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제의 아들이 나라를 다스리다

고조선의 홍익인간 이념은 부여의 법사상에도 구현돼

부여는 몽골땅에서 건국돼

몽골족 일부, 지금도 ‘코리’라 불러

해모수 아들, 천제의 아들로 태어나

‘고’로 성 바꿔, 훗날 ‘고구려’의미

1. 부여의 위치와 주체고조선은 개국 초부터 국가기구의 조직과 법 이념 및 그 기능을 세웠던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 조의 언급처럼 단군은 후대의 ‘삼정승’과 같은 최고기관인 풍백(風伯)과 운사(雲師)와 우사(雨師)의 3부 ‘영감’(令監)을 두었고, 그 아래에 후대의 ‘판서’와 같은 주곡(主穀)과 주명(主命)과 주질(主疾)과 주형(主刑)과 주선악(主善惡)을 담당하는 5부 장관(長官)을 두었으며, 그리고 그 아래에 360여 가지 소임을 맡은 ‘하급 관리’를 두어 후대의 국가기관의 모범을 세웠다. 또 〈한서〉 지리지 ‘낙랑군’ 조에는 “조선은 법이 엄하고 인심이 순후하여 팔조(八朝)만으로도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했던 금법팔조(禁法八條)의 존재는 고조선이 법으로 통치된 사회였음을 알려주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현재 전해지는 살인과 상해 및 도적(과 간음)의 금법 3조목은 대단한 엄격성을 보여준다. 즉 1)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가 되게 하고 2)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공물로써 배상하며 3)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예가 되며 50만금의 속전(다량의 금)을 바치고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범금 8조에 이어 부녀들의 정신(貞信) 문제가 기록되었던 점을 미루어 보면 아마도 8조 중에 이 간음 금지(禁姦) 조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또 북애(北崖)의 〈규원사화(揆園史話)〉의 단군기에서는 단군이 국내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한 뒤에 8조목 혹은 8훈을 통해 그들을 깨우쳤다고 전한다. 즉 1)하나인 모든 덕의 근원인 신(일신)을 공경할 것 2)황조(皇祖)의 공덕을 기릴 것 3)모든 사람의 양심을 지키는 천범(자연법)을 지킬 것 4)어버이를 공경할 것 5)서로 화합하여 미워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 것 6)서로 사양하며, 빼앗거나 훔치지 말 것 7)간접적으로라도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고 서로 구제하며, 남을 업신여기지 말 것 8)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지켜서 좋지 못한 생각을 품지 아니하는 것이 곧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친하게 하는 것이므로 그리하면 무궁한 복을 누릴 것이다. 이 8조목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弘益人間]는 이념을 구체화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고조선의 홍익인간의 이념은 부여의 법사상에도 구현되었다. 부여는 일찍부터 책임정치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부여인들은 공개심리 판결에 의한 신형(愼刑)주의를 채용하고 부족 대표자의 평의회제도를 시행했다. 그리하여 기아와 전쟁 등에 대한 책임군주제의 관습법을 실시했다.고조선 해체 이후 그 유민들은 부여와 고구려 및 한과 예와 맥 등으로 흘러 들어가 ‘동이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부여는 지역적으로 고조선 지역과 맞닿아 있었던 요서 북부지역에 자리했던 거수국이었다. 때문에 고조선의 해체 이후 요동으로 옮겨간 한(韓)족 이외에도 요서 북부로 옮겨간 부여는 고조선의 통치자였던 단군들이 한동안 지배체제를 이어갔다. 부여는 고조선과 함께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져 있었으므로 〈통전〉 〈삼국지〉 〈후한서〉 〈진서(晋書)〉 등에 그 기록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단군세기〉는 부여에 대해 “서기전 239년에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인이다”고 하였다. 몽골 과학원의 베슈미야타바르 교수는 몽골의 부리야트족이 자신들을 부여족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 부족은 현재 몽골 내륙에 자리하고 있는 부여국의 모체인 고리국(?離國)이다. 부여는 몽골땅에서 몽골족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국하였다. 부여국의 흘승골(訖昇骨)은 몽골의 할힌골 강을 가리킨다. 몽골족의 한 파인 부리야트인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코리(?離)라고 부른다 증언한다. 부여는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예맥족으로서 흥망을 반복하다가 서기 22년에 고구려에 합쳐져 고구려와 백제의 시원이 되었다. 그 일부는 가락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국의 조상이 되었다. 일본의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는 1916년경에 “일본 천황가 조상은 부여 백제계”라고 하였다. 그가 주장한 일본의 기마민족 기원설은 곧 이 부여족의 이동을 언급한 것이다. 2. 부여의 갈래들일연은 ‘고조선’ 조목 다음에 ‘위만조선’을 설정한 뒤 다시 한사군이 고조선에 밀려 철수하기 직전 평주(平州, 平那+현토)도독부와 동부(東部, 임둔+낙랑)도위부로 축소했던 ‘2부’를 싣고 있다. 그 뒤에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최리왕의 ‘낙랑국’을 한사군의 낙랑과 구별하지 못한 채 두 지역의 기록을 종합해 적고 있다. 그 뒤에는 후한 헌제(憲帝) 때 요동후(遼東侯) 공손강(公孫康)이 광무제가 요서의 난하(?河) 유역에 자리했던 한사군의 낙랑군 남부도위를 관장하는 7현을 관할하기 위에 치지(治地)를 두면서 설치했다는 ‘북대방’과 ‘남대방’의 조목을 시설하고 있다. 후한 광무제는 서기 30년에 동부도위의 관직을 폐하고 영동(嶺東)의 7현을 완전히 포기하고 철수했다. 하지만 일연은 한사군이 반도 내에 있었다는 일부 고대사의 기록에 의거해 북대방과 남대방의 역사를 〈삼국유사〉에 편입시켰다. 이러한 조목 편입은 일연의 〈삼국유사〉 전편이 창작이 아닌 전술(傳述)의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충렬왕 7년(1281) 즈음에 걸쳐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몸소 보고 느낀 바가 있어 〈구삼국(사)기〉의 편재에 의거해서 엮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일연은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던 한사군의 낙랑군의 관할소였던 ‘북대방’과 ‘남대방’ 조목 이후에 ‘말갈과 발해’조목을 설정한 뒤 다시 경북 청도 지역에 있었던 ‘이서국’과 경남북도에 있었던 ‘오가야’ 조목을 시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서야 비로소 ‘북부여’와 ‘동부여’ 조목을 두고 있다. 두 ‘부여’ 조목 앞 나라들의 역사적 기원이 부여나 고구려보다 앞섰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연이 앞의 몇몇 조목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연이 참고했던 〈구삼국(사)기〉의 편제의 영향일까? 또는 일연이 임의로 그렇게 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고조선 해체 이후 단군조선의 거수국들이 독립하면서 옛 고조선 영토 지역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이서국과 발해 등의 조목이 부여와 고구려에 앞서 있는 것에 대한 해명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일반사 중심으로 기술된 기이편 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부여는 예로부터 예맥 조선족으로 알져져 왔다. 일찍부터 농경생활을 해 오면서도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대하였다. 중국의 옛 기록에는 부여가 “부유하고 강력하여 일찍이 패한 적이 없었다” 적고 있다. 또 “국민성이 견실하고 강용하고 근후하여 도적질을 하지 아니하고 예절이 정중하다”고 하였다. 추수 뒤의 12월(음력 1월)에는 ‘맞이굿’(迎鼓)이라는 국가적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살인과 간음 및 부녀의 투기 등에 대하여는 극형에 처했으며 일부다처와 축첩 및 순장 등의 풍습이 있었다. 한민족이 즐겨 입었던 것처럼 남녀가 모두 흰옷(白衣)을 입었다. 특산물로는 이름있는 말[名馬], 붉은 옥{赤玉], 아름다운 구슬[美珠], 동물의 가죽털[毛皮] 등이 있었다. 일연은 부여의 뿌리인 북부여에 대해 〈고기〉에 의거해 적고 있다. “임술년(기원전 59) 사월 팔일에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홀승골성에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하며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하였다.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解)를 성씨로 했다. 그 뒤 상제의 명에 따라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부여’ 조목에 의하면 북부여왕 해부루(解夫婁)왕이 꿈에 천제의 현몽을 받은 대신 아란불(阿蘭弗)의 권고로 동해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동부여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 뒤 부루왕이 늙어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가 탔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린 곳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애를 얻어 금와(金蛙)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고 하였다. 금와를 이은 대소(帶素)는 고구려 무휼(無恤)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동부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22년). 해서 일연은 “동명제가 북부여를 계승해 일어나 졸본주에 도읍하고 졸본부여라 하니 곧 고구려 시조이다”고 하였다. 결국 부여는 북부여 → 동부여 → 졸본부여 → 고구려로 이어지면서 곰족과 범족은 하나로 통합됐다.3. 졸본부여와 고구려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부여족은 고구려족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환국’(桓國)의 통치자 환웅이 토착민이었던 부여족(범족)과 고구려족(곰족) 중 곰족을 정복하고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곰을 토템으로 여겼던 고구려족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범족을 아우르며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 나갔다. 초기의 부여족과 고구려족의 지배자는 고조선의 통치자였던 ‘단군’이란 호칭을 사용해 왔다. 고대 중국인들은 조선민족을 ‘맥’이라고 부르다고 뒤에는 ‘예’ 혹은 ‘예맥’이라고 불렀다. 때문에 예족과 맥족을 따로 보는 경우와 하나로 보는 경우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예맥 역시 조선에 속하며 그 예맥은 부여와 고구려와 삼한 즉 백제와 신라 등의 시원이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난하’(?河) 이동부터 만주 전역과 한반도 전체를 ‘조선’이라 부른 것처럼 ‘예맥’은 조선족의 공통 칭호로 불려져 왔다. 예맥은 모두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시절부터 독립된 이래 우리 민족에 대한 공통의 칭호로 일컬어졌다.그런데 점차 예맥이란 호칭은 그 범위가 줄어들어 동예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중심으로 역사가 재편되면서 그 동쪽에 자리했던 예와 옥저는 자연스럽게 동예와 동옥저 등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특히 동예는 한때는 한나라와 맞설만큼 강성했다고 전하지만 자주적인 국가를 이뤄내지 못했다. 결국 1세기 경에 ‘예’는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제30의 ‘예전’(濊傳)에 의하면 “문을 닫지 않더라도 도적이 없다”고 적고 있다. 이들은 강직, 용맹, 근후, 질막, 성실하고 보전(步戰)에 능하였다고 전한다. 동예와 옥저는 다양한 풍습들이 있었다. 마직과 잠사술이 발달하고 어염 등 해산물과 해표피 같은 피물, 우마의 축산물 및 단군(檀弓)이라는 명궁을 생산해서 주변국들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부역을 했다.동예와 옥저의 언어와 습속 및 의식주와 예절 및 법제 등은 고구려와 대체로 비슷하였다. 옥저의 민며느리제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와 비슷했다. 특히 동예는 동성 친척 사이에 결혼을 피하는 불혼법(不婚法)이 있었다. 아마 옥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환자나 주검이 생기면 새집으로 옮겨 사는 기휘(忌諱)와 위생의 풍습도 있었다. 또 동예는 국중행사로서 무천(舞天)이라는 공동대축제를 거행했다. 그리고 경제와 제천의 구역인 산천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풍습들은 고구려에 통합되면서 고구려 문화로 이어졌다. 졸본부여로부터 출발했던 고구려는 과거 한사군이 있었던 ‘현토군의 지경’에 있는 졸본주에 도읍을 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해모수의 아들이었던 그는 본성이 ‘해’(解)였지만 자기가 천제의 아들로서 햇빛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高)로 성을 삼았다. 그리하여 ‘구리’ 또는 ‘구려’를 고씨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에서 ‘고구려’ 혹은 ‘고구리’라 하였다.기원전 38년을 기점으로 한 고구려는 668년 나라가 망하기까지 700여 년을 동북아의 대제국으로서 군림했다. 고조선의 해체 이후 그 유민들이 여러 거수국들로 스며들면서 고조선의 앞선 문명과 제도는 여러 나라들의 삶의 방식과 질서가 되었다. 천신신앙과 토템신앙 및 산신신앙과 고목신앙들은 모두 고조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통적 하느님(환인) 신앙을 비롯해서 성황당을 중심으로 한 산신신앙, 풍류를 기반으로 신선신앙, 그리고 곰(고구려)과 범(부여), 닭(신라)과 말(신라) 등에 대한 숭배는 우리 문화의 기반을 이루었다. 이같은 천신 혹은 산신 신앙과 무속신앙 및 풍류는 불교와 도교와 유교가 이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어져 온 한민족의 정신적 원천이었다. 일찍부터 이들 신앙들을 이어오던 고구려는 불교를 수용하면서 고대국가의 틀을 공고히 해갔다. 그 첫 걸음의 모습을 일연은 〈삼국유사〉 흥법편 ‘순도조려’ 조목의 찬시에서 “압록강에 봄이 깊어 물풀은 곱고/ 백사장 해오라기 한가히 조네/ 홀연히 저 멀리 노 젓는 소리/ 어느 곳 고깃밴가 안개 속 길손”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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