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5호 7월 4일]

학승이 물었다.
“조사의 뜻과 교의 뜻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겨우 출가하여 계도 받지 않았는데 가는 곳마다 물어대는군.”

問 祖意與敎意同別 師云 纔出家未受戒 到處問人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다. 즉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고 그 성품을 보면 곧 부처를 이룬다’ 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 재세시에 출가자들이 석존 교설을 단 한번 듣고 그 자리에서 즉시 깨달음을 얻었던 가풍을 그대로 잇는 것이다. 석존 열반 후에는 한동안, 반드시 수행해서 때를 제거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설, 즉 소승불교가 확장되었으나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중생이 곧 부처’라는 사상이 높이 부각되었고, 선불교에서는 ‘깨달으면 곧 부처’라는 재세시의 가풍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다.
 

부처님의 초기 설법이 수행에 역점을 둔 불교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원시 경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붓다 앞에서 깨달아 얻었던 성문 4과의 경지는 무시되고, 수행의 측면만을 강조했던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많은 세월 동안 계속 되었고, 지금 한국 불교도 그런 경향이 다분하다. 당나라 조주 스님 시대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조주 선사는 간단한 한 마디로 초학자의 허접한 망상을 잘라버린다. 도가 높을수록 질문이 없어진다. 질문이 일어나면 그것은 곧 망상이 일어난 것이다. 질문이 일어나면 잘라버려라. 도가 높아지면 질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 것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성인(聖)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범부(凡)가 아니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범부(凡)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성인(聖)이 아니다.”
학승이 물었다.
“범도 아니고 성도 아닐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훌륭한 선승(禪僧)이다.”

問 如何是聖 師云不凡 云如何是凡 師云不聖 云不凡不聖時如何 師云 好箇禪僧

성인에 대해서 묻는가? 그렇다면 성인에 대해서 감히 말하지 못한다. 성인은 깨끗함 그 자체다. 진리로 돌아간 사람, 감정에 흐르지 않고 고요한 세계를 체득한 사람, 범죄를 행할 필요가 없는 사람, 24시간 마음이 항상 맑은 사람, 누가 뭐라 하던 중도(中道)를 행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성인인데 그에 대해서 어찌 언설로 표현을 한단 말인가? 언설로 표현해서 정해 놓으면 그은 성인이 아니다. 조주 선사는 성인에 대해 범부가 아니라고만 설명했다. 그것으로 성인을 알 것이지 더 이상은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진정한 장소, 진정한 경지, 진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범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범부는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심성은 이미 부처이다. 자신이 참 부처이지만, 아직 진정한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범부라는 말로 치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하니 범부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못한다. 조주 선사는 다만 ‘성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그것으로 범부를 알라는 말이다. 짧지만 가능한 진실을 담고 있는 선적 표현이다.

그런데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사람이 있다면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조주 선사는 ‘그는 훌륭한 선승’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선사들은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평범한 인간 그 자체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족하다. 사람을 신보다 아래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격 모독이고, 또한 사람을 사람보다 높은 성인으로 표현해도 그것은 사실 망설이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고 존귀하다. 사람은 우주의 자식이다. 곧 사람이 우주이다. 곧 사람은 우주의 주인이다. 그런 사유가 있다면 어찌 사람을 범부, 혹은 성인으로 치부할 것인가?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라면 그야말로 그는 정말 훌륭한 선승(禪僧)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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