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바깥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세번째 넘어갈 때, 지금 이 과학적으로 본다면 블랙홀이라고 한다지만, 부처님께서는 불바퀴라고 했습니다. 그 불바퀴가 세번째 단계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 통로를 넘지 못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벌써 중생들은 거기를 넘어갈 때 타죽을까봐 뜨거워서 못 들어갑니다. 벌써 내가 물질세계에서의 그 의식이 꽉 차있기 때문에, 내가 몸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나 아닌 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게 통로인데도 뜨거워서 죽을 이유도 없고 뜨거울 이유도 없고, 간다 온다 할 까닭도 없고, 어딜 들어간다 하더라도 들어가는 사이가 없고, 나온다 하더라도 나오는 사이가 없건만, 그대로 여여하게 뚫리고 그대로 여여하건만 몸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간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첫번에 벌써 내 이 몸속에 있는 그 의식들이 전부 모습을 그렇게 해가지고 보이니 그 길을 못 간다는 얘기죠. 그게 딴 데서 와서 보이는 게 아닙니다. 이 몸뚱이가 사대로 흩어지니까 내 몸속에서 그 영혼들이 말입니다. 그 의식들이 그냥 쫙 앞을 가리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러한 것이 딱 보일 때 중심을 잡고서 ‘허, 너와 나와 둘이 아닌데.’ 하고서 딱 한생각을 넘기면 그냥 다 보살로 화하고 부처로 화할 텐데, 이건 한생각을 못 하기 때문에 그냥 넘질 못하죠. 재차 말하지만 빠져죽을까 봐 넘지 못하고, 배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타죽을까 봐 그 불바퀴 속을 못 들어간다 이거야. 그러니 그 도리밖에 없거든. 우리의 이 마음, 내 마음 빼놓고는 부처를 이룰 수가 없고 내 마음 빼놓고는 도저히 앞뒤 뚫린 용문을 열 수가 없어. 본래는 여여하고 열려 있는데 자기 생각이 딱 닫아놓고 있으니까.

그리고 하나서부터 열까지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미운 걸 보면 그렇게 밉고, 잘못하는 걸 보면 그렇게 보기 싫고, 또 부부지간도 그렇고 자식지간도 그렇고 일일이 그거를 미워해, 잘못하는 걸 보면. 그러나 이쁜 일을 조금 할 때는 좋아서 그냥 발발발발 하지. 누가 좋은 말을 해주면 좋고, 속이야 어떻게 됐든지 좋은 말을 야불야불 해주면 아주 좋아하고, 진실로써 “너는 이렇다.” 지적을 해주면 그게 듣기 싫어서 왈칵 화가 나고, ‘너 두고 보자.’ 이러고. 이러는 마음이 자기를 깎아먹게 돼요. 이 세상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있으니깐 모두 내 탓으로 돌리라는 거죠. 그래야만이 내가 공해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요.

불(佛)은 뭐냐? 불바퀴는 왜 불바퀴라고 그랬느냐? 그냥 생명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생명이 바로 영원하기 때문에 불바퀴라고 했습니다. 불이라고 한 것은 여러분의 생명의 근본, 즉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걸 불이라고 했다 이거야. 본래 자성불은 있는 건데, 자기 자성불에서 모든 거를, 나고 드는 것이 전부 그 능력으로 나오는 건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성불은 믿지 않고 저기 계신 딴 부처님을 믿고선 “부처님, 날 좀 잘 되게 해주시오.” 하는데 그건 기복이지 공덕이 아니야. 공덕이라는 건 무엇 때문에 공덕인가. 한마음으로 돌아가야 공덕이 아닌가. 나 아님이 없으니까 내가 하지 않는 일이 없고, 내 아픔 아닌 것이 없고 내 몸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그게 공덕이 안되겠나. 일체제불과 일체 보살, 역대 조사가, 역대 중생이 진드기 하나 버리지 않고 전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래서 그 한마음마저 없다는 사실은 한마음이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부처님께서 한마음을 내실 때에 보살로서 화해서, 법신으로 화하시고 그래서 남이 응해달라는 대로 응해주시는 그 한마음이 돼주시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큰 호랑이가, 큰 소가, 큰 코끼리가 또는 독사라는 이름을 가졌어도, 어떤 사람이 백정 노릇을 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아, 부처님한테 귀의해서 내 마음 가운데 항상 넣고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이면 그대로 한마음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일을 할 적에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어설 때나 앉을 때나, 바로 내 부처가 내 마음속에 있는 한마음의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때, 뭐든지 거기다 놓고 갈 때, 모든 걸 놓고 아주 잔잔하게 한데 한생각을 일으키면 그게 법이 된다 이 소리지. 그렇게 하면은 일체제불이, 일체 보살이, 일체 조사가 다 그냥 한마음으로 들어서, 한 찰나에 드셔서 그 묘법을 가르쳐주시고 한 찰나에 나신다 이거야.

이 묘한 도리를, 이 무심도법(無心道法)을 여러분이 그렇게 갑자기, 도심으로써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터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는 것은 아마 나보다도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알기만 하면 뭘 합니까? 행하는 게 문제죠. 백 가지 천 가지를 안다 하더라도 한 가지 행을 못한다면, 그건 한 가지 행하는 것만도 못합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을 해드렸죠.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해서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있어서 오신통이라는 것도 거기에 귀결돼 있다고요. 우리가 과거에 살던 그 모두를 숙명통이라고 한다면 오신통은 자동 컴퓨터입니다. 자동 컴퓨터. 거기에서 또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것이 바로 심안의 눈입니다. 그래서 그 도리를 잘 알아야 천안통이 생기는데 바로 천체망원경이 거기에 해당됩니다만 물질로 된 거는 심안의 눈으로 보는 걸 따라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천이통이라는 것은 지금 말로 무전 통신력인데 한생각에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를 두루 통신을 하고 가는데 어떻게 감히 물질의 무전통신기가 거길 따라가겠습니까. 인공위성을 띄우고 전파를 통해서 세계를 두루 한다 하더라도 그건 따라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타심통이라 하면은 남의 속을 다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남의 마음만 알고 고것만 가지고 ‘도’냐. 아니죠. 우리가 풀 한 포기, 진드기 하나의 마음도 알아야만 되겠죠. 그래서 서로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고 서로 면담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된다면 그 얼마나 즐겁고 이 세상이 낙원이겠습니까. 그런데 그거를 비유해서 탐지기라 할 수도 있죠. 인간의 마음이 들어가서 물질로 나오긴 했지만 아니, 내 타심통을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그리고 신족통 하면 지금의 팩시밀리로 비유해도 되죠. 내 마음이 화(化)해서 원자에서 입자로 화하고 입자에서 분자로 화해서, 안팎을 제도하고 지키고 보호하면서 보신, 법신, 화신이 전부 보호하면서, 불성 자체가 전부 모여서 불바퀴로 돌아가는 거기에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데 물질인 팩시밀리가 아무리 좋다 한들 그러한 역할을 어찌 따라가겠습니까.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바로 팔만대장경의 바로 증거입니다. 그때 시절에는 그때 시절대로 용어가 달랐고, 지금 시절에는 지금 시절대로 용어가 다릅니다, 뜻은 다 같지마는. 사는 도리도 같습니다마는 그 이름, 용어가 자꾸자꾸 다르게 변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역시 그 용어를 모르는데, 자꾸 옛날에 부처님이 하신 용어를 가지고 가르친다면은 그걸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게 금덩어리 보석이라 할지언정 그거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니 이 마음 자체가 부처님의 뜻을 저버려서가 아니라 진짜로 부처님의 뜻을, 골수를 알아서 한마음으로 내 마음속에 지닌다면은 구태여….

둘이 아닌 도리만 알면
어떤 것이 속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 아하, 이것은 나를 둥글게 다스리기 위해서 정으로 치는구나.
내 마음이 저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 나를 치는구나.’ 하고
감사하게 자기 주인공에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의 탓도 안되고
증오도 없고 배신도 없고 미움도 없고
얼굴에 웃음이 띠면서 감사함을 느끼니 얼마나 좋습니까.

또 한 가지,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다닌다 이럴 때 백팔염주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백팔번뇌 망상이라고 했습니다마는 우리가 그 번뇌 망상이 아니라면 무얼 가지고 공부하겠습니까. 백팔(百八)이라는 건 뭐냐. 백(百)은 무(無)입니다, 무. 팔(八)은 사무(四無) 사유(四有) 한데 합쳐서 무의 세계 유의 세계가 같이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같이 돌아가면서 그 생각생각에 꼬리가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그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번뇌 망상이라고 하죠.

일어나는 그 마음이 우리를 부처로 만들 수 있고 법신으로 만들 수 있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거는 망상이 아니라 나를 수련시키는 채찍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이 나오면 허허 웃고 ‘하, 거기서 나온 거니까, 그놈이 그놈이로구나.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 너희들 해결해라.’ 하고 거기다 놓으면 되지, 거기에 끄달릴 필요가 없어. 여러분은 사람 된 그 마음, 좋고 나쁘고 나쁘고 좋고 이런 거를 아는 다스리는 마음이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둘이 아닌 도리만 알면, 모두가 어떤 것이 속에서 나오더라도 ‘아하! 이것은 나를 둥글게 다스리기 위해서 정으로 치는구나. 이건 또 나를 다스리기 위해서 내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돌아가서 저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 나를 치는구나. 참 감사하구나.’ 하고 감사하게 거기 맡길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의 탓도 안되고 증오도 없고 배신도 없고 미움도 없고 얼굴에서 웃음이 띄면서 감사함을 느끼고 얼마나 좋습니까.
자기의 주인공은 ‘착하고 착하구나. 너는 네가 나온 도를 알고 네가 행하는 도를 알고 네가 말하는 그 법을 아는구나.’ 하고 이 우주 삼라대천세계에 그 마음들이 한마음으로 구성돼서 여러분 마음속에 들고 나면서 여러분을 키울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되죠. 요것 버리고 조것 버리고 다 버린다면 뭐 남는 게 있어서 하나도 빠짐없이 그거를 정복하겠습니까. 더럽다고 버리고 밉다고 버리고, 또 즐겁다고 들이고 이런다면은 하나도 없이 가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귀결돼서 넣고 보니까 나중에 그것을 하나도 버릴 게 없어서 다 나 아님이 없더라 할 때까지 우리가 공부해야 합니다.

요새 대구나 저 마산, 울산, 부산 할 것 없이 전부, 그래도 각 지원마다 신도님들이 몇십 명씩은 다 맛을 보고 가는데, 어느 때는 가서 그 맛본 것을 내가 점검을 한번 하겠습니다마는, 닥쳐오는 모든 괴로움, 병고 또는 가난, 영계성, 유전성, 세균성 등 모든 것을 병으로 알지 말고 재료로 삼아서 거기 놓고 실험을 하면은 그게 체험이 돼요. 하나하나 체험이 되면, 그때에 그 맛을 알고 들어간다면은 홀연히 내가 밝아지고, 홀연히 밝아지면 ‘아하! 이게 모두가 독불장군이 없구나. 회사에도 직원이 있으니 사장이 있고 사장이 있으니 직원이 있구나.’ 하고 웃어지죠. 허허허.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는 대로 느껴지고 보는 대로 알아지고, 보는 대로 생각이 나면은 그냥 제도가 되는 것이고, 부모의 조상이 따로 있고 또는 부처님의 조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성도 한 성이요 바로 본도 하나라는 것이죠. 알고 보면은 부처님이 해골바가지에 큰절을 하신 원인도 자기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죠.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 즉 윤회가 돼서 돌아가기 때문에, 모두가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는 도리를 가르치셨죠. 수억겁부터 이렇게 걸어오면서 돌아가면서,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 모이고 흩어지고 이렇게 반복되는 세월을 걸어왔다는 거를 그렇게 가르쳐주신 겁니다, 손수.

그렇건만도 부처님께서는 한 번도 행해본 예도 없고 한 번도 말해본 예도 없고, 한 번도 생각해본 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말없이 그렇게 수없는 나날을 가르치셨습니다. 꽃을 한 송이 들어서 가르치셨고, 꽃을 들고 대중으로 들어가셔서 가르치셨고, 또는 다자탑(多子塔)의 한자리에서 반자리를 내놔줘서 가르치셨고, 관(棺)에서 두 발을 내놓으셔서 또 평발을 가르치셨다 이겁니다. 그 평발의 도리는 어떠한 것입니까. 발이 납작해서요? 발이 이렇게 뭉툭하게 평지가 돼서 평발이라고 한 건 아닐 테죠? 지구는 물론이고 우주 삼천대천세계도, 별성도 모두 다 딛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진드기 발 하나 이 땅에 딛지 않은 게 없어. 풀포기 하나도, 지렁이 하나도 이 땅을 딛지 않은 게 없으니 그 발을 하나도 빼놓지 않은 게 평발이다 이 소립니다.

뜻으로 알아야지 말귀만 듣고서 그걸 반복해서 달달 외운다면 그것은 허탕 가는 길이죠. 나는 경전도 배우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습니다마는, 나는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큰스님한테 점검을 하러 수없이 다녔습니다. 지식이 많고 학식이 높고 위대하고 부자고 이래서만이 이 공부하는 거는 아닙니다.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는 높고 낮고, 가난하고 부자고 이런 것도 바로 평등한 것입니다. 늙고 젊고도 없고 여자 남자도 없는데 여자 빼놓고 남자만 제일이라고, 비구만 제일이라고 해서 비구니를 우습게 안다면, 자기 나온 곳을 모를 거고 그러면 한 번 더 자궁 속을 들어갔다 나와야 알겠지요. 산하대지는 어머니의 젖줄과 같고 저 태양계는 아버지와 같아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원기를 주고 기를 넣어주고 공기를 주어서 생명을 살리고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네 가지에 다 우리는 감사함을 느낄 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만 빠져도 이렇게 이거 (컵을 왼손으로 옮겨 드시며) 하나를 못합니다. 사람이 없어도 안 되고, 불이 없어도 안 되고, 물이 없어도 안 되고, 흙이 없어도 안 되고, 바람이 없어도 안 되죠. 불, 물, 바람, 흙, 사람 이것도 우주개공을 바로 이 한 그릇에 담아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할 겁니다.

어느 벌레 하나라도 나올 자격이 있으니까 나온 거지 자격 없이 나온 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생각엔 그 조끄마한 것이 딱정벌레니 뭐니 그런 벌레들을 보면 ‘저런 거 없어도 될 텐데….’ 하겠지만, 그런 걸 여러분 몸속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진리가 끝간 데 없이 지탱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화되면서 자꾸자꾸, 별성도 자꾸 옷을 벗고 새옷을 입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상대성 원리가 아닌 것이 없는 거를 배웁니다. 부처님께서는 상대성 원리를 하나로 해서 그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야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다고 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누구라도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셨습니다.

내가 재차 말하지만 여러분 속에 있는 의식은 나쁘고 좋고 그런 거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서없이 나옵니다. 그 의식에서는 망하든지 흥하든지, 좋게 보이든지 나쁘게 보이든지, 밉게 보이든지 뭐 이런 걸 모르고 두서없이 나오게 하는데, 다스리는 것은 나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는 거를 알고 있는 인간의 마음이 다스려야 한다 이겁니다. 다스려서 그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 그래서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니라. 위로는 한마음을 갖고 아래로는 내 이 중생들을 제도하라. 내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천백억화신이 화(化)하지 못해서, 털구멍을 통해서 나고 들면서 중생을 제도 못하니까 그건 보살이 아니다 이거야. 아무리 ‘보살이다. 이름을 크게 가지고 있다. 부처의 이름을 크게 가지고 있다. 내가 공부를 이렇게 했으니깐 큰 도사다. 내가 이렇게 가지고 있으니까 큰스님이다.’ 이거 전부 다 오산입니다. 그건 이름일 뿐입니다.

예전에 저 원주에 있을 때, 어느 동네에서 개가 아프고 소가 아프고 젖소가 아프고 뭐, 별소리가 다 옵니다. “돼지를 기르는데 그 돼지가 아파서 죽는다면, 우리는 살림을 다 망쳐버리고 애들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만약에 내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부처님이 그때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보살로 화해서 돼지 속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전부 돼지 속으로 들어가서 돼지가 되었을 때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허허허. 사람 속에 들어갔을 때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독사를 건지기 위해서 독사 속에 들어갔을 때 독사를 보고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개구리 하나 진드기 하나 안 돼보시는 게 없는 그 마음 자체의 그 무한량, 광대무변한 이 법을 어찌 말로 다하리까.

그러니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 이걸 떠나서, 모두 여러분은 기복으로 가지 마세요. 바깥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바깥으로 찾는다면 부처님께서 ‘너는 내 고깃덩어리만 아는구나. 내 가죽만 아는구나. 내 뼈다귀만 아는구나. 내 골수를 모르는구나.’ 하고선 눈을 감으실 겁니다, 아마. 모두 알아야 ‘저 형상은 내 형상이요, 저 몸은 내 몸이요.’이렇게 되는 거고 내 마음 내 생명과 둘이 아닌 게 되죠. 우리 법당에도 부처님을 모셨지만 다 알고 난 뒤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으로 보일 수 있는 그때까지, 부처님으로 보이는 그 부처가 나하고 둘이 아니라는 그것까지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남의 탓을 하지 마시고, 또 여기가 강당이 좁아서 비를 맞고 눈을 맞고 만약에 저 바깥에 한 시간, 두 시간을 섰다 할지라도 구도하는 자세로서 임한다면 아마 그렇게 원망은 안 할 겁니다. 남이 다 해놓은 거 자기가 먹기도 하지만 반면에 자기가 해서 또 남을 대접도 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져야만이 되겠으니깐요. 여러분한테 내가 돈을 받고 내가 잘 살기 위해서, 잘 입기 위해서 이럭하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해다주는 옷을 이렇게 입어서 이 대가를 반드시…. 여러분이 내 스승이자 바로 여러분이 부처며 법신이며 화신입니다.

저 산중에, 껌껌할 때나 또는 밝았을 때나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그 끝없는 길을 한번 걸어보자고 했을 때, 바로 돌부리를 차서 이 발톱이 빠졌을 때, 그때도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 것이 그 돌도, 바로 돌부리를 차게 한 것도 바로 내 스승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자리인 것을 모르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는 거죠. 돌이 그러고 말을 하더군요. 허허허. 돌이 발톱을 빼놓고 하는 소리가요, ‘네 발이 그렇게 좋은 자리를 찾아다니는 그 발이라면, 한발은 못 돼. 그러니 발톱이 빠져도 싸지! 아니, 이 도량 전체가 한도량이건만 도량을 어디 가서 또 찾아?’ 아, 그 돌이 나한테 그러고 반박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허허, 이 돌이 바로 돌부처구나. 요만한 거 하나, 돌부처 아닌 게 없으니 그 돌부처 속에서 희한한 밝음이 나오고 돌부처 속에서 그 생수가 수없이 나오니 말이야. 끊어지지 않고 나오니 그것들을 먹고 악하면 악한 대로 독이 되고, 선하면 선한 대로 사람을 살리는 약물이 되니 그것 참 희한하구나.’ 아, 그랬다고요. 그러니 어디 부처가 따로 있으며 어디라고 정해놓은 데에만 부처가 있습니까? 저 나무 한 그루 선 것도 부처입니다. 이제 그만 말할까요?

[896호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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