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든 기둥의 윗면에 신이나 장군의 얼굴을 새기고, 몸통에는 그것에게 부여한 역할을 나타내는 글을 쓰거나 새겨서 길가에 세우는 일종의 신상이다. 이것은 위협적인 수호신장(守護神將)이거나 진압신(鎭壓神) 또는 노신(路神) 등의 기능을 가지게 되며, 민간에서 오랫동안 친숙하게 생각하여 가까이 한 하나의 주물(呪物)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장승은 법수(法首) 혹은 벅수, 장생(長, 長生)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벽송사 목장승(경남 민속자료 제2호) 2기는 불법수호를 위한 신장상으로 1910년경 만들어졌다. 이들은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현재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돼있다.

장승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구분하여 보면, 첫째로 선인의 얼굴을 새긴 원시공동체의 신앙대상물로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부락수호와 방위수호기능을 가진 법수 혹은 벅수가 있고, 두 번째로는 신라,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사찰의 산천비보 장생표(長生標)가 있으며, 세 번째로 읍락의 비보, 성문수호나 사찰의 호법 또는 노표, 경계표, 금표로서의 장생(長)이 있고, 네 번째로 기자장승, 안내장승, 시국장승 등이 있다.
사찰입구에 장승을 세우는 전통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에 세워진 장승들로는 보림사장생표주(寶林寺長生標柱), 운문산선원장생(雲門山禪院長生), 통도사비보장생표(通度寺裨補長生標), 통도사국장생(通度寺國長生), 도갑사장생(道岬寺長生), 안악연등사장생표(安岳燃燈寺長生標)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장생으로 표현되는 특징을 보인다. 장생이 신선사상의 장생불사(長生不死)에서 차용된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신라, 고려시대에 사찰입구나 주변에 만들어 세운 장승들은 대체로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거나 도선이 세운 비보사찰과 연관되어 만들어진 것들은 비보나 방위표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숭유정책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게 되면서 신라,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장생표의 설치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단지 사찰의 청정법역을 지키는 호법장생(長)이 만들어져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지게 되는데, 그 형태는 이전의 기둥형, 비석형, 돌무더기형에서 선인이나 귀면같은 얼굴을 가진 우상형(偶像形)으로 변화된다.
초기에 만들어진 호법장생은 불법수호가 주된 임무였으며, 기둥에는 방생정계(放生定界: 순천 선암사 목장승), 호법선신(護法善神: 순천 선암사 목장승), 가람선신(伽藍善神: 하동 쌍계사 목장승), 외호선신(外護善神: 하동 쌍계사 목장승), 호법대신(護法大神: 함양 벽송사 목장승), 금호장군(禁護將軍: 함양 벽송사 목장승) 등과 같이 경내의 청정함이나 사찰수호를 염원하는 명문이 새겨졌으나, 점차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예천 용문사 목장승, 나주 운흥사지 석장승, 남원 실상사 석장승),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 상주 남장사 석장승),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나주 불회사 석장승), 삼원대장군(三元大將軍: 예천 용문사 목장승), 주장군(周將軍: 나주 불회사 석장승, 영암 쌍계사지 석장승), 당장군(唐將軍: 영암 쌍계사지 석장승) 등과 같이 중국의 장군이름이나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 실상사 석장승), 금귀대장(禁鬼大將: 해남 대흥사) 등과 같이 벽사에 관련된 명문을 새겨 넣었다.
사찰입구에 만들어 세운 호법장생들은 시간이 갈수록 불법수호라는 고유의 기능으로부터 변질되어 마을수호, 방위수호, 산천비보 기능을 가진 법수, 장생 등과 큰 차이가 없어지게 된다. 장승에 새긴 명문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 일반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며, 세우는 장소도 사찰이 위치한 마을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찰 가는 길에 만들어 세운 장승 가운데에서 함양 벽송사의 목장승과 남원 실상사의 석장승은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 장승들은 역사성 및 조형성 등으로 볼 때,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장승, 수호신장과 비보 기능 갖춰
신라때부터 사찰 입구에 장승 세워
벽송사 목장승, 실상사 석장승 대표적
조형물 취급 배제 본래기능 찾아야

벽송사 목장승 2기는 불법수호를 위한 신장상으로 1910년경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며, 현재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는 절 들어가는 길에 좌우로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보호각 안에 나란히 세워놓았다. 왼쪽에 세워진 장승은 ‘금호장군’이라고 음각되어 있는데, 머리부분이 불에 타 없어져 버려 온전한 형태를 볼 수 없으나 둥글고 큰 한쪽 눈이 남아있어 대강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몸통에 ‘호법대신’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오른쪽 장승은 그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장승은 길쭉한 머리에 왕방울 눈과 커다란 주먹코가 특징인데, 언뜻 보기에는 무서워 보이지만 익숙해지면 해학적이어서 친근해 보이기까지 하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장승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실상사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된 석장승 3기가 있는데, 3기 모두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는 4기가 있었으나 큰물이 나서 1기가 떠내려갔다고 한다. ‘대장군’이라고 새겨진 장승의 대석에는 1725년에 세웠다는 명문이 있어 이 장승들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상원주장군’이라고 새겨진 장승은 둥글고 큰 눈이 툭 튀어나오고, 유난히 큰 주먹코가 특징적으로 보이는데,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 자세히 보면 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에는 벙거지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다. ‘대장군’이라고 새겨진 장승은 이마 중앙에 백호가 새겨져 있으며, 눈꼬리가 양쪽으로 치솟은 퉁방울눈에 주먹코, 위쪽으로 치켜 올라간 입꼬리가 특징이다.
‘옹호금사축귀장군’이라고 새겨진 장승은 다른 장승들과 마찬가지로 벙거지를 쓰고 있는데, 다른 2기의 장승에 비해 눈꼬리가 양쪽 위로 약간 올라가 있으며, 적당한 크기의 주먹코가 균형있게 자리를 잡고 있다. 송곳니가 보여 약간은 위협적이기도 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 장승도 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실상사의 석장승 3기 역시 불법수호를 위한 신장상으로 보아야 하겠는데, 원래 4기가 있었다고 하면 사천왕처럼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최근에는 장승을 일반적인 조형물처럼 취급하여 장소성에 상관없이 아무 곳에나 세우거나 또는 많은 숫자의 장승을 조합하여 군식하기도 한다. 물론 장승이 한국성을 보여주는 대상이어서 장승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강조하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은 좋으나 장승이 가진 본래적 기능에 대한 이해 없이 무분별하게 세우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끝〉

백장암 들어가는 길에 세워진 목장승.
보림사 가는 길에 세워진 석상
실상사 석장승(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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