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두타제일 마하가섭 <상> 출가

그림= 박구원 작가
다자탑 앞에서 세존 뵙고 ‘스승’ 직감

“장로·신참들 양심 깨우는 길을 가라”

부처님 분소의 입고 두타제일 수행

첫 경전 결집 등 120세가지 교단 통설

부처님이 입적하신 뒤 승단을 이끌어가는 영도자 역할을 해낸 마하가섭 존자 이야기다. 부처님 당시 수행법인 ‘두타행’을 평생에 걸쳐 펼친 그는 교단 안팎으로부터 수행자로 존경을 받았다.

  • 늦깍이 출가, 구도의 길을 모색하다

가섭이 왕사성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12년간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의 업장 소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가섭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마음이 가는대로 길을 걷던 그때였다. 숲 속에서 탑이 보였다.“다자탑이구나!”가섭은 왕사성에서 나란다강을 지나가는 그 곳에서 한 선인을 만난다. 바로 부처님이었다.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

가섭은 부처님을 보는 순간 수십년 간 기다려왔던 자신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줄 큰 스승임을 직감했다. 명상을 마친 부처님의 음성이 꿈결같이 들려왔다.

“가섭이여, 그대는 ‘장로들과 신참들과 중진들이 강한 양심을 일깨우는 길을 걸으라.’”

철수와 영자, 순자처럼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도 가섭(까사빠)이란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다. 우루벨라 가섭 삼형제 등과 구별하기 위해 가섭 존자는 특별히 마하를 앞에 붙인 것이다. ‘마하’(摩訶)란 산스크리트어로 ‘크다’는 뜻으로 뛰어나다는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마하 가섭 존자는 무엇이 뛰어났을까. 마하 가섭 존자는 두타제일, 즉 수행이 으뜸인 제자였다. 가섭 존자가 두타제일로 불릴만큼 수행에 매진하게 된 것은 10년을 넘게 기다린 늦은 출가와 부처님과의 필연적인 만남 때문이다.

인도 왕사성 부근 마가다국 마하띳타(Maha-tittha) 마을에는 핍팔리라는 청년이 살았다. 60개의 호수를 가지고 있을 만큼 부유한 바라문 가문의 장남이지만 핍팔리는 마을 여느 청년들과는 달랐다.

핍팔리는 여느 때처럼 밭에서 조용히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쟁기로 파 놓은 흙더미와 햇살이 따뜻한 날의 오후였다. 이런 햇살 때문일까 쟁기질한 틈으로 한 마리의 작은 벌레가 땅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래 너도 햇빛을 즐기는 하나의 생명이구나”

그때였다. 한 마리 작은 새가 벌레를 채갔다.‘내가 쟁기질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 벌레는 죽지 않았을텐데…’

핍팔리는, 순간 자신이 간접적으로 살생의 죄를 범했음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출가의 결심을 굳힌다.

출가의 마음때문일까. 성장하면서 핍팔리는 독신을 고수한다. 나이 많은 부모는 집안의 대가 끊어질 것을 염려해 결혼을 권했지만 그는 독신을 고집했다.

그러나 효심이 깊었던 그는 부모의 간청을 쉽게 물리지 못했다.

“아버님, 이렇게 생긴 여인이라면 결혼하겠습니다.”

핍팔리는 고심 끝에 아름다운 금빛 여인상을 만들어 보이며 이와 똑같이 생긴 여인이 있으면 결혼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조각품과 똑같이 생긴 여인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행운인지 불행인지, 꼭 닮은 여성이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 조각과 똑같이 생긴 여인을 마침내 데려온다. 전국에 사람을 보내어 수소문 하던 중 싸갈라 지역에서 조각과 흡사하게 닮은 처녀를 찾아낸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받다 까삘라니, 훗날 부처님께서 인정한 비구니 십대제자의 한사람이다.

드디어 첫날밤이었다. 핍팔리는 출가의 마음을 부인에게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없소. 지금은 부모님을 모시느라 결혼했지만 구도의 길을 걸을 것이요.”

“저도 자유로운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 했어요. 비록 부모님의 강압에 못이겨 결혼한 겁니다.”

아내인 까삘라니도 역시 결혼 이전부터 출가할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핍팔리는 20세였고 까삘라니는 16세의 한창의 나이이지만 이들은 서로 순결을 지킨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심중을 다 털어 놓으며 결혼을 도리어 다행으로 여겼다. 핍팔리 부부는 서로 출가의 약속을 지닌 채 이렇게 12년을 살았다.

  • 부처님과의 필연적인 만남

핍팔리가 32세가 되던 해 양친이 돌아가시자마자 그는 출가의 길을 떠나기로 한다. 12년간 함께 청정한 삶을 유지했던 부인 까삘라니와 함께였다.

그들은 함께 서로의 머리를 잘라 주고 발우를 들고 집을 떠나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먼 곳에서나마 당시 부처님의 이름을 들어왔던 터였다. 그들은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로 향했다.

“당신은 왼쪽 길로 가시오. 나는 오른쪽 길로 가겠소.”

둘은 같은 길을 갔지만, 남녀가 함께 같은 곳에 있는 것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갈림길에서 까삘라니는 왼쪽으로 핍팔리는 오른쪽 길로 헤어진다. 왼쪽으로 간 까삘라니는 죽림정사 근처 띳띠야마나 지역에서 수행에 전심했다. 오른쪽 길로 든 핍팔리는 마침내 부처님을 만난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상윳따니까야〉 가사경에서 존자가 부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화를 전한다. 여기서 가섭 존자는 직접 아난 존자에게 당시 상황을 말한다.

“나는 출가해 대로를 따라 걷다 라자가하와 날란다 사이에 있는 바후뿟따 탑묘[多子塔]에 앉아 계신 세존을 뵈었소. 그분을 뵙자 내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소. ‘내가 스승을 뵙게 된다면 그분은 바로 지금 내가 뵙는 바로 이분 세존일 것이다.’”

“도반이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가섭이여, 마음으로 모든 것을 구족한 그대와 같은 제자에게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안다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나는 본다고 말하는 자는 그의 머리가 떨어질 것이다. 가섭이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나는 장로들과 신참들과 중진들에 대해 강한 양심과 수치심을 느낄 수 있도록 수행에 정진하라.’ 도반이여, 나는 칠일동안은 빚진 사람으로 백성들이 주는 공양을 먹었지만 팔 일째에 구경의 지혜가 생겼소.”

부처님은 핍빨리의 출가를 알고 기다리고 계셨다. 가섭이 장자로서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 함과 그 과정에서 보시행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터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는 스승을 만난 8일 후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이 되었다. 가섭이 부처님 입적 이후 교단을 통솔해 나갈 암시적 사건도 여기서 일어난다.

역시 〈쌍윳따니까야〉 가사경에서는 마하 가섭 존자가 아난 존자에게 말한 내용이 이어 전해진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내리고 나무 아래에서 다시금 선정에 들때였다. 부처님이 앉으려는 자리에 입고 있던 옷을 접어 자리를 만든 가섭에게 부처님은 말했다.

“가섭이여, 그대가 입고 있는 가사는 부드럽구나.”

“세존이시여, 저의 가사를 받아주소서.”

“가섭이여, 그러면 그대는 나의 분소의를 받겠는가?”

가섭은 부처님의 의발을 받는다.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뒤늦은 출가에도 가섭 존자는 철저한 수행정신으로 부처님과 마음이 통했다. 부처님께서는 그 옷의 촉감이 매우 부드럽다고 칭찬했지만 존자는 자신이 부처님보다 훌륭한 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 것, 또 수행자가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이다. 부처님은 존자의 그런 마음을 알고 분소의를 건넨 것이다.

이후 마하 가섭 존자가 어떤 수행의 길을 걸었는지는 존자의 행화를 모은 〈쌍윳따니까야〉 쌍윳따까싸빠를 통해 자세히 전해진다. 부처님보다 20년 연상으로 알려진 가섭 존자는 부처님 입적 당시인 100세 이후 세수 120까지 교단의 가장 큰 어른으로 불법을 이어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왕사성에서 제1차 경전 결집을 주도하였으며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을 때 여러 나라들이 사리를 두고 다툼을 벌이자 이를 중재해 전쟁을 방지하기도 했다. 마하 가섭 존자의 수행에 관련된 이야기로는 이심전심의 염화미소, 반분좌, 곽씨쌍부 일화가 〈아함경〉 등에 전해지고 있다.

  • 마하 가섭은

(그림은 조향숙 화백의 석굴암 마하가섭 판화)
부처님 10대 제자 중 두타행이 제일 뛰어나 두타제일(頭陀第一)로 칭송된다. 산스트리트어로 까사빠, 가섭이라고 음역된다. 원래 이름은 핍팔리로 마가다 국 왕사성 인근 마하띳타 마을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났다.농경제에서 약육강식과 생사의 길을 보고 출가에 뜻을 품는다.

32세의 나이에 출가하니 부처님께서 자리를 내어줄 정도로 수행에 매진했다. 부처님보다 20년 연상으로 알려진 가섭 존자는 부처님 입적 당시인 100세 이후 세수 120까지 교단의 가장 큰 어른으로 왕사성에서 제1차 경전 결집을 주도하였으며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을 때 여러 나라들이 사리를 두고 다툼을 벌이자 이를 중재해 전쟁을 방지하기도 했다.

그 근본 힘은 부처님 생전에도 마하 가섭 존자가 홀로 유행을 다니며 수행에 매진했던 것에 기인한다. 가섭 존자는 수행자로서 승단의 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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