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죽화 사찰현판 소견(所見)

문인화가 난초 대나무로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

동화사 편액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은 구한말의 애국지사로서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에 모두 그 지극의 경지에 달한 명필이며 당대 최고의 대자(大字, 현판글씨)의 대가였다. 현재 한국의 어느 누구도 해강의 현판글씨를 넘어서는 이는 없다.


그 뿐 아니라, 시서화 삼절(三絶)로써 산수, 영모(새와 짐승), 사군자 등에 탁월한 솜씨를 보이는 당대의 서화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후에는 주로 대나무만 그리며, 나라를 잃은 한(恨)을 서화에 풀며 한 세상을 살다 간 분이다.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 가면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라는 단정한 해서(楷書)체의 커다란 대자(大字)글씨의 현판이 입구를 장악하고 있다. 그 풍기는 기운이나 엄정한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면모를 지니고 있다. 바로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해강은 또한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쳤다. 또 한국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고 어전(御前)사진사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안중식(安仲植) ·조석진(趙錫晋)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전국에서 서화전을 개최했다.


해강은 한 동안 전국의 31본산 본사들과 대찰들을 다니면서 현판을 하나씩 써주고 서각까지 해서 보시(布施)하고 다니는 일을 하고 다녔다. 제자인 죽농 안순환(安淳煥)과 더불어 전국을 다녔는데, 해강은 현판글씨를 쓰고 죽농은 현판의 좌우에 난초그림과 대나무를 그렸다.
죽농은 해강이 대나무 죽(竹)자를 붙여서, 제자인 안순환에게 지어 준 호(號)이다. 그는 조선 궁중 최후의 주방장인 대령숙수(待令熟手)로서 사옹원(司饔院)의 후신인 전선사의 사장(司長)으로써 궁중음식의 백미였던 연회음식을 준비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또한 근대 최초의 조선 요릿집인 명월관(明月館)을 설립하고, 교자상(交子床)을 발명하여 사용했다. 궁내부 주임관(宮內府 奏任官)이며 전선사장(典膳司長)을 역임하던 죽농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총독부가 궁내부를 없애버리자 정3품 이왕직사무관(李王職事務官)을 제수 받았지만 스스로 퇴직한다.


죽농이 개발한 교자상 요리는 원래 궁중연회가 끝난 후 임금이 아랫사람들에게 하사하는 사찬(賜饌) 중에 한 상에 30인분의 음식을 차리거나, 한 그릇에 10인 분의 메밀국수를 담아 하사한 음식을 여러 명이 둘러앉아 먹던 음식인데, 4인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도록 한 것으로 현재 한정식의 원조이다.


그럼 왜 두 사람은 전국의 대사찰을 돌면서 현판 글씨를 쓰고, 그 좌우에 난초와 대나무를 그렸을까? 죽농이 그린 많은 난초는 노근란(露根蘭)이다. 노근란은 유명한 송말원초의 정사초(鄭思肖)라는 문인화가가 나라를 잃은 백성의 슬픔을 표현하느라 그려서 많은 문인화가들이 따라 그렸다는 그림이다.


대나무는 왜 그렸을까? 대나무를 그릴 때는 보통 부러진 대를 하나 정도는 그린다. 나는 부러지되 절대로 굴복(屈伏)하지 않겠다는 군자와 선비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죽농이 스승인 해강의 지시에 따라 노근란과 대나무를 그린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노근란을 그린 뜻은 사찰을 찾는 불자(佛子)들에게 나라 잃은 슬픔을 상징하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고, 대나무를 그린 뜻은 비록 나라를 잃은 백성이지만 일제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 절조(節操)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호국불교의 면면한 한국불교의 특징은 지금도 한반도의 전역의 사찰에 그 기운을 펼치고 있다. 불교를 배우는 것은 애국하는 길이다. 그 숭고한 의미를 금생에 선양(宣揚)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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