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나 물질세계의 노예가 돼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 삽화 최주현

여러분 앞에 내가 잘 안다 모른다를 떠나서 항상 한도반으로서 말씀드려온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태어나기에 얼마나 쫓고 쫓기며 왔겠습니까. 마음이 진화되니까 몸도 바뀌어지고 이렇게 돼서 인간까지 왔다는 사실을 여러분 앞에 항상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비디오 테이프나나 카세트 테이프에 아마 그 말이 실려있으며 또는 회보에도 실려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말하고 금방 딴 말을 할 때 벌써 한마디 한 거는 과거로 돌아가고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귀에 매달리고 글자풀이에 매달린다면 이 공부는 천부당만부당하게 돌아가고 말아버리죠.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중세계의 쫓고 쫓기는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해서, 억겁을 통하고 또는 끝간 데 없이 그 차원따라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끼리끼리 모여서 끌려다니고, 정신세계의 노예요 물질세계의 노예로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런 사람이 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물질세계에만 끄달려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정작 마음의 눈이 없다면 자기가 보고 듣는 그대로 움직이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죽만 보지 속은 못 보고 항상 그렇게 사는 거죠. 그러면 우리 생활하는 데도 하나도 이익이 없게 되죠. 여러분은 인간의 바른쪽 왼쪽 두뇌는 우리가 물질세계로써 율동하는 것과 모든 거를 거기다 넣을 수 있는 내 마음을 조화롭게 하고 중도로써 중용할 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여기 의학박사들도 많겠지만은, 구조가 그렇게 돼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이고 내는 거기서 점검을 해서 들이고 내는 것을 바로 중심, 중도(中道),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모른다면 그대로 물질에 끄달리고 정신에 끄달리고, 내 인과에 끄달리며 살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해드렸지만 기초가 든든치 못하면 집을 짓다가도 무너지는 수가 있고 금이 가는 수도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마음이 기초가 튼튼해야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여러분 마음속에 아니, 육신 속에 그 많은 인과 업으로 인해서 악업 선업이 뭉쳐서 수도 없이 들고 나는 것, 좋은 거는 잠시 잠깐이고 언짢은 것, 화내게 하는 것, 즐겁게 하는 것, 강도질하는 것, 도둑질하는 것, 술 먹고 아수라장을 만드는 것, 모든 이 일체가 다, 그러한 생각이 나게 하는 그놈들이 어딨느냐는 얘깁니다. 여러분 그 몸 속에 다 의식들로 돼 있죠.

이것을 자세히 말하자면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서, 수만 개가 헤아릴 수 없이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하나가 뽑히는 것이 부모에게 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자기가 과거에 살던 그 악업 선업을 짊어진 채 바로 거기에 부합이 되는 거죠. 그래서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삼신(三神)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 말을 또 하고 또 하느냐? 이것을 아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뭉쳐진 그 자체, 악업 선업이 지금 현실로 모이고, 그래서 여러분 그 몸에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의식이 여러분에게 강요하고 또 여러분이 강요당해서 악업 선업에 휘말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의식들은 좋고 나쁘고, 좋은 일이고 언짢은 일이고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인간이기 때문에, 나쁘고 좋고를 너무나 잘 아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바로 중심을 지키면서 다스리는 겁니다. 들이는 것도 다스려서 들이고 내는 것도 다스려서 낸다 이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을 통해서 두뇌에 그렇게 통신이 되게 돼 있습니다. 깊이 잠재해있는 그러한 도심이라고 할까, 또 중간에 있는 도심으로 들게 하는 마음, 그리고 또 물질적으로 들이는 그것을 거기다 맡겨야만이 그렇게 되지 그거를 모르고 그냥 자기가 자기라고 시각적이나 감각적으로다가 그냥그냥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오늘이고 내일 일이고 자동적으로 대처를 해나가겠습니까? 생각이 없이도 자동적으로 컴퓨터에서 그렇게 나오게끔,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내가 갖고 있는 중심에, 중도(中道)에, 중용에, 그리고 분수를 지키는 그 마음이 바로 여러분을 리드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돼서 홀연히 밝아진다 이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수없이 나오는 그것을 다스리는 마음이 누가 되지 않고 모든 점에서 그 중용으로서 이렇게 활용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이라면, 조금도 어긋남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왼쪽 뇌, 바른쪽 뇌 이 중심적인 그 표현도 그렇게 두뇌에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옆으로 양 가장이로 통신망이 그렇게 돼 있죠. 수없이 귀밑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모든 게 우리 마음속에서 두뇌로 올라가면 두뇌에서 전부 사대(四大)로 통신을 해서 그렇게 다스려나간다는 얘깁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불제자가 못 되는 거죠. 우리가 불제자라면 자기의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불(佛)이라는 걸 알아야 하고, 우리가 말하고 사는 것이 교(敎)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라고 합니다. 풀 한 포기만 살아 있어도 불교는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수없이 말씀드렸죠. 그러나 말씀은 그렇게 많이 듣고도 들은 사이가 없으면서도 들은 건 들은 것이지 않습니까?

전쟁터에 나가면은 이등은 없다, 일등이라야 한다고 말하듯이 우리 마음공부하는 것도 이등이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그래서 일등을 했을 때는 부처님도, 일체제불도, 일체 중생도 정말 진드기 하나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내가 섭류해서 내 한마음으로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만이, 그때에 바로 그대로, 부처님은 부처님이요 중생은 중생이요 풀은 풀이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 이렇게 말이 나올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거기 놓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하나도 얻을 바가 없고, 그 얻는 것조차도 일등으로 이겨서 나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이 모든 일체가 다 한마음으로 구성되고 한마음으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때에 따라선 한마음을 쓰고, 때에 따라선 뭐, 두 마음으로도 쓸 수 있고, 세 마음으로도 쓸 수 있고, 이런 원인이 과학적으로 지금 원자에서 입자로, 입자에서 분자로 화해서 지구도 지키고 인간도 지킨다는 사실로 나와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이 몸속에 있는 의식들을 그렇게 간추려 나간다면, 예를 들어서 들이는 거를, 거기다 모든 걸 맡기고 거기서 주장하는 겁니다, 주인공에서.

‘한마음’ 하는 거는 여러분 몸속에 그 헤아릴 수 없는 악업 선업이 업이 돼가지고, 그 속에서 유전성이라든가 영계성이라든가 세균성이라든가 업보성이나 인과성이 모두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팔자 운명이 바로 그런 데서 벌어지고 있죠. 그것이 바로 한마음이라는 거를 말하는 겁니다. 내 내면의 세계부터 알아야 바깥세계를 알지 내 내면의 세계를 모르고야 어찌 바깥세계를 알겠습니까. 그럼으로써 내 마음에 있는 이 중생들을 다 알고 나면 한마음으로 너와 나가 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생각해보십시오. 위장, 척수, 척추, 콩팥, 심장, 간장, 식도, 소장, 대장 등 하나하나의 세포들이 모두가 집을 짓고 소임을 맡아가지고 운행을 하는데 말입니다, 악은 악으로만 나갑니다. 선은 돈을 주고 악으로 하래도 안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속에, 몸속에 악이 많고 선이 적으면은 악의적인 문제가 수없이 나옵니다. 자꾸 안되게 하고 자꾸 남을 증오하게 하고 모든 게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악이다라는 얘깁니다. 남을 때려 죽이고 남을 해롭게만 해서 악이 아닙니다. 남을 둘로 보지 않아야 되는데 둘로 보고 항상 남을 원망하고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상대가 생겼으며 세상이 벌어졌을까?’ 하고 내 탓으로 돌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남의 탓으로 돌리고 이런다면은 이 공부에는 여간 지장이 많지 않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면 이등은 없다, 일등이라야 한다고 말하듯이
우리 마음공부 하는 것도 이등이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그래서 일등을 했을 때는
일체제불, 일체중생도, 정말 진드기 하나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내가 섭류해서 내 한마음으로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 것이니
그때에 바로 부처는 부처요, 중생은 중생이요,
풀은 풀이요, 불은 불이요, 산은 산이다
이렇게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놓는다면, 눈 밝아져서 마음 안의 눈과 육안으로 보는 눈이 겸해서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거죠. 들이고 낼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거기서 보고 점검을 해서 안으로 들입니다. 안으로 들여야만이 모두 통신이 되고 또 안으로 들이는 그 마음이 한마음으로 돌아간다면은 전부 보살로 화한다 이 소립니다. 악업 선업이 둘이 아니라 모든 게 하나로 돌아가니, 모든 것이 그 끝간 데 없는 진리지마는 그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천백억화신이 되죠. 모든 사람들이 응해달라는 대로 약사로도 응해주시고, 관세음으로도 응해 주시고, 지장으로도 응해 주시고, 천만 가지 만만 가지를 다 모습을 바꿔가면서 찰나에 응해주시니 그것이 바로 천백억화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속가에서 산다고 하지만 스님들도 속가에서 사는 것보다 나을 게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속가에 있는 사람들도 유마힐 거사처럼 그렇게 부처님과 동등하게 제자들을 가르치고 중생을 제도한 분도 있습니다. 자기 안에부터 제도를 해야지 바깥에 끄달리면서 제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죠. 항상 이 마음이 충족되고 내가 완전히 그 이치를 알아야, 즉 말하자면은 그 순서도 의학적이기도 하고 천문학적이기도 하고, 지리학적이기도 하고 과학적이기도 하고, 천체물리학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체가 다 그 한마음 속에서 구성되는 거니깐요.

그러니 우리 마음 자체가 어떻게 해야만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잘 이끌어갈 수 있는가. 자기가 자기를 이끌어갈 수 있고, 다스리는 그 마음이 중심에서 양면을 이끌고 갈 수 있느냐. 안에서 벌어지는 마음이 팥죽 솥의 팥죽 방울이라면 방울이 일어나는 대로 “이것도 문수! 이것도 문수!” 했단 말입니다. 그게 법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몸 안에서, 대장이나 소장에서, 만약 어느 한군데서만 파업을 일으킨대도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니까 한 귀퉁이 어디고 소중하지 않은 게 없죠. 다 한마음으로 돌아가야만이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건강하고 지혜로와져서 부자 부럽지 않게 마음이 넓어질 수 있죠. 이렇게 마음이 부자라면은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도 정말 대장부의 살림살이요 또는 어디고 가난치가 않다 이겁니다. 그것이 당당한 것이요, 그것이 부자가 돼서 부자가 아니라 내가 쓰려면은, 내가 필요한 거면 어디서든지 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 묘한 도리를 여러분이 모른다면은 만날 가난하기에 바쁘죠. 그뿐만 아니죠. 가난뿐이 아니라 재난이 들어와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또는 병고가 들어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죠.

여러분은 바깥에 있는 지렁이를 볼 때 보기 싫고 징그럽고 그렇겠지만, 여러분 속에는 똥통도 들어 있고 구더기도 있고, 또는 진드기도 있고, 거위도 있고, 촌충도 있고 벼룩 같은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이건 헤아릴 수가 없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두서없는 말이지마는 잘 참작해서 들으십시오.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반면에, 왜 그렇게 내 몸에 들어 있고 왜 그것이 곧 바로 나였던가? 이런 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지구가 생긴 이래로 역사를 볼 때에도, 미생물의 시대가 있었고, 곤충의 시대가 있었고, 또 그 뒤에는 공룡의 시대도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이 나기 전에 그렇게 미리미리들 그렇게 진화돼서 올라오기 위한 그 수련이, 그렇게 수많은 모습을 바꿔가면서 시대를 거쳐서 이렇게 인간까지 온 것이 그게 바로 정신 수행입니다. 자연적으로 지수화풍이 바탕이 되어서 그걸로 인해서 그렇게 모두 잡아먹고 잡아먹히고 쫓고 쫓기면서, 마음이 그렇게 해서 진화돼가지고 모습을 바꾸고 바꾸고 한 게 인간까지 올라왔다 합니다. 누가 그것을 말해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것을 파악할 수 있는 지금 현재의 나, 참나의 속에 다 들어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 인간까지 무수한 그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왔는데, 그것은 끝없는 길입니다.

그럼 인간이 되어가지고도 또 짐승으로 돼야 되겠습니까? 또는 독사가 돼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행동하고 말하고, 남의 탓을 하고 원망하고 죽이고 살리고 온통 부서지게 하고 남을 해롭게만 하는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은 틀림없이 미래에 올 것을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과거에 한 일은 현실에 너무나 더 잘 아시고요.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그 동기를 항상 지켜본다면 아마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아실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지금 여러분 몸속에 악업 선업으로 뭉쳐있다가 콤퓨타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대로 입력이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속지 마시고,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마시고, 누가 아니 되는 거는 하시고, 들이는 것도 바로 여기다 (가슴을 짚어 보이시고) 하고 맡겨서 들이고, 내는 것도 여기다 맡겨서 낼 수 있다면, 지금 레이더망에서 들이고 내면서 책정해서 다 이렇게 하듯이 그렇게 아주 자동적으로 돼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리고 재료가 모두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습니다. 항상 말했죠,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그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삼아서 돼 있다구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물질세계의 의식으로서 산다면 물질세계의 노예고, 그것은 끝간 데 없는 길을 고통스럽게 걸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살아있으면서 죽지 않는다면 열반이 아닙니다. 살아서 이 도리를 알고 죽어야 열반이지, 만약에 살아서 이 도리를 모르고 죽는다면 그건 그냥 그대로, 그 고통 속에서 죽는다 산다도 없이 끝없는 길을 걸어야만 하는 그런 고통입니다. 여러분이 깨치고 본다면 모든 것이 마음은 체가 없어서 악으로 나가도 수없이 나가고, 선으로 나가도 수없이 나갑니다. 어느 쪽으로 나가느냐가 문제죠. 야! 이게 또 묘한 도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내 마음이, 다스리는 마음이 없다면, 바로 거기서 맘대로 ‘내가 저걸 꼭 훔쳐와야겠다. 그래서 남이야 살건 말건 나는 살아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게 되고 여기서는 (가슴을 짚어 보이시고) 그것이 나쁘고 좋고를 모르기 때문에 다 따라줍니다. 그 마음이 서면은 악도 그만큼 있고 또는 선도 그만큼 있습니다. 선이 더 많으냐 악이 더 많으냐 이게 문제죠.

그래서 여러분은 똑같이 인간으로서 살지만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즐거웁게 선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으로 괴롭게 사는 사람이 있죠. 만약에 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가 먹는다면 그건 독이 될 것이고 약초가 먹는다면 약초가 돼서 인간을 살립니다. 칼도 칼 나름입니다. 의사는 칼을 들어서 사람을 살리지마는 강도는 칼을 들어서 사람을 죽입니다. 이 모두가 상대성 원리입니다. 부처도 중생도 풀 한 포기도 다 내 소유로서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러한 소유가 돼야만이, 그때 가서는 나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오고, 바로 그때에 부처님이 뚜렷하고 중생이 뚜렷하고, 하는 일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이렇게 뚜렷하게 나오고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사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여러분한테 듣고 글귀로만이 이렇게 얘기를 한다면, 이 말 자체가 모두 한데로 떨어질 것입니다. 나는 거짓을 안 합니다. 한 마디라도 내가 실험하고 체험하지 않고 하는 얘기는 없습니다. 알고 본다면 한 마디도 한 게 없고, 한 마디도 한 게 없는가 하면 한 생각 한 것도 없고 한 행동 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잘 터득을 해야 합니다.

지금 그렇습니다. 이 실생활 속에서 바로 도가 있는 거지 실생활 빼놓고 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안으로 정신세계의 노예가 되는 건 어떤 거냐? 나를 조금 발견했을 때에 거기에서 “나는 아무개다.” 하고 나와서 이렇게 이렇게 시키는 걸 그대로 듣는다면 그건 정신 노예죠. 또 처음에 이렇게 믿고 거기다 놓고 갈 때 물질을 보고 남의 소리를 듣고 이렇게 해서 내 중심을 세우지 못하고 산다면 그거는 바로 물질세계의 노예란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이런 게 있죠.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불교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하죠? 저 언덕을 넘어서야만이, 그 언덕을 넘어서 만납시다, 또는 요단강을 건너서 만납시다. 이러죠? 저편 언덕 뒤에는 항상 밝음이 있고 항상 그 생수가 있으니 그걸 없다고는 못 하죠. 끝없는 밝음이 있기 때문에 컴컴하다 밝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가 있노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여러분은 이 물질세계에 끄달리다 보니까 어떻게 되느냐. 세 마디로 규정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만약에 큰 독사가 여기에 있다고 합시다. 또 거위가 지렁이로 변해서 이만하게 (양 팔을 벌려 보이시고) 돼가지고 곤충이나 세균이 전부 나와서 그냥 널비하게 있다고 합시다. 또 저기 들어가면 머릴 풀어 산발한 귀신들이 있다 합시다. 그렇다면은 의식적으로 벌써 ‘어이쿠!’ 하겠죠? 거기 들어가겠습니까? 내 마음이 체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독사한테 물리면 죽는다, 안기면 맞아죽는다, 또는 귀신한테 말려죽는다 그럴 겁니다. 모두 징그럽게만 보이고 똥통의 구더기는 그냥 여지없이 크게 보이고, 내 이 사대(四大)가 다 흩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가도 내가 배우지 못한 영혼이라면 그냥 거길 못 건너가, 일차적으로.

일차적으로 건너가지 못하지, 그럼 이차적은 뭐냐? 기독교, 가톨릭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강을 건너 저 언덕에서 우리 같이 한자리를 하고 만납시다.” 했습니다. 그랬는데 이게 물질세계의 의식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이 도리를 모르면 자기가 그냥 몸이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니 오백생을 기다린다 할지라도 배가 옵니까? 내 의식이 저 강에 들어가면 물이 깊어서 빠져죽는다고 알기 때문에, 도저히 배가 오지 않으면 건너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생각 끄떡하면은 찰나에 갈 것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두 번째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895호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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