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부산 화엄사 회주 각성 스님

도심 사찰의 일주문은 마치 성(聖)과 속(俗)을 나누는 경계면 같다. 서울 종로 한 복판에 우둑히 서 있는 조계사 일주문은 더욱 그렇다. 그 경계 앞에서 <화엄경> 강론의 대강백으로 알려진 부산 화엄사 주지 각성 스님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대강백이라는 기대와 선입견이 앞서일까. 설레면서도 초조했다. “무슨 말을,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수백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전 9시, 약속 시간에 맞춰 각성 스님이 도착했다. 단촐했다. 이제는 흔하디 흔한 자가용을 타지도 않았고, 시봉하는 시자도 없었다. 먹물 옷 하나에 강의 자료가 든 큰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먼저 알아본 스님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십니다.”

인사를 건네는 눈은 빛났고,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함께 조계사 경내를 걸을 때에는 힘이 넘쳤다. 올곧은 교학자의 풍모는 스님의 모든 행동과 말에서 자연스레 묻어났다.

아직도 나는 현역입니다
옮긴 자리, 먼저 “시봉하는 시자가 없으시냐”는 속인의 질문을 던졌다. 스님의 대답은 분명했다.
“없어요. 그런 게 모두 돈이고 경비입니다. 부처님 시주 돈, 허투루 쓸 수 있습니까. 아직은 필요없어요.”

염려의 질문이 무색할 만큼 쩌렁쩌렁한 답변이다. 스님의 세수는 올해 75세. 스님은 아직도 부산과 서울 오가며 학인 스님과 불자들을 제접한다. 매월 1, 3주 월요일 오후 7시에는 종로 5가에 있는 보명선원에서 <대도직지> 강의를, 화요일 오후 2시에는 동국대 학명 세미나실에서 학인들을 대상으로 <열반경>을 강의한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열반경>강의는 현재 9권까지 진행됐으며, 앞으로 36권을 더 강독해야 한다. 젊은 사람에게도 녹녹치 않은 강의 일정이다.

“몸은 많이 고되고 힘들지요. 그래도 요청이 들어왔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니까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열반경>강의을 마치면 이제 책임을 좀 벗어나려고 합니다.”

‘空手來空手去’ 무엇이 아까운가
최근 각성 스님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전남 장성의 본인 생가와 인근 부지 6611.57m²를 매입해 ‘수선사(修禪寺)’라는 사찰을 창건함과 동시에 모든 소유권 일체를 조계종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사찰 불사 비용도 스님의 강의, 법문, 출판 등으로 모은 사재를 전부 보시해 이뤄졌다. 지난 7월 14일에는 소속 교구본사인 제16교구본사 고운사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수선사 창건 법회를 성대히 봉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평생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장성 자신의 생가에 사찰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스님은 불교 불모지인 장성에 사찰이 꼭 하나 있었으면 했다고 말했다. 장성은 스님의 고조부터 아버지까지 4대가 살았던 곳이다.

“수선사 인근은 제 고조부부터 아버지까지 삶을 일궈 오신 곳입니다. 이곳에 사찰을 세운 것은 지역 불교 발전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장성에는 여법한 사찰이 거의 없습니다. 50리 밖에 백양사가 하나 있습니다. 원효 스님도 자장 율사도 자신의 생가를 절로 만들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왕릉에는 능침사찰이 있었구요. 저 같은 서민들도 생가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고향에, 자신의 사재를 보시해 만들어진 사찰이지만, 스님은 운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계획이다. 아무런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이미 종단의 공찰로 등록한 상황에서 자신이 참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서다. 지금 주석처인 화엄사도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모두 종단에 전부 증여할 계획이다.

“승려 개인이 사찰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종단 공찰로 운영하는 게 삼보정재를 지킬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종도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인간은 모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갑니다. 크게 보면 우주만유가 모두 내 것이고, 작게 보면 내 것이 없습니다. 어디에 집착심을 갖겠습니까? ”

공자를 놓고 부처님 말씀을 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 안에는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상(像)이 없었다. 딱딱한 이야기였지만, 그 심지는 굵었다.

각성 스님은 출가 전 유학을 공부했다. 스님의 큰아버지, 작은 아버지도 모두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였다. 스님 역시 출가 전 사서삼경을 통독했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고향이 폐허가 되고, 공부할 거처가 없어지자 스님은 백양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 읽은 책에서 율곡 이이 선생이 금강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같이 간 친구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며 절을 떠났다. 스님 역시 친구와 함께 절을 나왔다. 하지만 발걸음은 해인사 백련암으로 행하고 있었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습니다. 출가하며 ‘평생 부처님 말씀을 보겠다’고 발심했지요. 그래도 경전 보다는 참선을 통해 일대사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4.19이후 벌어진 정화운동으로 은해사에서 경전을 가르치는 강주 소임을 봐야했습니다. 도반 스님이 은해사 주지 소임을 맡았는 데 대처승들을 내보기 위해서는 여법한 강원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요. 강주가 공부를 안할 수 없지 않습니까? 자연스럽게 경전을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스님의 노력이 통해서 일까. 은해사 강원에는 50~60명의 학인이 모여 공부를 시작했고, 몇 달 안돼 대처승은 은해사를 떠났다. 이후 각성 스님은 당시 3대 강백이라 불리었던 관응, 탄허, 운허 스님 문하에서 경학을 연찬했다.

탄허 스님이 저술한 <화엄경>, <화엄론>의 교정 작업도 스님이 진행했다. 또, <한글대장경>의 번역과 감수 작업을 10년 가량 했다. 출가 이후 스님은 오롯히 천태, 화엄, 유식부터 소승에서 대승까지 경전 공부에만 평생을 매진해 온 것이다.

부산 화엄사 회주 각성 스님은 매월 1,3주 월요일과 화용일 서울에서 확인과 재가자를 위한 경전 강의를 진행한다. 사진은 동국대에서 진행하는 <열반경>강의 모습.
무명 그 자체가 곧 불성
수많은 경전들을 강독한 각성 스님은 대중에게는 <화엄경>강론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다. 강백이 전하는 <화엄경> 요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망설임없는 답변이 나왔다. ‘범부가 보살이 되고 부처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부처의 세계를 설명한 경전이 <화엄경>이고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을 보면 부처님의 재산과 살림살이를 볼 수 있다는 게 스님의 설명이다.

“십주, 십행, 십지품 등 <화엄경>은 부처가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단계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부처가 될 수 방법은 무엇일까요. 무명이 본래 있는 게 아니라 그 것 자체가 부처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바다 위 거품은 생겼다 사라집니다. 바다는 곧 마음이고, 거품은 번뇌망상입니다. 거품과 파도가 아닌 바다를 아는 게 깨달음입니다. 화엄경은 이런 진리를 우리에게 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가 현각대사는 이 도리를 깨닫고 ‘무명실성즉불성 환황공신즉법신(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이라는 증도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화엄경> 공부가 치열한 현대인의 삶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했다. 경전 공부만이 가지는 혜안이 열린다는 것이다.

“물방울은 약하지만 이를 하나로 모으면 군함도 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다.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을 분리해 있는 게 우리 범부들의 정신 상태입니다. 큰 바다처럼 하나로 정신을 모을 수 있다면 사업이나 공부에서도 무한한 힘이 나올 것입니다. 경전을 공부하는 것도 이렇게 스스로의 자성을 찾는 길입니다.”

“敎와 禪은 둘이 아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선에 치중된 한국불교의 현실로 넘어갔다. 스님은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인 어떻게 따로 놓고 생각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경전을 공부하지 않고는 현대인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 ‘방하교의 참상선지(放下敎義 參詳禪旨)’라 했습니다. ‘교를 잠시 내려놓고 선의 종지를 구하라’는 뜻인데, 교가 필요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되겠습니까? 역대 조사들의 말씀들도 모두 경전에서 비롯됐습니다. 탄허 스님은 경학을 풍시하는 종단 현실을 보고 ‘조계종은 무식으로 종지를 삼는다’고 비판했습니다. 현재는 불교대학도 생기고, 스님들 역시 많이 공부하는 편이지만 아쉬운 부분이 많죠.”

그렇다면 수 많은 경전 중 불자들에게 권하는 경전은 무엇이 있을까? 스님은 주저없이 <능엄경>을 꼽았다. 팔만 장경의 요체를 담은 것이 <능엄경>이라는 것이다. ‘소화엄경’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능엄경>은 그 내용이 방대하거니와 난해하기도 하지만, 한국불교 신행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각성 스님 역시 10권 분량의 <능엄경> 정해본을 저술하기도 했다.

“<능엄경>은 인도 이외에 나라에는 전하지 말라는 당시 왕명이 있었을 정도로 소중한 경전입니다. 인도 나란다 대학에서 비장(?藏)돼 있었죠. 그것이 어렵게 후대에 전해졌습니다. <능엄경>은 깨달음의 본성이 무엇이고, 그 과정이 어떻게 되며, 세간의 만법이 모두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정토 신앙을 설한 <아미타경>도 좋은 경전입니다. 선으로 견성성불을 하면 더욱 좋겠지만, 말세 중생에게는 염불이 극락정토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부처님을 만나는 수행법 ‘염불’
의외였다. 경학의 강백이 대중들의 수행법으로 염불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염불은 대중적이지만 한국불교 내에서 위치는 미약하다. 하지만 스님은 이는 잘못된 인식이라고 강조한다. 염불수행법은 <정토삼부경>, <무량수경>, <대집경>부터 <대승기신론>, <화엄경>까지 다양한 경전에 명시돼 있으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투셔서 상·중·하 근기의 모든 중생에게 고루 설법할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수행법이라는 것이다.

“<화엄경> 십지품의 십지보살도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수행이 염불입니다. 염불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법이지, 하근기의 사람들이나 하는 낮은 수행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염불은 예로부터 진여자성을 여의지 않는 자성선(自性禪)이라고도 하고, 또한 모든 삼매(三昧)의 왕이라 하여 보왕삼매(寶王三昧)라고도 했습니다.”

이어 스님은 불자들을 위한 염불 수행법도 소개했다.
“<관무량수경> 16가지로 극락세계를 눈으로 보듯이 관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지요. 일반 범부들에게 가장 빠르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을 명호하는 지명염불입니다. 화두는 의심이 안나면 번뇌망상이 끊이지 않습니다. 염불 수행은 지극한 마음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명호를 소리 내 부르면 더욱 좋습니다. 늘 부처님을 떠올리는 마음, 그것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래서인가 스님의 마지막 서원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염불선원을 개원하는 것이다. 장성 수선사에 들어간 사재는 원래 염불선원 불사을 위해 모았던 재화였다. 하지만 스님이 생각하는 규모의 염불선원을 건립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고, 결국 불교 불모지인 고향 장성에 사찰을 짓게 된 것이다.

“염불선원은 내 마지막 원력이자 서원이죠. 종단 차원에서도 여법한 염불수행 전문도량이 하나쯤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제 저도 나이가 있고,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네요. 물론 이생에서는 못다 이룰 꿈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꿈을 꿉니다. 전국 불자들이 한 데 모여 토, 일요일 용맹정진하며 염불삼매에 드는 모습들을.”

이와 함께 스님은 한 가지 서원을 더 이야기 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해지는 것, 분별과 다툼이 없어지는 것이다.

조계사 대웅전의 염불소리와 한 여름 매미 울음이 조화롭다. 스님은 환희 웃었다. 함께 미소가 지어졌다.  

각성 스님은
1938년 전남 장성의 한학자 집안에 태어나 8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사서삼경을 배웠다. 1955년 18세에 선사이자 율사이신 해인사 백련암 도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3세 약관의 나이로 은해사에서 강주로 활동했으며, 관응, 탄허, 운허 스님 문하에서 경학을 연찬했다. 이후 50년 간 수많은 스님과 재가불자들을 대상으로 경전을 강의했다. 저서로는 <능가경>, <수능엄삼매경>, <대도직지>, <유식론 강의> 등 20여 저서가 있다.
현재 부산 화엄사 회주 소임을 맡고 있으며, 일흔이 넘은 세수에도 후진양성을 위한 왕성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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