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국 아닌 10~20국 역사 담아

발해 유물
신화 중심으로 기술하면서도

고구려·백제·가야·대발해 포함

만주가 우리 강역임을 환기시키고

‘오가야’ 조목 해외진출 짐작케 해

한반도 일대 각국 역사 기록해

대화왜는 무녕왕에서 비롯됨 서술

1. 고구려와 대발해흔히 사가들은 일연이 ‘세 나라의 빠진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담아내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서책이 신라ㆍ경주ㆍ왕실 중심으로 기술됐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신라를 중심으로 기술해 가면서도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가야와 대발해 등 여러 나라들의 건국이야기를 담아놓고 있다. 이것은 일연이 국사(國師)의 소임을 맡으면서 강화도경의 국립도서관에서 많은 역사서들과 경사자집을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들 고전들을 깊이 섭렵하고 취사선택해 신라만이 아니라 ‘삼국’을 넘어 ‘십국’ 내지 ‘이십국’ 유사를 담아냈다. 일연이 고조선과 마한 및 부여와 신라를 넘어 고구려와 백제 및 가야와 대발해 등까지 담아낸 것은 〈삼국유사〉가 신라사 중심의 서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일연은 ‘북부여’와 ‘동부여’ 조목에 이어 ‘고구려’ 조목을 신설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하백의 첫째딸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추모(鄒牟)왕의 가계를 보여준다. 유화의 아들은 활을 잘 쏘았던 까닭에 ‘주몽’(朱蒙)이라고 불렸다. 주몽은 이복형제인 대소(帶素) 등으로부터 벗어나 오이(烏伊) 등 세 사람을 벗 삼아 엄수(淹水)에 이르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손자다. 오늘 도망 나오는 길인데 뒤쫓는 자가 거의 다 쫓아왔으니 어찌해야 하겠느냐?” 이에 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그를 건너가게 하고는 곧 흩어지니 뒤쫓는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졸본주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를 세운 뒤 곧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기사로 탑상 편의 ‘요동성 아육왕탑’과 ‘고구려 영탑사’ 조목과 흥법 편의 ‘보장봉노 보덕이암’ 조목을 싣고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발해’를 빼버림으로써 고구려 이후 동북아 지역에서 이뤄진 우리 문화를 잃게 했다. 반면 일연은 고구려의 후예인 대발해에 대해 ‘말갈 발해’ 조목으로 담아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뿌리였던 만주 전역에 대한 연결 고리를 이어내고 있다. 말갈은 당대에 ‘흑수(흑룡강) 말갈’과 ‘속말(송화강) 말갈’로 나뉘어져 당대에 속말 말갈은 발해(渤海)를 세웠고, 송대에 흑수 말갈은 금(金)나라를 세웠다. 금을 세운 황제는 경주 김씨였던 김치양(金致陽+千秋太后)의 아들인 완안(完顔, 王)씨 함보(函普)이며, 고씨의 별종인 대씨(조영)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세력과 함께 진국(震國)을 세웠다. 그 뒤 712년에는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대씨가 세운 대발해는 고구려 계승자로서 고조선 이후 한민족의 강역을 가장 크게 넓혀 5경 15부 62주를 두었다. 문황(대흠무) 시대에 서쪽으로는 산동반도의 등주를 함락시켰으며 북쪽으로는 흑룡강가에 자리한 흑수 말갈을 정벌했다. 그 뒤 230여 년간 주변의 당나라와 일본 및 통일신라와 교역하면서 동북아의 대제국으로서 자리했다. 926년에는 마지막 애황(대인선) 때 글안(契丹)의 이간책에 넘어가 나라가 무너졌고 후발해 흥요국 정안국(열만화) 올야(兀惹, 오소경) 대원국 등 여러 나라가 일어나 부흥을 도모했으나 지속되지 못했다. 일연은 대발해를 담아냄으로써 조선조 실학자인 유득공의 〈발해고〉가 편찬되기까지 만주 전역이 우리의 강역임을 환기시켜 주었다. 2. 가야와 임나가야 그리고 왜가야일연은 〈삼국유사〉의 기이 상편에 ‘오가야’ 조목과 기이 하편에 고려 문종 때 금관주지사를 했던 김양일(金陽溢)이 편찬한 〈가락국기〉를 요약해 싣고 있다. 그는 ‘대가락국’과 ‘오가야’를 ‘조목’으로 편입시킴으로써 6부 가야의 전모를 알 수 있게 했다. 최근의 고고학과 인류학의 성과에 의하면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는 부여로부터 이주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고조선이 해체되면서 그 거수국이었던 부여는 청동기에 이은 철기문명을 흡수하면서 앞선 문화를 누렸다. 특히 철기에 대해 능했던 이들은 배를 타고 바다(하늘)을 건너 온 것으로 짐작된다. 수로왕은 즉위 후 완하국(琓夏國)으로부터 건너온 탈해(脫解)에 의해 왕위 찬탈의 위험을 겪었다. 왕위를 내놓으라는 탈해의 협박에 수로가 양보하지 않자 탈해는 ‘기술’(奇術)로써 승부를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매가 되자 수로는 독수리가 됐고, 다시 탈해가 참새가 되자 수로는 새매가 됐다. 곧이어 각자 본모습으로 돌아온 뒤 탈해는 죽이기를 싫어하는 수로의 인덕(仁德)에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다. 그 뒤 탈해는 가야를 떠나 신라(계림)로 도망했다. 이후 수로는 인도의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를 맞이해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놓게 된다. 점차 가야는 낙동강을 주변에 형성된 수십 개의 부락국가들을 연합해 부족국가를 형성해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진주?, 상주 함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의 6가야가 됐다. 이 중 가장 세력이 큰 금관가야가 다른 5국을 관할하는 맹주가 됐다.금관가야는 42년 개국 이후 491년 동안 지속되다가 법흥왕 19년(532)에 신라에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했다. 대가야는 지금의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500여 년 동안 지속하다가 신라 진흥왕 23년(562)에 신라에 합병됐다. 그런데 금관가야는 부산 복천동에서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과 가야-백제-왜의 연합군의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 이래 왜국으로 건너가 왜가야를 건국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 13호에서 출토된 파형동기와 청동솥[銅], 23호에서 나온 호랑이모양띠고리[虎形帶鉤], 송산리 6호 고분에서 나온 벽돌 도판 등의 유물들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무너진 동부여(대소) 이외에 북부여의 세력들은 만주의 북서쪽에 머물며 세력을 유지했다. 285년 고구려 서천왕 16년에 선비족 모용외(慕容)의 침입에 의해 옥저땅으로 도망했다가 뒤에 다시 본국을 회복했다. 하지만 346년 연왕(燕王) 모용황(慕容)에게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그 땅은 고구려의 판도가 됐다. 철기를 배경으로 한 부여의 일족들은 다시 동해 바다를 타고 내려와 가야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가야가 철 생산지와 무역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부여로부터 계승된 제철기술 덕분이었다.금관가야의 왕이었던 응신(應神)은 나라가 고구려-신라 연합군에서 무너지자 수많은 가야인들을 이끌고 왜국으로 건너와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가와치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해 그는 이후 왜국(일본)의 실질적인 시조가 됐다. 이곳으로 도래한 30여년 뒤에 가와치 왕조를 세운 인덕은 일본의 16대 왕으로 자리잡았고 그를 모신 인덕천황릉(仁德天皇陵)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인덕천황의 원래 이름은 오호사자키노 스메라키코도(大?天皇)이며 313~ 399년까지 재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선왕이었던 응신(應神)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이 능은 107기가 넘는 수수께끼의 백설조(百舌鳥) 고분군 중 가장 큰 전방후원분이다. 사방에 거대한 해자(垓字)가 둘러쳐 있는 인덕천황릉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중국의 진시황릉과 함께 세계 3대 대형고분으로 꼽히고 있다. 전장 486m와 전방부 306m로 된 총면적 464.123㎡로 된 이 큰 능의 축조는 과연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어떠한 토목 기술로 가능했을까? 일본 하비키노(羽曳野)시에 있는 인덕천황의 아버지인 응신천황릉의 규모 역시 이 능에 버금갈 정도로 크다.철에 능했던 가야인들은 오랫동안 철 생산으로 호황을 맞이했다. 가야인들은 철을 대량 생산해 반도와 대륙을 오가며 중개상을 했던 대방(帶方) 등을 통해 만주와 중국 등지에 철을 판매했다. 철의 대량 생산과정에서 인력이 모자라자 왜인들을 용병으로 데려다 썼다. 그들이 사용하였던 유물들 일부가 가야지역에 남아있다는 것을 근거로 일본 학자들은 왜국(일본)이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고 주장하고 광개토대왕비문을 조작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것은 고고학과 인류학의 연구 성과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오히려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인들이 경상도 일대에 존재했던 임나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왜국 지역에서는 왜가야를 경영했다. 큐슈와 관서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가야의 유물 유적들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해 주고 있다. 이처럼 일연은 〈삼국유사〉에 ‘오가야’와 ‘가락국기’ 조목을 담아냄으로써 한민족의 해외 진출의 시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3. 백제와 대화왜최치원은 일찍이 마한을 고구려라 하고 변한을 백제라 했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기이 편에서 ‘변한 백제’,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무왕’, ‘후백제 견훤’ 조목과 흥법편의 ‘난타벽제’, ‘법왕금살’ 등 백제 관련 조목을 싣고 있다. 졸본부여인이었던 소서노(小西努)가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졸본부여의 주몽과 연합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아들 유리(琉璃)를 태자로 옹립하자 소서노는 아들들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왔다. 비류는 주변의 조언을 듣지 않고 인천 부근의 미추홀에 비류백제를, 온조는 서울 하북 위례성(잠실 몽촌토성)에서 한성백제를 세웠다. 온조왕 14년에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하고 ‘십제’(十濟)로 국호를 삼았다. 반면 비류는 습기가 많고 물이 짠 미추홀에 살 수 없어 위례성으로 돌아온 뒤에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 이것을 흔히 한성백제라 한다.이후 문주왕은 도읍을 웅천(공주)로 옮겼고(475), 성왕은 다시 소부리군(부여)으로 옮겨(538)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 일연은 사비백제를 ‘남부여’라고, 한성백제를 ‘전백제’라 했으며, 졸본부여가 북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북부여’라고 조목을 병기하였다. 백제와 가야와 왜국의 연합군이 부산 복천통 전투에서 고구려와 연합한 신라군에게 패하면서 가야의 중심은 왜국으로 이어졌다. 가야는 경상도 일대에 임나가야로서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왜가야를 무대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이어나갔다. 반도의 임나가야 세력이 미미해지자 점차 왜가야 지역의 주체가 백제인들로 대체됐다. 백제 사마(斯麻)왕이었던 무녕왕은 개로왕의 왕비가 곤지왕과 함께 왜로 가던 중 낳았다고 전해진다. 왜국에서 태어난 무녕왕은 백제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 뒤 왜국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71년 7월 5일 무녕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한성백제가 망하고 남부여(공주/부여백제)로 이어지면서 그 일부세력들이 왜국으로 건너가 왜가야 이후의 지배질서와 영향력을 이어받았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신라의 연합작전은 금관가야의 유민들을 왜국으로 건너가게 하였다. 이들을 바다 건너 북 큐수 지역으로 이끌고 간 응신과 인덕은 동쪽으로 더 나아가 긴키 지방으로 진출해 야마토(大和) 조정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장대한 업적을 이뤄낸 뒤에 응신과 인덕은 그곳에 묻혔고 그들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왕실은 거대한 왕릉 역사를 감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록 가야는 신라에 합병됐지만 왜가야를 통해 대화왜, 즉 야마토 조정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한강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선진문명을 발전시켰던 한성백제는 몰락하고 그 일부 세력이 내려가 남부여로 이어졌지만 한편으로 백제는 왜국으로 시선을 열어갈 수 있었다. 결국 대화왜의 첫 주자는 무녕왕에서 비롯됐다. 이후 야마토 조정은 백제계 주도로 이루어지면서 왜국의 기반은 점차 가야 중심에서 백제 중심으로 이동하였다. 해서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논의는 좀더 연구되고 논증돼야 할 것으로 이해된다.일연은 〈삼국유사〉 안에 만주 전역과 한반도 및 왜국 열도에서 일어난 여러 역사 기록들을 담아내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사국 사이의 전쟁을 비롯해 후삼국 전쟁 및 거란과 여진의 침입 그리고 몽골과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인해 많은 사료들이 사라진 뒤에 〈삼국유사〉를 편찬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앞서 이루어진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각훈의 〈해동고승전〉 등 여러 고기들을 참고하면서 나름대로 사료들 사이의 정합성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의 수트라이자 바이블인 〈삼국유사〉가 태어날 수 있었다. 신라에 앞서 이들 여러 나라들의 개국조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삼국유사〉를 탄생시킬 수 없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서책의 역사적 가치를 다시 반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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