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수행 도량 순례-⑤ 양산 통도사 백련암

▲ 성철 스님이 통도사 백련암에 머무르던 시절, 통도사는 1900년 경허 스님이 직접 통도사로 와서 선풍을 떨치던 때였다. 순례단원은 백련암에서 참배를 마치고 스님이 머물던 요사채를 둘러보는 등 향취를 느꼈다.

백련문화재단과 불교인재원이 주최하는 ‘성철 스님 수행도량 순례단’이 7월 21일 다섯 번째 순례로 경남 양산 통도사를 찾았다.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袈裟),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函)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됐다. 불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통도사 일주문 영축산 통도사(靈鷲山 通度寺)라고 쓴 현판 좌우에는 불지종가 국지대찰(佛之宗家 國之大刹)이라는 주련이 걸려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해서 ‘불지종가’, 나라의 으뜸가는 절이므로 ‘국지대찰’이라고 한다.

성철 스님은 1937년 3월 부산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은 뒤 그해와 이듬해 동안거를 통도사 백련암에서 보냈다. 이 무렵까지도 어머니가 철마다 옷가지와 음식 등을 마련해 찾아왔으나 계속 물리쳤다고 한다.

새벽부터 서울, 대구, 부산 각지에서 버스로 달려온 순례단 340여 명은 점심공양 후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을 참배한 뒤 통도사 설법전에 앉았다.

통도사 주지 원산 스님(前조계종 초대 교육원장)은 축원문을 독송한 뒤 환영사를 남겼다. 스님은 “성철 큰스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스님이 그동안 수행했던 처소를 순례하면서 스님의 자취를 느낀다는 것은 좋은 발상”이라며 “성철 스님은 1938년도에 통도사 백련암에서 동안거를 지냈다. 그때 당시 스님들은 염불회를 결성해 신도들에게 염불을 권장하고 신행활동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증명법사 원택 스님은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이 둘도 없는 도반사이로 공부를 했다고 전한 뒤, 성철 스님이 1982년 경봉 스님 영전에 올린 추도사를 읊었다.

“영축산 꼭대기에 외로운 달이 밝게 비치니 티끌마다 찰찰마다 빛나고 빛나는도다. 거두고 펼침이 자재로움이여! 천둥 요란하고 번개치도다. 나타나고 사라짐이 뜻과 같음이여! 용은 노래하고 봉황은 춤춘다. 한 번 놀고 한 번 웃음이여! 바다도 잔잔하고 강도 맑다. 혹은 앉고 혹은 누움이여! 옥 구슬 구르고 보배 구슬 구르도다. 허허! 문득 푸르른 소나무 아래에서 길게 휘파람 부니 천문만호(千門萬戶)에 노래 소리 들린다.”

원택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순례단은 성철 스님의 법어를 독송했다.

“사바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원래가 하나요, 더불어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비선악의 분별심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바의 참모습은 수억막 년 동안 비춰주는 해와 같고 티없이 맑은 창공과 같아 청정한 것인데 분별심을 일으키는 마음에서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되고, 그로써 욕심과 고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백도 하나가 되는 융화(融化)의 중도(中道)를 바로 보고 분별의 고집을 버립시다.….” <1993년 음 4월 8일,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초파일법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 중에서 정리 분>

▲ 증명법사 원택 스님은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이 둘도 없는 도반사이로 공부를 했다고 전한 뒤, 성철 스님이 1982년 경봉 스님 영전에 올린 추도사를 읊었다.

법회를 마친 순례단은 경봉 스님 열반 30주기를 맞아 통도사성보박물관에서 개최한 ‘삼소굴’전을 관람한 뒤 성철 스님이 동안거를 지냈다는 백련암으로 향했다.

성철 스님이 통도사 백련암에 머무르던 시절, 통도사는 1900년 경허 스님이 직접 통도사로 와서 선풍을 떨치던 때였다.

백련암의 백련선원은 1935년 개원됐다. 개원당시 석봉 스님과 16명의 스님이 정진했으며 1942년까지 정진은 계속됐다.

통도사 일주문 앞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취운암을 지나 1㎞정도 가면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서운암과 극락암 길의 중간 길로 접어들어 1㎞정도 가면 백련암이 나온다. 백련암이 있는 곳은 현재 성철 스님이 머물었던 요사채를 제외하고는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다.

통도사 주지 원산 스님은 백련암에 대해 설명했다.

백련암은 고려 공민왕 22년(1373년) 월하 대사가 창건하고 조선 인조 12년(1634) 현암대사가 중건했다. 백련암 큰법당을 백련사(白蓮舍)라 현액(縣額)한 것은 부처님 당시 기원정사 죽림정사에 유래하며 한때 백련정사 만일염불회를 개회한 현액이 누각에 걸려 있었는데 통도사 성보박물관으로 내려 보냈다.

큰 법당은 숙종(1707)때 1차 중수를 하고 철종 14년(1863)에 2차 중수 해 354년차 중수를 하고 철종 14년(1863)에 2차 중수해 354년간을 내려오다가 2002년 음력 정월에 해체, 2004년 5월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입주했다. 現통도사 주지 원산 스님이 1975년 부임해 도로, 전화, 전기를 개설했다.

현재건물은 1995년 중창불사를 시작해 큰법당, 광명전, 누각, 요사채 등으로 돼 있다. 이곳에는 역사적으로 선원, 염불당, 강원을 두루 갖춘 곳이다. 환성ㆍ경허ㆍ성철 스님 등이 납자로 수행했다. 만해 스님은 이곳에서 불교대전을 집필했고, 경운 화상은 이곳에서 정진 스님 부친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일자일배(一字一拜)해 금자(金字) 법화경을 쓴 곳이다.

백련암 만일염불회는 당시 명성이 높았다. 수행인의 수도처로서 전통이 빛나는 곳이며, 누구나 이곳에 당도하면 세연을 모두 잊고 적정처에 들어온 느낌이다.

▲ 성철 스님이 1938년 동안거를 보낼때 머물던 요사채 안심당(安心堂)
현재는 영축총림 염불당으로 천일기도를 수십년전부터 계속하고 있고, 매월 음초하루 법회와 지장재일 관음재일 법회 거사법회와 매월 보름에는 인등기도 법회를 하고 있다. 법회일에는 불교입문등 각종경전 교리강좌를 원산 스님이 직접하고 있다.

순례단원은 백련암에서 참배를 마치고 스님이 머물던 요사채를 둘러보며 성철 스님의 향취를 느낀 뒤 각자의 집으로 해산했다. 제6차 순례는 8월 25일 영천 은해사 운부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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