬었다고 말씀드렸더니, 그제야 잘 만들었다고 좋아하시더라고요.”

오래 전 어느 해인가 이 화백은 선화(禪畵)라고 할 만한 그림을 따로 모아서 달력을 만들었다. 그런데 일반달력보다 훨씬 덜 나갔다. 그 이듬해 말 스님이 선화달력이 올해도 나오느냐고 물었다. 팔리지 않아서 만들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는데 스님은 그 뒤로도 이따금 선화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이 화백을 볼 때마다 선화를 계속하라고 한 마디씩 꼭 건넸다. 그래도 이 화백은 꿋꿋하게 장사도 안 되는데 만들어 뭐하겠느냐고 말씀드리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거나 팔리지 않더라도 좀 남겨놓고 죽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씀했다.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승가에서 스님이 대중과 호흡하는 글을 쓰셨다고, 특히 선승들은 ‘선승으로써는 재미없다’고 깎아내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스님 글을 보면 공안이나 선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렇지만 당신이 살아오신 내력을 쭉 살펴보면 ‘공부는 당신이 하고, 대중들하고는 잘 씹은 암죽 같은 글로 이야기하려고 하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모습이 괜찮아보였어요. 제게 선화를 계속하라고 하신 까닭도 거기 있지 않나 싶어요. 어쨌든 인기인처럼 되셔서 그동안 힘든 일이 많이 겪으시는 모습도 뵙고, 둘레사람들 하소연이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어 안타까웠어요. 외로우셨을 것 같아요. 우리 내외가 앉아서 스님이 사람 복은 없으셨다고 이야기했어요.”

이철수 화백 말을 부인 이여경 여사가 받는다. “우리 모두 그냥 어떤 인물을 받아들일 때 보이는 대로, 겪은 대로만 받아들이잖아요. 큰 사람하고 사이에서 생긴 작은 사람 허물이 꼭 그 사람 잘못만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는 흔히 큰 사람은 괜찮은데 작은 사람 잘못이라고 해요. 돌이켜보면 어른이 잘잘못을 제대로 짚어주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정말 잘못하는 사람은 내치면 되고요. 그런데 우리는 문제 일으키는 사람이 다 잘못을 하고 어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들 해요. 그러면 제가 나서서 그래요. 어떻게 다 그 사람 잘못 만이겠느냐고. 문제를 보면서 옆에서 어른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는 사람들이나, 실체를 바로보지 못하는 어른도 문제이지 않느냐고. 그런 말을 하니까 스님이 저보고 편하다고 그러셨던 거죠. 저희 집에 스님을 따라오는 보살들 가운데 공양거리며 반찬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는 이들도 있어요. 기분이 나빠요. 그래서 스님께 퇴박을 놨어요. ‘그 분들 마음을 받으시려면 저희 집에 오지 마세요. 저희 집에서는 저희 밥을 드셔야지요.’ 스님을 모시고 온 보살들은 공양 할 때 스님과 마주 앉지도 못해요. 바보들이야. 제가 스님하고 마주 앉아서 밥을 먹으면 스님이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보살은 장한이 엄마밖에 없어.’ 그러시며 웃으셨어요. 제가 농담처럼 스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스님이 은근히 즐기시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서 싫으면 싫으니까 그만두라고 대놓고 말씀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앞으로도 되풀이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어요. 모시는 어른 좋은 점을 내세우려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웃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죠. 실수나 허물이 다 그 사람들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사실 이런저런 자잘한 허물도 가지고 계시는 스님이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나요? 저희도 허물이 큰 사람들인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드러내놓기 쉽지 않은 일인데, 당차다. 바로 이 당참이 스님 발걸음을 박달재 아래로 이끌었을까?

“이렇게 해석해도 저렇게 해석해도 다 온전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냥 묘용(妙用)은 얼굴이 워낙 다양해서 그런가보다 여기고 그냥 받아들이는데, 만년에 스님 주변에 갈등이 많았어요. 출판 관련 얘기도 있고 어지러이 믿기지 않는 얘기들도 있었고. 어떤 얘기는 스님이 가지를 칠 수 있는 일일 텐데 싶었어요. 글로라도 길거리에 나앉아있는 일은 참 힘든 일이더군요. 제게 스님은 늘 고마운 어른이셨기 때문에 좋은 모습이 좋은 대로만 살리지 못하게 만드는 주변에 제가 아주 분노했어요. 안타까웠어요. 평소 스님 모습을 봬서는 거침없이 잘라내고 가르치셨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셨어요. 참 서투셨어요. 간단한 스님 선기(禪氣)도 붙잡아 헤아리지 못하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 서계시기가 너무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제가 성이 났어요. 그래서 스님 책에다 그려드리기로 한 그림 준비를 다해놓고도 못한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저는 스님이 ‘무슨 일이요?’하고 전화를 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스님이 이 화백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그러시면서 이 화백이 싫다면 그만두라고 하셨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어요. 그 뒤에 스님이 제 전시회에 오셨어요. 그 자리에서 스님한테 제가 스님하고 둘이서만 뵙고 드릴 말씀이 있으니 시간 좀 내주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놀라시더라고요. 집사람 얘기대로 주변 탓만 돌리기는 좀 어려우니까 스님이 모르고 계시는 일이라면 제가 받은 느낌을 스님께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뒤로 돌아가실 때까지 스님을 뵙지 못했어요.” 이야기 줄거리로 보아 이 화백이 그 말씀을 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 병환이 깊어지는 바람에 만날 겨를이 없었을 터였다.

이 화백은 스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절판 소식을 들으면서 스님이 당신에게 주신 답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제가 망설이다가 인터뷰 하겠다고 했던 까닭도 이 얘기를 드리고 싶어서였어요. 예민한 어른이라 제가 그림을 그려드리지 않겠다고 했을 때나, 따로 한번 뵙자고 할 때 ‘저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구나.’하는 걸 모르셨을 리 없어요. 못되게 굴지 말고 찾아가서라도 뵙고 이야기를 드리고 말씀을 들었으면 좀 편안하셨을 텐데. 저작물을 싹 거두라고 하신 말씀이 아주 통렬한 대답이 되었지만 부담스러웠어요. 당신 생각은 또 다른 큰 줄기를 이루는 말씀이겠지만. 그러면서 선화를 계속하라고 하셨던 말씀도 새삼스럽게 되새김질 하게 되었어요. 길상사를 처음 보시 받았다고 하셨을 때 한번 둘러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돌아가시고 난 뒤에 가 봤어요. 많이 달라져서 조금 놀라서 서둘러 돌아왔는데 남은 건 스님과 추억들뿐이네요. 그런 일로 말년에 뵙지 못하게 되어 송구스럽고 아쉬워요. 불운이든 행운이든 한 얼굴로 다가오는 게 아니니까요. 돌아가시고 나서 불일암을 TV뉴스에서 비춰주는데 제 그림이 걸려있더라고요. 스님 한 분이 바람을 거슬러서 나뭇잎이 휘날리는 곳을 걸어가는 그림인데 스님은 그런 그림을 좋아하셨어요.”

법정 스님은 이 화백 판화전시회 도록 글도 쓰셨다. “내 (山居) 한 쪽 벽에는 이철수 판화 〈소리 - 바람 부는 날 나뭇잎들〉이 걸려 있다. 가을바람에 나뭇잎들이 온통 떨며 흩날리는 그 속으로 한 수행자가 가사자락을 날리면서 바람을 거슬러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림이다. 이 ‘소리’ 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아늑한 평온이 내 안에 깃든다. 그리고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아슴아슴 보이는 것 같다. …… 이철수 글에서는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산촌에서 쇠여물 삶는 질박하고 구수한 냄새가 난다. 단순하고 질박한 판화가 곁들인 간결한 화제는 그림과 어울려 선미(禪味)를 풍겨주고 있다 ……”.

이철수 화백은 무문관(無門關) 연작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무문관 48칙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만드는 일인데, 밑그림이 거의 다 된 이 무문관 연작이 선화를 해보라고 했던 스님 말씀에 대한 화답이라는 이 화백은 이 일은 그림으로 평창을 다는 일이라고 했다. “원래는 작업을 시작했어야 하는데 다른 일이 생겨서 아직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무문관〉을 비롯해 앞으로 〈조주록〉이나 〈벽암록〉처럼 평소 가까이 두고 보던 책 몇 권을 가려내어 풀어보려고 해요. 이 일은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스님 말씀이 큰 동인(動因)이 되었어요. 그때 그렇게 드나드실 때마다 말씀하셨어도 ‘내 몫이 아니다’ 여기고 살았는데 이젠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라도 스님 뜻을… 재밌는 책이 될 거예요.” 기대된다. 어떤 모습일까?
 

이철수 화백의 작품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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