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있는둘레길-⑥ 북한산 사패능선길 그리고 회룡사, 석굴암
무학대사 손수 관음보살 모시고
개국염원하는 이성계 위해 기도
김구 머물던 석굴암엔 총성과 들꽃이
갈림길이다. 두 개의 이정표 사이에 섰다. 누군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고 했다. 아름다운 길을 남겨두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 길을 가기로 했다. 아름답게 남은 길은 북한산 둘레길의 16구간 ‘보루길’이고, 아름다울 수 있었던 길은 사패능선길이다.
두 개의 길을 놓고 망설인 이유는 회룡사 때문이다. 원래 가려고 했던 길은 보루길이었다. 회룡사에 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현장에 와보니 회룡사는 보루길에 가까이 있을 뿐 보루길로는 갈 수 없었다. 회룡사는 사패능선길에 있었다. 사패능선길은 회룡탐방지원센터에서 사패능선까지 약 2.5km 길이다. ‘둘레길’은 아니지만 절이 있는 길이다. 1km 정도 오르면 회룡사와 회룡사 암자인 석굴암이 있다.
가파른 길이다. 길옆으로는 계곡이다. 가뭄을 견딘 계곡엔 세찬 물줄기가 흘렀다. 물소리가 잦아들고 도량이 나타났다. 회룡사다. 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다. 1977년 봉선사에서 발행한 <봉선사본말사약지>에는 681년(신라 신문왕 1) 의상(625~702) 스님이 창건했으며, 법성사라 불렀다고 창건에 대해 적고 있으나, 다른 기록에서는 그와 일치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어 조선 초 창건설도 무시할 수 없다. 회룡사를 이야기할 때, 무학 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몇 가지 이야기 중 하나다. 1384년 이성계는 무학 대사와 함께 지금의 회룡사 자리에서 개국성취를 위한 기도를 올렸는데, 이성계는 옆 석굴암에서, 무학 대사는 지금의 회룡사 자리에서 각각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라는 직책을 받고, 요동으로 출전하자 스님은 홀로 남아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며 그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돌아와 임금이 돌아왔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1630년(인조 8) 예순 스님이 중건했고, 1881년(고종 18)에는 최성 스님이 중수했다. 1938년 순악 스님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9년 전, 북한산은 시끄러웠다. 최소한 600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회룡사도 편할 수 없었다. 회룡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망루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철마선원에 세워진 망루였다. 그 망루 꼭대기에는 ‘NO TUNNEL’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산을 뚫어 터널을 내느냐 마느냐로 내겠다는 쪽과 내지 말라는 쪽이 대립하고 있을 때였다. 철마선원은 터널을 반대하는 스님들이 세운 선원이었다. 결국 망루는 스러지고 터널은 뚫렸다. ‘사패산터널’, 그 터널은 지금 회룡사 옆을 지나간다. 세월만한 약도 없다. 북한산은 이제 시끄럽지 않다. 누구도 ‘북한산’을, ‘터널’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땅 속 4km의 터널 속으로 쉴 새 없이 자동차들이 달릴 뿐이다. 마당 한 켠에서 관세음보살이 북한산을 내려다본다. 스님 두 분이 어딘가 다녀오는 길인 것 같다. 어딜 다녀오시는 걸까. 밀짚모자 위로 구름이 걷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