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든 안되든 일단 맡겼으면 그냥 던져두세요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여러분의 차원을 셋으로 나눈다고 합시다. 하나는 나를 지금 간곡히 관(觀)하고 들어가는 사람, 관하고 들어가서 나를 탄생시킨 사람, 그 다음에 탄생을 시켜 가지고 이제 점차적으로 점수(漸修)로 들어간 사람, 이렇게 세 단계가 있다 하면, 그 첫 단계에 있는 모든 분은 윗단계에 대해서 말한 것을 그냥 따라서 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항상 자기 집을 지으려면 바로 주춧돌부터 아주 완전하게 해 놓아야 되니까요. 위성이 지구를 벗어나서 그렇게 돌듯이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지금 마음이 우리 몸뚱이 안에서 벗어나야 지구 안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공기가 없는 대기권 바깥으로 다닐 수 있는 건 마음뿐이에요. 물체는 공기가 없으면은 죽지만, 물체가 아닌 마음은 이 우주 삼세를 다 한 찰나에 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손색이 없어요. 그러나 그뿐 아니에요. 전체를 갖다 놓고 보는 것이, 공 하나 갖다가 이렇게 놓고선 요리 보고 조리 보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부처님께서는 도가 아니라고 그랬으니 무슨 까닭인가 이거예요. 전체를 요렇게 갖다 놓고 볼 수 있어도 이건 도가 아니니라 했어요. 목마를 때 물 한 모금 주는 것만 못하다 이 소리죠. 보는 것이 무슨 도겠습니까마는 우리가 저 위성을 만들려면 일 단계, 이 단계 겉껍데기를 만드는 것과 같이 그게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지, 오신통이니 뭐니, 이것도 종합해서 하는 거지, 모두가 혼자 하는 거는 없으니까요. 보는 거, 듣는 거, 상대를 아는 거, 또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아는 거, 또 내가 가고 옴이 없이 이렇게 가고 오고 보고 이러는 것이 종합돼야 한 몸이라고 할 수 있죠, 한 몸. 정상인.

그렇듯이 그 정상인 하나를 정상인답게 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지구 바깥을 벗어나서 돌거니와 아니, 다른 행성에 가서도 돌고, 다른 행성이 만약 우리 지구에 어떠한 문제를 일으킨다 하면 바로 그 속으로 들어가서 둘이 아니게 만들고, 이렇게 하는 거죠. 이것은 평등공법이라고 할 수밖엔 없겠죠? 그런데 평등공법이면서도 중용이라고 이렇게 말하죠. 그것은 여러 가지로 이름이 주어지지만, 하여튼 모두 그 안에, 보고 듣고 하는 그 안에 진짜는 들어 있으니까요. 보고 들었으면 주어라. 보고 들었으면 결정을 지어라. 보고 들었으면 그냥 물러나는 게 아니라 그냥 잘못되고 잘되고가 알아진다. 이건 ‘수습을 해라’ 하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길을 지나가다가도 말해 줄 사람한텐 말해 주고, 그냥 건져 줄 사람은 건져 주고, 예전에는 양을 많이 잡아서 바쳤답니다. 양을 바치려고 짊어지고 갈 때는 양을 건져 주고, 소가 죽을 때는 소를 건지고, 이렇게 해서 부처님 그 눈에 걸렸다 하면 그건 인도환생이 되는 거니까요.

여러분 중에 ‘더운데 시원한 데로 놀러가지, 왜 내가 거기 가서 끼어 앉았어?’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앉아 계시는 분들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건 왜냐하면요, 내가 지내 보니까,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또는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누가 주면 주는 대로, 끌어다가 먹지도 않고 나한테 온 거 박차서 내버리지도 않는다는 얘기죠. 모든 점에 있어서 순리적으로, 일체를 합류화해서 항상 모두를 내 스승으로 보고, 내 아픔으로 보고, 내 몸뚱이로 본다면 그게 잘못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수없이 몸을 변하게 만들어 가지고서는 키가 모자라서 못 먹을 때는 키를 키우고, 다리가 모자랄 때는 다리를 키우고, 배가 좁을 때는 배를 크게 해서 자기 소관대로 자유스럽게 몸뚱이를 만들어서 사는데요, 그거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진화력이라는 게 그렇게 이 한생각으로 진화가 된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이 공부하시는 분들은 이 몸 자체도 개선할 수 있고 잘못된 것을 바꿀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나를 믿는 것 말입니다. 믿는 것은 아픈 것을 나을 양으로 믿는 것도 아니요, 죽을 걸 살 양으로 믿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업보를 제거하려고 믿는 것도 아니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그대로 자기를 믿으라는 거죠. 자기 시자는 자기 주인을 믿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아버지가 나쁘든 좋든 아버지이듯이, 어머니가 못났든 잘났든 하여간에, 못 배웠든 병신이든 내 어머니이듯 그냥 무조건, 무조건 믿는 그 속에서,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거는 다 대치가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믿지는 않고 이름만 부르면서 요거 한 가지만 해결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면은 그건 참 더디죠. 앞에 닥친 거를 어쩌겠습니까? 그러니 진짜로 믿고 ‘너 아니면 해결 못한다.’ 하고선 마음을 조급하게 두지 말아야죠. 안되든 되든 일단 맡겼으면 ‘난 죄가 없어, 일단 맡겼으니까.’ 하고 그냥 던져두는 거죠.

어떤 스님이 삿갓을 쓰고 주장자를 짚고선 물을 건너가는데 아, 어느 마을에 불이 나서 그냥 막 타오르고 아우성을 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몸뚱이가 뛰는 게 없이 주장자를 물에다가 척 치니까, 그 물이 구름으로 화(化)해서 전부 비로 내리더랍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니 불이 그냥 단번에 꺼지더랍니다. 그쯤은 돼야죠. 허허허….

그러니 몸뚱이가 아무리 뛰어 봤자 벼룩입니다. 저 허공에서 비행기가 잘못돼서 죽는다고 해 보세요. 몸뚱이가 아무리 뛴다 하더라도 그거를 해결할 수가 있나요? 예전에 그런 예가 있었죠. 어느 스님이 가만히 보니 비행기 조종사가 몸이 불편해서 술 한 잔을 마셨는데 위험하게 된 거예요. 그 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죽겠거든요. 그래서 그 조종사 속으로 들어갔어요. 조종사 속으로 들어가서는 “에이, 이 새끼야, 정신 차려!” 그러고는 콱 찔렀단 말입니다. 그래서 정신 차려 보니까 이거 야단났거든요. 그래, 그냥수습을 한 거죠, 그냥. 비틀비틀 하면서 수습을 해 가지고 괜찮았답니다. 그런 예도 있어요.

그냥 종교 삼아, 남들도 절에 다니니까 나도 다녀보자 이러고 그냥 나오는 분들 많으시죠?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겠죠.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전화를 필수적으로 쓰듯이, 밥먹는 거를 필수적으로 먹듯이,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내가 살고 있으니까 모든 게 내 탓이고 남의 탓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내가 있는 자리에 부처가 있고, 내가 변소간엘 가든지, 똥둑간엘 가든지, 허허허…, 똥 재어 놓는 데 있죠? 그런 델 가든지, 내가 있는 자리에 부처는 있는 것이지 깨끗한 데를 찾아서 부처님이 계신 게 아닙니다. 질문하실 거 있으면 질문하세요.

질문자1(남): 질문을 이렇게 하게 해 주셔서 우선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마음을 관하는 방법에 관하여 질문을 좀 드리려고 그러는데요. 빨리 부처가 되고 싶은 열망은 간절합니다만 그것도 욕심인지라,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마음을 관하는 방편을 찾는데, 예를 들자면 옴 진동수라든지 또는 냉수, 온수를 번갈아 가면서 하는 냉온욕이라든지 그런 걸로 몸 안에 있는 나쁜 거를 제거시킨 다음에 하면, 깨달음의 길을 가는 마음 관하는 방법이 육체가 단련됨으로 인해서 더 도움이 되는지요? 진동수나 냉온욕이나 이런 게 도움이 되는지요? 그게 궁금합니다.

큰스님: 그것은 믿는 것이 진짜로 얼마나 거기에 통신이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진짜로 그 나오는 구멍에 들어갔는지. 그래서 거기에 통신이 되면은 한 찰나에 대뇌로 갑니다. 대뇌로 가서 소뇌를 거쳐서, 아주 찰나죠, 중뇌에서 책정을 합니다. 사대(四大)로 통신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의해서 모든 거를 제거할 건 제거하고 수습할 건 수습하죠. 그러니까 그게 가능하죠, 모두가. 가능한데 말입니다, 그거는 내가 진짜로 믿고, 내가 되는 데서 가능한 겁니다. 부처는 이름입니다. 여기 부처 아닌 사람이 어딨습니까? 다 부처님이지. 그 부처님 속에 부처 아닌 부처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 믿으라는 게 아니고 그대로 그대로 그 부처가, 부처 아닌 부처가 그대로 있으니, 본래 있으니 그거를 진짜로 믿어라. 콩씨를 하나 심어서 콩싹이 났걸랑은 그 콩싹은 제 뿌리를 진짜로 믿어라. 믿어서 콩싹이 왕성하게 되면 자기 종자를 다시 얻느니라, 이런 거죠. 그래서 그 종자를 다시 얻을 때에는 한 종자가 수만 개로도 되고, 그랬을 때 수만 개의 종자를 다 먹이고도 한 종자는 되남더라 이 소립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이 저런 것도 다 가능합니다.

질문자1(남): 그러면은 진동수를 마시면서 마음을 관해도 된다는 말씀이네요?

큰스님: 왜 하필이면 진동수를 마시면서 관합니까?

질문자1(남): 마음은 천차만별이 돼 가지고 마음 하나 관하기는 힘들겠고 그래서 몸이 우선 건강해야 마음을 관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하나의 방편….

큰스님: 마음이 편안해야 몸이 건강하죠.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편안한 게 아닙니다.

질문자1(남): 네.

큰스님: 아까 얘기했죠. ‘잘되려고 하지도 말고 못되려고 하지도 말고 닥치는 대로 마음에다 맡겨라. 이왕 맡겼으면 심부름꾼은, 즉 말하자면은 하인은 주인이 하는 대로 따라갈 뿐이지 그냥 뭐 잘못됐느냐 잘됐느냐 따지지 말아라. 왜 주인도 따지지 않는데 하인이 따지느냐. 그러면 종 문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거죠.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 이치를 아시겠습니까?

질문자1(남): 예. 완전히는 몰라도 대충 알겠습니다.

큰스님: 하하하…. 그러니까요. 하여튼 그렇게만 맡기세요, 그렇게만. 옛날에는 주인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다 했지 조금도 거역한 예가 없지요.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큰스님: 아주 자기 자식까지도 전부 종이 되는 거죠. 전부 종이 되는 거지, 거기에 뭐 빠지는 게 없죠. 그러니까 종 문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종이면 종답게 살아야지, 주인 노릇을 하지 말아라 이거죠. 주인 일에 참견하다가 외려 종이 죽어 버리면 주인도 찾지 못하고….

질문자2(남): 저는 본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여름철에 살다 보면 집안에 각종 벌레, 해충들이 많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저희가 죽어 있는 것을 먹거나 버릴 때는 뭐 ‘한마음!’ 하면서 할 수 있겠는데, 살아 있는 놈을 귀찮다고 또 ‘한마음!’ 하면서 죽일 수도 없고 그래서 공부와 관련해서 한 말씀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큰스님: 살아 있는 걸 죽인다 할 때 그거는 죽이는 사람의 차원에 따라 다릅니다. 지금 갓 배우는 사람한테는 ‘살생하지 마라’ 이럽니다. 그러나 다 배운 사람 앞에는 ‘무조건 먹어치워라’ 이럽니다. 하하하….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그거는 왜냐? 그 모습으로 산다면 얼마나 고생이 되는 줄 아십니까? 만약에 다 깨친 어떠한 스님이, 부처님께서…, 스님이 부처고 부처가 스님이니까요, 만약에 수많은 벌레들을 다 죽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거 살생이라고 보겠습니까? 죽여도 건진 거고 살려도 건진 거고, 줘도 건진 거고 안 줘도 건진 거고, 그냥 건져져요, 그냥.

 

잘되려고 하지도 말고 못되려고 하지도 말고
닥치는 대로 마음에다 맡기세요.
이왕 맡겼으면 심부름꾼은, 즉 말하자면은 하인은
주인이 하는 대로 따라갈 뿐이지
그냥 뭐 잘못됐느냐 잘됐느냐 따지면 안 됩니다.
주인도 따지지 않는데 왜 하인이 따집니까.
그러면 종 문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질문자2(남): 지금 장기 이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눈을 이식한다든지 여러 가지를 하고 있는데, 그때 아까 그 다섯 가지 문제가 같이 들어오거나 나가지 않을까, 그래서 그것을 해도 괜찮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요?
큰스님: 그거야 선과에 들어가는 거니까요, 선심이니까. 즉 그걸 받는 사람이 항시 고맙게 생각하고, 눈을 줬든지 간을 줬든지 그 준 사람을 둘로 보지 않고 자기로 봐야죠. 자기로만 볼 수 있다면 되지만 둘로 본다면 또 그게 인과가 되죠.

질문자2(남): 다음에는 정진에 대해서 좀 여쭙겠습니다. 전에 스님께서 저녁 때 잠들기 전에 하루를 되돌아보고 반성을 하고 자야 된다고 그러셨습니다. 우리가 한 시간을 제대로 살면 하루를 제대로 살게 되겠는데 그러면 그때부터 반성하고 잠들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를 어떻게,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우리 공부에 관련해서 정진이 되겠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그냥 생활선법(生活禪法)이 아닐까요? 그냥 우리가 생활하면서 하되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모든 것을 그냥 내 주인이 그렇게 시키고 있고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 주인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해라. 이런 것이 참선입니다, 그냥.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런데 그게 두 가지 여건에서 세 가지 단계로 내가 얘기한 겁니다. 왜냐하면은 나를 발견을 못했으면 진짜 공부를 못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면 저녁에 남이 다 자고 조용한 틈을 타서 한 30분이라도 앉아서 ‘이놈아, 네가 너 있다는 증명을 할 수 있는 거지 누가 증명을 해 주느냐?’ 이거죠. ‘당신이 있다는 것을 당신만이 증명을 해 줄 수 있는 거지 누가 증명해 주느냐?’ 이거야. 그것이 똑바로, 직속 들어가는 관법이거든요. 그게 바로 좌선도 되지만 그게 관법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 못했을 때 지극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죠. 그리고 살림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에 한해선 특히 더하고, 스님네들도 역시 그렇구요. 우리가 이 도리를 발견하려면요, 첫째는 다섯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것이 다 거기서 나오고 빚어지는 거거든요. 뭐, 관습이라든가 습성이라든가 이런 것도 한번 굴려서 놓아야 떨어지죠. 거기에서 예전에 살던 그 습성이 나오면, 그냥 나오는 대로 생각하게 돼 있거든요. 나오는 대로 말하고 나오는 대로 하거든요. 그걸 한번 굴리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 습성이 다 떨어지지 못하면 인정을 못해요. 하늘에서, 한울 중심에서 인정을 못한단 말입니다. 열쇠를 받지 못해요. 그걸 해인(海印)이라고도 하고 그러지만요.
그러니까 그 다섯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내가 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통 속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모든 인과의 습성, 인연들과 살던 그 습성을 그대로 그렇게 반영하고 자꾸 그대로 하지 말고 한번 굴려서 놓되, 그 마음이 분기해서 탁 나오더라도 안으로 상대방을 생각해라 이거야. 내 생각을 하지 말고, 언제나 내 생각으로써 나의 기준으로써 잣대를 삼지 말고, 한번 내가 상대방으로 들어가서 상대방이 돼 봐라 이거죠. 그러면 그 습성이 차차차차 없어지죠. 그리고 둥글어지고 둘로 보지 않게 되고, 그래야 빨리 그 몸통 안에서 벗어날 수 있죠. 몸통을 그냥 통이라고 하죠.

질문자2(남):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제가 조그맣게 일을 하고 있는데 하다 보면 어떤 땐 일감이 좀 적게 들어오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점심을 안 먹고 ‘저 일감 가지고는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밥을 먹을 수 없으니까 너희들이 나가서 더 벌어들여 오든지 일을 더 많게 하든지 하라.’ 그러고서 어떤 땐 굶어 버립니다. 그랬을 때에 그것이 공부와 관련해서 내면과의 대화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큰스님: 만약에 내가 당신이라면 이렇게 하겠어요. ‘점심을 먹게 하는 것도 너고, 먹지 못하게 하는 것도 너니까 알아서 해.’ 그게 배우는 과정에서 톡톡한 맛이 나는 도리죠. 그러니까 그렇게 하고 만약에 그렇게 안됐으면 ‘어, 굶어라 이런 거로구나!’ 그러고 굶고 또, 먹게 되면은 ‘어, 먹게 했구나, 감사하다!’ 하고 먹고, 이렇게 하다 보면은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안되고 되고 되고 안되고, 이것이 나중에는 그냥 막 돌아가 버려요. 그렇게 한참 돌아가야 이게 뭐가 되는 거지 그게…, 허허허….

질문자2(남): 감사합니다.

큰스님: 하여튼 내가 짐작하건대는, 이렇게 공부하시는 분들이 지극히 하시기 때문에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물론 고기들이 바다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인간도 공기주머니에서 절대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뱅뱅 돌면서, 죽어도 또 거기, 죽어도 또 거기, 이걸로 저걸로 모습을 달리 해 가지고 나오면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살아서 내 몸뚱이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어도 벗어나지 못해요. 그러니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그냥 ‘네놈이 알아서 해. 난 너의 심부름이나 할 거야.’ 하고 그냥 콱! 말입니다. 하하하….
(합창단의 음성 공양 후 대중이 삼배를 올리자 가슴을 짚어 보이시며) 여기다 하세요. 인간의 몸뚱이는 전부 고깃덩어리예요. 그러니까 진짜로 여러분의 주인한테다가 삼배 올리시고 정리하시고 그러세요.
[899호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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