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동화사 대웅전 소견

지철 스님의 도상圖像을 통해 본 상징과 은유

 

 역사 깊은 지역 전통 사찰

40억원 금괴 사건 ‘화제’

민족의 보물 손상 우려

 

1921년에 찍힌 동화사 대웅전 사진을 보면 지금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쓰여진 대웅전 정면 현판은 그대로였지만, 주련은 지금의 주련이 아니었다. 지금의 주련은 ‘天上天下無如佛(천상천하무여불), 十方世界亦無比(시방세계역무비), 世間所有我盡見(세간소유아진견), 一切無有如佛者(일체무유여불자)’라는 장엄염불의 한 편이다.

그러나 예전 주련은 흰 바탕에 대자로 쓰여진, ‘마하대법왕(摩訶大法王) 거룩하고 위대하신 법왕이여!, 무단역무장(無短亦無長)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으며, 본래비조백(本來非?白) 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지만,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 인연 따라 붉고 푸르게 나타나네’이다.

이 주련의 내용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이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금강경을 중국 당대의 다섯 분의 큰스님들이 주해한 논장이다. 읽을수록 깨달음의 본바탕인 이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깊어지는 구절들이다.

현재의 대웅전은 1732년(영조 8년)에 중창불사한 것이다. 초창(初創)연대는 알 수 없고, 대웅전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좌정(坐定)하고 계시다. 동화사라는 꽃이름을 가진 사찰답게 대웅전의 문들은 전부 정교하게 조각된 꽃살문들이다.

동화사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極達)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였고 그 뒤 832년(흥덕왕 7년) 심지(心地)왕사가 중창하였는데, 그 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해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진표(眞表)율사로부터 영심(永深)스님에게 전하였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가 다시 받은 뒤, 이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참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제41대 흥덕왕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심지는 중악(中岳:팔공산)에서 수도하던 중, 속리산 길상사(吉祥寺)에서 영심이 그의 스승 진표로부터 계법(戒法)을 전해받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러나 때가 늦어 당(堂)에 올라가서 참례할 수 없었으므로 땅에 엎드려서 참례하였다. 법회 7일 만에 진눈깨비가 심하게 내렸는데 심지의 둘레 10자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당으로 안내하였다 한다.

그건 그렇고, 얼마 전부터 이상한 친구 하나가 북한에서 내려와 동화사 대웅전을 국민적인 관심사로 만들어 놓았다. 대웅전 뒤편에 묻혀있을 수도 있는 40억원에 상당하는 금괴를 찾기 위해 언론을 들쑤셔 놓고, 문화재청에 발굴 허가를 신청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문화재청이 금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 6월 21일 대구 동화사 뒤뜰 굴착을 허가했다. 문화재청은 김모 씨가 금괴의 굴착을 위해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신청한 사항에 대해 건축문화재분과 문화재위원회에서 조건부로 가결했다고 밝혔다.

진정한 보물은 사실 이 마음이다. 이 마음을 한 번 보아 세세생생(世世生生) 묵은 빚을 갚고 나면 무진장(無盡藏)한 보배를 마음대로 쓰고 온갖 중생에게 나누어 주어도 화수분처럼 무궁무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법이다.

금괴를 찾으러 탈북했다는 김씨가 금괴만 찾아 헤멜 것이 아니라 절에 와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마음밭을 갈아 진정한 보물을 찾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행여 민족의 보물인 대웅전이 금괴 찾기 공사로 인해서 손상이 가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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