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묵 스님

“불일암佛日庵 마루에서 기자들이 사진을 찍으면 법정 스님이 ‘어이, 초상권 있어 함부로 찍지마!’ 그러셨는데, 말이나 행동이 모셨던 어르신들을 따라가요. 이곳 당호를 불일암으로 한 까닭도 어른 스님 영향이지요. 좋은 이름이에요.” 보림사 뒤 자그마한 불일암 법당에 앉자마자 카메라부터 꺼내드는 사진작가에게 지묵 스님이 차부터 한 잔 하라며 던진 말씀이다.

은사인 법흥 스님의 부탁으로 법정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은 지묵 스님에게 법정 스님은 항상 일등후원자 였다. 사진은 법정 스님을 그리며 당호를 ‘佛日庵’이라 붙인 보림사 뒤 불일암 법당 앞에 서 있는 지묵 스님.
출가 전, 법정 스님 글을 보고 ‘스님들도 글을 쓰시는구나.’ 생각했던 지묵 스님, 송광사로 출가했다. 송광사에서는 보름마다 삭발하고 목욕도 하고 별식으로 찰밥을 하는데, 도반 행자들과 암자에 계시는 어른들에게 찰밥을 가져다드리면서 법정 스님과 처음 현품대조를 했다. “미역국하고 찰밥은 음식궁합이 잘 맞아요. 내가 국을 끓이는 소임을 맡았는데, 솥바닥에 기름을 바르고 물에 불린 미역을 살짝 볶다가 끓이면 담박하면서도 구수해요. 인사를 올렸더니 ‘행자 생활하는 지금 첫 마음 잃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라’고 하셨어요.” 그 날 지묵 스님 눈길을 끈 것은 벽에 걸린 고졸古拙한 추사 선생 족자였다.
‘靜坐處 茶半香初정좌처 다반향초 妙用時 水流花開묘용시 수류화개’
‘고요한 선방, 차는 반 모금, 향은 첫 향기. 어우렁더우렁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불일암 다실을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라 하고, 말년을 보냈던 강원도 토굴을 수류산방(水流山房)이라고 할 만큼 수류화개는 무소유 못지않게 스님 정취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살아있는 화두다.

“처음 뵈었을 때 눈매가 날카롭고 냉정해 보였어요. 그런데 차츰차츰 얘기를 들을수록 도타운 인간미가 느껴졌어요. 벽장에서 속옷과 양말을 꺼내주시는데, 지금은 물자가 흔하지만 그때는 뭐든지 모자랄 때라 설날 맞은 기분이었어요.” 그 뒤 효봉 스님 추모재 날 계를 받고 나서 도반들과 불일암에 올라가 인사드렸다. “무거운 가사장삼을 끌고 절하러 갔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별말씀을 안 하시더니 내게 ‘법명이 뭐라고 했어?’ 물으셔서 지묵입니다. 그랬더니 ‘종이하고 먹이 평생 안 떨어질 사람이네.’ 그래서 스님, 지필묵하고는 다릅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아, 두고 봐!’ 그러셨는데 참말, 종이하고 먹은 떨어지지 않네.”

행자 생활을 마치고 비구계를 받은 지묵 스님은 불국사 선방에 다니다 범어사 조실 지유스님이 원효암에 계실 때 장좌불와를 하고 달마어록과 선문촬요(禪門撮要)를 배웠다. “선문촬요(禪門撮要) 전권을 공부했어요. 달마어록이나 웬만한 것은 책에 잘못된 곳까지 짚어주셨어요.”
공부마치고 광주민주항쟁이 나던 해, 법정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니 서장(書狀)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끝을 다 맺지 못했어요. 광주 5월 항쟁도 있고 사회분위기가 어수선해서. 좋은 스승들에게 공부하는 영예를 누리고 고마워요.” 법정 스님은 지묵 스님한테 세 가지는 못 당하겠다고 했다. “첫째는 수제비, 내가 일러드린 대로 한껏 솜씨를 내봐도 그 맛이 안 난다는 거여. 둘째 돌담 쌓기, 조계산 돌을 주어다가 불일암 올라가는 돌계단을 쌓았는데, 구산 스님이 ‘다른 데는 이번 태풍에 길이 패고 무너져 내렸는데 여기는 괜찮네’ 그러시니까. 법정 스님이 ‘지묵 수좌가 특수 공법으로 정성껏 쌓아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셨어요. 셋째 전각, 법정 스님 낙관은 석정 스님, 무용 거사, 수안 스님 그리고 내가 판 20여 과(顆)를 더해 백여 과가 됩니다. 글씨는 스님이 쓰고 나는 칼질만을 했어요. 깎아서 보여드리면 ‘조금 힘이 빠졌어, 다시’, ‘좋군. 균형이 잡혔어. 약간 옆으로 삐쳐서 멋있지 않아?’, ‘날 일日 자는 그냥 해를 그려서 원 안에 점만 찍어봐’ 그러시는데 디자인 감각이 있으셨어요. 스님은 목수 일을 잘하시고 나는 돌 일과 전각을 잘하니까 취미에 따라 일을 했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법정 스님과 지묵 스님 인연은 법흥 스님이 다리를 놓았다. “아무래도 내 상좌 지묵이가 스님을 좋아하는 것 같소. 내가 가르치지 못한 것을 스님이 좀 가르쳐주시오. 심각하게 그러고 가셨다는 거여. 그러면서 은사스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공부 잘하고 필요한 것 있으면 얘기하라고 하셨어요. 법정 스님은 내가 해외여행을 할 때 대개 왕복 비행기표 끊어주시고, 어려울 때마다 일등후원자였어요.”
지묵 스님이 미국에 가려고 비행기 표를 끊어놓고 불일암에 인사드리러 올라갔을 때 법정 스님은 다락에서 당신 손때 묻은 <신채호 전집> 상하권을 꺼내주면서 ‘어디 가더라도 한국을 잊지 마라. 어머니가 문둥이여도 버려서는 안 되듯이, 내 나라가 아무리 썩고 잘못됐다 하더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했다. 법정 스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큰 절로 내려와 은사 법흥 스님을 찾은 지묵 스님, 짐짓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스님! 제가 미국에 갈랍니다. 도가 있으면 도를 보여 주십시오. 도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보여 주십시오. 돈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했더니 우리 스님이 ‘야, 옜다. 천불이다. 아이고, 천불난다. 천불!’ 하면서 천 달러를 주시더라고, 그런데 이 얘기는 쓰지 말고.” 불교 종단에 이렇듯 해학이 넘치고 정감어린 사제가 또 어디 있으랴. 더구나 상좌가 다른 스님을 좋아한다고 당신이 직접 찾아가 부탁하는 일은 보통 도량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 자리가 아니면 도타운 스승과 제자 정을 어디에 담을까 싶어 지묵 스님 당부를 어기고 말았다.

성철 스님이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내면서 법정 스님에게 교정을 봐달라고 했을 때 법정 스님은 지묵 스님을 데리고 갔다. “어른 뵌다고 법정 스님이랑 둘이 가사 장삼을 다리미질을 해서 깨끗하게 입고 올라갔더니, 성철 스님이 입던 옷을 벗어주면서 ‘요걸 입고 보면 잘 보일 것이여.’ 그러셔서 병풍 뒤에서 법정 스님과 내가 새 옷을 벗어놓고 갈아입었어요.” 당신 체취가 묻은 옷을 입고 뜻을 잘 헤아려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을까. “경봉 스님 책도 그렇게 냈어요. 명정 스님이 부탁해가지고. 우리나라 선사들이고 큰 스님들 책 가운데 법정 스님 손을 거치지 않은 거의 책이 없어요.”
얼마 뒤 법정 스님이 누가 번역해 달라고 부탁한 지장경을 지묵 스님에게 건네면서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우리고전을 읽어보고 되도록이면 독송하기도 좋게 번역을 하라고 일렀다. “그때 고전을 한참 소리 내서 읽고는 했다니까. 스님 덕분에 운율을 맞추는 걸 알았어요.” 법정 스님 지시로 오관게도 다듬은 지묵 스님. ‘계공다소량피래처(計功多少量彼來處), 촌기덕행전결응공(村己德行全缺應供), 방심이과탐등위종(防心離過貪等爲宗), 정사양약위료형고(正思良藥爲療形枯), 위성도업응수차식(爲成道業膺受此食)’을 운율을 살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론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에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보호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라고 풀었다. 특히 첫 구절을 직역하면 ‘이 음식이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 정성이 서려 있는지 떠올리며’인데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라고 했다.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하려는 깊은 법정 스님 정情이 담긴 번역이다.

법정 스님 말씀을 따라 프랑스 파리 길상사에 간 지묵 스님, 한국과는 달리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차를 한 대 사달라고 말씀드렸다. 법정 스님은 공부하는 사람이 차있으면 안 된다고 거절했다. 법정 스님이 귀국하실 때 드골공항 게이트 지나면서 손짓을 했다. ‘뭘 빠뜨리셨나?’ 다가가는 지묵 스님에게 ‘가방 좀 잘 봐봐!’ 했다. 뜬금없이 무슨 말씀인지 납득이 가지 않은 지묵 스님은 가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간수를 잘하라는 말씀으로 무심히 흘려들었다. 몇 해 동안 유럽을 두루 다니고, 중국이며, 인도로 여행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도 한참을 지난 뒤에 시골농가에서 텃밭을 일구면서 선농일치를 실천하며 아란야 선원을 할 때 낡은 여행 가방을 버리려다 앞에 붙은 바스켓을 탈탈 터는데 봉투가 하나 툭 떨어졌다. 봉투 안에서 차를 사서 조심해서 타고 다니라는 법정 스님 당부 말씀과 수표가 나왔다. “자동차 사라고 넣어두신 돈으로 부처님을 모시고 복장에다 그 연기(緣起)를 써놨어요. 어르신이 자동차 산다고 그러니까 꾸짖기만 하고 가시더니 떠나면서 가방에다가 봉투를 넣어놓고 가셨는데, 나중에 버리려다가 보니까 큰돈이 나와서 이 부처님을 모시노라고.” 지금은 보림사 불일암에 앉아계시는 부처님이야기다. 짐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다가 수레에 싣고 타고 가니 편했을 사람들이, 삶속에 부처님 법을 받아들여 편리하고 행복해지려는 마음을 담아 법륜이라 했다던가. 자동차가 부처님으로 나투어 법륜을 굴리다.

법정 스님을 닮아서일까, 주지 자리를 한사코 거절하던 지묵 스님은 문중 어른 스님들의 권유로 가지선문 보림사 주지를 맡아 ‘보림결사’를 선언하며 교육불사에 매진하고 있다.
“어르신이 불일암으로 부르셔서 길상사 주지를 하라고 하셨을 때도 싫다고 했듯이, 송광사에서 내 나이에 주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주지를 하기 싫어했어요. 주지 자리가 비면 늘 나한테 물어요.” 문중 어른 등살에 떠밀려 보림사 주지를 맡은 지묵 스님은 보림결사를 선언한다. 첫째, 염불을 비롯한 모든 의식을 한글로 한다. 둘째, 음력불교를 청산하고 양력불교를 한다. 셋째, 집 짓는 불사는 하지 않고 교육불사를 하겠다. “한문불교를 청산하고, 일요일마다 법회를 하고, 지장재일·관음재일 따위를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불사 방향을 집짓는 데서 교육으로 돌렸어요.”
그렇게 세운 장흥불교대학. 3년을 마치고 졸업한 서른일곱 사람은 염불을 다 외우고, 시식(施食)을 진행할 만큼 불교의식에 능하다. “스님은 나 혼자지만 신도들이 종을 치고 예불도 하곤 해서 어려움이 없어요. 한 번은 나갔다 들어오니까, 재(齋)가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장을 봐다가 천도재를 지냈대요. 의식을 스님들 전용이라는 생각은 부처님이 부정했던 카스트 제도에서 바라문들이 하던 낡은 관습이에요.” 법정 스님도 중국 사례를 들면서 출가불자는 수행에 보다 전념하고 시다림을 비롯한 의식을 재가불자들이 이끌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중국 조주 스님 절에 가니까. 펼침막이 걸렸더군요. 어떤 보살님이 법문한다고. 해인사나 송광사, 통도사에서 거사님이 법문하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어요? 더구나 보살님은.” 지묵 스님은 여성 불자가 포교사가 되자 바로 상당법어(上堂法語)를 시켰다. “시켜야 해요. 해인사나 운문사에서 강원을 졸업 때가 되면 법문 연습을 합니다. 신도들도 시켜야 해요. 법제자, 법통 호적에 효봉 스님이 78대에요. 우리 스승들이 79대고, 내가 80대에요. 그래서 장흥불교대학 앨범에 석문 제 81대 손이라고 해놨어요. 손이니까 법문을 해야지. 4박 5일 단기 출가도 여름에 한 번씩 했어요. 그 사람들이 신심이 두텁고 실제로 자원봉사 많이 하고 열성이 대단해요. 절 살림을 돕는 종무소 보살이나 공양간에서 일하는 분들이 모두 단기출가한 사람들이에요. 원하는 사람만 삭발을 하라고 했는데 승복을 입고 대부분 삭발을 했어요.” 법정 스님도 배웠으면 반드시 갚아야한다고 일렀다. 재가제자들을 빚쟁이로 만들지 않으려는 지묵 스님 정신이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다.

부임하고 보니 빚이 9천 7백만 원에다 자동차는 압류 당했고. 오느니 빚쟁이, 전화를 받으면 빚 독촉이었다. 공양주와 종무소 총무 한 사람 월급주면 수입, 지출이 똑 떨어져 셈이 나오지 않는데, 자동차도 찾고 빚도 다 갚았다. “지내놓고 보니까 참 희한하데요. 나는 뭘 구하는 기도 따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사람인데, 날마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프고 참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오자마자 옛날 스님을 하다가 환속한 분이 느닷없이 아들, 딸들이 남은여생을 살 돈과 수의 마련할 돈, 장례비를 만들어줬는데, 지묵스님이 고생을 하니 수의 입은 것으로 하겠다면서 전액을 들고 왔어요. 염치없이 받아서 전기세야 뭐야 자잘하고 급한 불부터 먼저 껐어요.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예요.” 송광사하고 군청에 구호요청을 했다. 부임만 시켜놓고 자동차 운행도 못하게 하면 어쩌느냐? 다리를 풀어줘야 일을 할 것 아니겠느냐고. 송광사에선 분담금을 한 해 동안 안 받겠다고 했다. 군청에서도 보림사는 장흥 얼굴이니 지원을 하겠다고 손을 잡아줬다. “빚도 갚아야 하고, 어찌 살까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어찌어찌해서 그 큰돈을 다 갚았으니, 돌이켜보면 신기해요. 부도나지 않으려고 산에 있는 나무고 돌이고 땅이고 뭐이고 돈 될 만한 것이 있나 눈에 불을 키고 겅중겅중 뛰어 다녔어요. 내 입으로 얘기하려니까 눈물이 나려고 하네. 하하. 앞산 뒷산, 뺑 둘러서 산밖에 없는데 참 나, 빚쟁이는 와 쌓고. 나중에는 배짱이 생기더라니까요. 막히고 어려움이 있으면, 뚫리고 풀리기도 하겠지 하는. 1원 한 잎도 미결이 없이 다 해결해버렸어요. 세상일이 셈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구먼요.” 법정 스님을 닮아서인가. 주지를 하지 않으려고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지묵 스님. 인연 따라 가지선문 천년 고찰 보림사를 맡아 홀로 일궜다.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峯).

스님이라고는 주지 밖에 없는 보림사에서 돈 걱정을 비롯해 법문하랴. 화장실 청소하랴. 회보도 만들랴. 차밭을 일구랴. 덖은 차도 팔랴. 불교대학장에서부터 강사까지 지치는 줄도 모르고 해낸 용광로 같은 지묵 스님. 이번 주 토요일이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다. 수명이 길어지는데 벌써 뒤로 물러나면 여생을 어떻게 보내려고 하느냐는 물음에. “자유롭게 살랍니다. 법정 스님이 오래 전에 ‘주지가 다방 마담이네.’ 그러셨어요. 그 뜻을 몰랐는데. 바빠서 미처 차 대접을 못 하면 차 한 잔도 안줬다고 하고, 만나주지 않으면 건방지다고 하니까 바깥나들이하다가도 누가 온다고 하면 바로 돌아와야 해요. 자유로움이 출가자 본분이고, 출가가 자기 수행도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인데, 자리에 충실해도 이타가 되고 이타에 충실해도 자리가 되는 것이지.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을 보세요. 자리自利에 충실하셔서 더 큰 이타를 이루셨잖아. 하하” 자신에 충실한 자유로운 삶이 이타행이란 말씀에 빙긋 웃었더니 세상이 웃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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