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봉산 숲길 그리고 수국사(守國寺)

봉산. 서울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 사이에 위치한 해발 207m의 산이다. 능선을 따라 걷는 약 6.6km의 숲길은 서울시가 지정한 명품숲길 중의 하나다. 고도가 그리 높지 않지만 북한산의 지맥이 흐르는 봉산의 숲길엔 소나무와 잣나무를 비롯한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득하다. 코스는 서울 지하철 6호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시작해서 수국사를 거쳐 구산역까지 걷는 방법과 역으로 걷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길의 시작과 끝에 황금사찰이라 불리는 수국사가 있다.

세조가 부모의 마음으로 지은 절
1992년 개금불사해 ‘황금사찰’로 불려
 

수국사 대웅전과 수각 사이에 조성된 초전법륜상. 부처님이 성도 후 5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고 계시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은 없었다. 바라보는 산과 올라야 하는 산은 달랐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출발했다. 5번 출구로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변전소가 나온다. 변전소 오른쪽 골목으로 걸으면 숲길과 만난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다. 왼쪽은 조금 급하고 오른쪽은 완만하다. 봉산숲길은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다. 도시의 소음은 점점 멀어지고 산새들의 지저귐이 다가왔다. 산 정상에 오르면 길 위에서 흘린 땀의 덕택이 새삼스러워진다. 산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장관이다. 도심 속에서 보는 도심의 풍경과 백련산, 인왕산 등 인근의 크고 작은 산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능선의 끝에서 수국사 쪽으로 내려간다. 얼굴이 조막만 한 해바라기들이 해를 향해 필사적으로 서있고, 어쩌다가 그 사이에 선 밤나무 엔 푸른 밤들이 걸렸다. 꽃의 시절은 짧고 잎의 시절은 길다고 했던가. 누구의 시절이 길었든 이제 숲은 결실의 시절로 가고 있었다. 길의 경사가 편안해질 때 쯤 숲 사이로 황금빛 전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숲과 절 사이에서 매미들이 울었다. 숲길을 나오자 수안사(守眼舍)라고 쓴 약수터가 나왔다. 약수로 마른 목을 적시고 나면 수국사가 제대로 보인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성스러운 고제(苦諦)가 있다. 태어남도 괴로움, 늙음도 괴로움, 병듦도 괴로움, 죽음도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集諦)가 있다. 이곳저곳에 집착하는 갈애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滅諦)가 있다. 갈애에서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부처님의 첫 설법이 들려온다. 약수터를 지나면 부처님과 5비구를 만난다. 대웅전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초전법륜상이 모셔져 있다.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아득한 그 시절을 보는 듯하다. 2500년 전 부처님 첫 설법을 듣고 있으면 황금빛의 수국사 대웅전이 보인다.

황금빛으로 늘 찬란한 수국사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수국사는 1459년 조선조 세조 5년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의경이 묻힌 경릉 동쪽에 정인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세자로 책봉된 의경세자는 왕위에 오르기 전 스무 살에 죽는다. 세조가 죽고 왕위에 오른 둘째 아들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3개월 만에 죽는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를 이었다. 아들이 왕이 되자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된다. 지아비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인수대비는 창건 때 급하게 지었던 정인사를 다시 짓는다. 인수대비는 원래 자신이 살던 집에 새로운 원찰을 지으려고 했으나 두 아들의 어미인 대왕대비 윤씨는 생각이 달랐다. 두 아들이 함께 묻힌 곳 가까이에 원찰을 두고 싶었다. 인수대비가 윤씨의 뜻을 받들어 의경세자를 위해 지었던 정인사를 중창하기로 한다. 정인사는 덕종(의경세자)과 예종 두 임금의 원찰이 된다. 정인사는 억불의 시절 속에서도 왕실의 원찰이라는 이유로 위상을 유지해 온다. 그 후 연산군 10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았다가 1900년(광무 4) 설준 스님이 현재의 갈현동으로 옮겨 지었다. 하지만 정인사가 언제부터 수국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아 왕위에 오른 세조. 그는 인간적인 번뇌로 힘겨웠다. 그런 그에게 자식의 죽음은 천하를 가진 임금이었기에 더욱 견디기 힘든 절망이었을 것이다. 임금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 한 나라의 임금이 마지막으로 기댄 것은 부처님이었다. 유교의 궁궐에 사는 임금이 불교에 기대 살았던 것이다. 자식의 죽음을 끝내 땅에 묻지 못한 아비는 먼저 간 아들을 위해 절을 짓는다. 그리고 또 다른 아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던 어미 역시 아들의 죽음을 절에 묻는다. 수국사는 그렇게 지어진 절이다. 날이 저문다. 태양과 마주선 수국사의 대웅전이 찬란하게 빛난다. 수국사는 1992년 대웅전에 개금불사를 했다. 법당 전체가 황금색이다. 황금은 나쁜 기운을 막고 불변을 상징한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은 넓은 의미에서 부처님의 법신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황금법당의 찬란한 빛은 세상을 밝히는 부처님의 빛이다. 수국사는 한 나라의 임금이 자식을 둔 어버이로서, 슬픔을 간직한 한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기댄 곳이다. 수국사의 하루는 늘 금빛으로 찬란하다. 찬란한 수국사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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