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한 점의 마음, 바로 이 중심에 부처가 있습니다

▲ 삽화 최주현

이번 호부터는 큰스님 법문 내용 중에서 발췌하여 답변해 드립니다.

마음 비우면 행복해질까요?
문) 인생의 행복이 뭘까요? 처음에 가정을 이룰 때 잠시 행복을 맛보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 걱정, 자식 걱정으로 사는 낙이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답) 여러분이 자랄 때 빼고 늙은 뒤에 빼고, 살면서 얼마나 행복을 느꼈습니까? 행복이 얼마나 됩니까? 이것저것 자는 것 빼고 이것저것 걱정하는 것 빼고, 이것저것 다 빼고 나면 행복이란 그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 어느 때고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그 백이 자기를 즐겁게 행복하게 해 주는 겁니다. 마음이란 너무나 광대하고 무변해서 마음이란 이름은 하나 가졌지만 그 마음이라는 이름 가지고 얼마나 많은 마음을 씁니까. 그래서 마음은 없는 게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많이 있어서, 그리고 돈도 안 내고 쓰는 마음이라 그저 아무렇게나 그냥 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막 해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부부지간도 자식지간도 모두 누구나 대신 살아 주는 사람 없습니다. 아파 주고 죽어 주고 깨달아 주고 똥 눠 주고 잠자 주고 또는 밥 먹어 주고, 이러는 거 대신해 주는 거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제각기 모두 이 마음을 좀 연구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묘하고 미묘한지, 여러분은 자식들이 잘못하면 배울 시기에 배우지 못하고 저렇게 그냥 저런다고, 배울 시기에 못 배우면 뭐, 깡통을 차느니 뭐 어쩌느니 하고 욕을 합니다. 뭐 깡통을 찰 녀석이라든가, “너는 평생에 그럭하고 지내려느냐.” 하고 욕을 막 하죠.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욕을 하고 그렇게 하면 그대로 되는 겁니다, 그냥.

그러나 남편이든지 자식이든지 아내든지 아무리 잘못한다 하더라도 ‘아, 이 세상에는 그냥 만난 인연이 아니다.’ 이 세상 살아나가는 거 가만히 보세요. 금방에는 금이 있고 넝마전에는 넝마가 있고 깡통전에는 깡통이 있고 무쇠전에는 무쇠가 있습니다. 끼리끼리 말입니다. 상점에 가 봐도 사과는 사과대로 놓여 있고 배는 배대로 놓여 있고 끼리끼리 모두 놓여 있습니다. 그게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인연에 따라서 다 만난 인연들인데 만날 탓을 해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인연을 만난 거지,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인연이 됩니까? 자기가 있으니까 만난 거 아닙니까. 똑같이 인연에 따라서, 똑같은 차원에 따라서 만난 겁니다. 그런데 남의 탓을 한단 말입니다.

당신이 그 따위로 하니까 망했다는 둥 또 잘됐으면 내가 잘해서 잘했다는 둥,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니 무슨, 무슨 애정이 그렇게 있겠습니까, 그렇게 싸우는데. 점점 식어가지. 그러니까 행복은 없어지는 거죠. 행복을 누가 갖다 주는 게 아닙니다. 행복은 우리가 만들어서 행복한 거죠. 그러니 그렇게 해서 우리가 끼리끼리 만나서 그러는데, 자식들도 부모가 싸우는 거 보고 그대로 배우거든요. 싸우기만 하는 걸 배우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걸 다, 보지 않는 것 같고 듣지 않는 것 같지만 다 그대로 영향이 미친단 말입니다.
그뿐이 아니죠, 또. 그렇게 하면은 모두가 파산이 되고 또는 행복하지 못하니까, 예를 들어서 남편이 잘못했다면 아내가 ‘아, 이것도 끼리끼리 만나서, 내가 있으니깐 저 남편을 만난 거니까 모든 게 내 탓이다.’ 하고 들어오면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러운 행동을 해 준다면 그렇게 잘못하다가도 ‘아, 내가 이렇게 잘못을 하는데도 이렇게 부드럽게 해 주니….’ 하고 따뜻한 데로 고이게 마련이거든요. 그렇게 하고 또 부인이 그럴 때 남편이 그러고, 자식이 그럴 때 부모가 그렇게 하고, 그걸 자식이 잘못한다고 부모가 “요놈의 새끼! 어디 가서 자빠져 잤느냐. 어디 나가서 이렇게 있었느냐.” 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죠. 말이란 행동으로 붙들거나 말로 붙들어서 그게 오는 게 아니에요. 마음으로 고장난 거는 마음으로 고쳐야죠. 마음으로 ‘너만이, 주인공은 둘이 다 똑같아. 너하고 나하고 둘이 아닌데….' 영 영(0)은 만 개를 갖다가 한데 놓아도 영(0)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둘이 아니죠. 그러니까 벌써 자식이다 부모다 하고, 전기가 가설이 돼 있는 것처럼 가설이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자식과 둘이 아닌데 너만이 해결할 수 있잖아. 너만이 들어오게 할 수 있잖아. 너만이 지혜로울 수 있잖아. 너만이 어디 가서든지 떳떳하게 살게 할 수 있잖아.’ 하고 그렇게 관한다면 저절로, 마음이 거기까지도 불이 들어와서 저절로 집에 들어와서 착해질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모든 게 마음으로서 마음의 조작입니다. 잘못되는 것도 마음이요, 잘되게 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마음의 조작이니만큼 마음으로서 서로서로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빛보다도 더 빨리 연결이 됩니다.

동생들이 힘들다고 손을 내미는데…
문)
제가 맏이이긴 하지만 결혼한 동생들이 조금만 힘들면 저에게 손을 내미니 한두 번은 좋았지만 지금은 너무 얄밉고 힘들어요. 그렇다고 제가 그렇게 넉넉한 편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지혜로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답)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데에 마음을 착잡하게 또는 어둡게 두진 마십시오. 고고한 생명과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모습만 바꿀 뿐이지, 우리의 이 삶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히 남한테 얻으러 다니지 않고, 영원히 남한테 짓밟히지 않고, 영원히 담 밑에 돌아가면서 눈물을 흘리고 남한테 짓밟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바로 올바로 진실하게, 남을 주더라도 무주상 보시로서 주어야, 바로 내가 상을 두지 않고 주어야 상을 두지 않는 그 물건이 바로 나한테 다 있는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그것도 한 통장에 있기 때문에.
어느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맏이로서의 동생 일곱을 다 키웠답니다. 물장사를 해서 키웠답니다, 밥장사를 하고 물장사를 해서. 그랬는데 그 키워놓은 동생들이 언니는 그 고생을 해서 참, 공부도 못하고 동생들을 공부시키느라고 그렇게 했건만 그 고생하고 자기네들을 공부시킨 것도 모르고, 그것이 핏방울인 줄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자기는 구경 다닐 거 다 다니고 없으면 손 벌린답니다.

동생들은 그렇게 자기처럼 고생하지 않으면서, 부모만 그리웠지 고생하지 않고 잘 공부해서 결혼해서 잘사는데도 때에 따라선 조금만 부족하면 와서 막 압박을 하고, 언니는 그렇게 벌어서 쓰면서 왜 주지 않느냐고 그런답니다. 그랬는데 이것이 ‘올바로 사람이 그 뜻을 알고 나간다면 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아주 괴로워했답니다. 그러다가 내가 설법하는 것을 듣고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얘, 바로 쟤가 쓰는 것이 바로 부처가 쓰는 거고,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면 저 애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내가 쓰는 거니까 그냥 내가 써보자.’ 하고서 자기도 없는 걸 빚을 져 가면서 사는데도, 장사를 하기 때문에, 에라 하고 집어 주고서는 ‘이것도 시주다.’ 하고선 줬더랍니다. 주니까는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더랍니다.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다 보니까 그저 조그마한 거 뭐라도 팔려서 고걸 메꿔 나갔답니다.

그랬다고 하면서 “너무도 고맙습니다. 내 마음을 이렇게 넓게, 부드럽게, 사랑할 수 있고 둘로 보지 않게 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이날까지 그 불쌍한 동생들을 키워왔건만 오늘날에 보니까는 내 동생이 언제 적의 내 동생도 아니고 내 동생 아닌 것도 아니고, 모두가 남들이 남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쓸 때 쓰는 것이지 그렇게도 내가 안 써야만 하겠다고 할 필요도 없고, 그 애가 잘못된 거를 아니, 내가 타이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건만 왜 내가 그렇게 내 속을 썩여 가면서 그렇게 싸움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제 싸움 안 하렵니다.” 그러면서 고마워하더군요. 그러니 우리가 남을 주어서 쓰는 것도 자기가 쓰는 겁니다.

그러나 공자, 노자도 얻으러 온 사람도 주지 않을 사람은 주지 않아야 되느니라 했습니다. 그건 나도 똑같이 말합니다. 왜 그러냐. 그 뜻을 모르고, 고마운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함부로 하는 사람 앞에는, 남한테 기대기만 하는 사람, 이런 사람한테는 천만 냥을 보태 주어도 그건 온데 간데가 없고, 오히려 반성하는 기간이 늦어져만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지 않는 것도 공덕이 되고, 주는 것도 공덕이 되고 이러는데 모든 걸 공덕이 되게 하려면 우리가 이 한 점의 마음, 바로 이 중심에 부처가 있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일체 만법의 만 부처가, 그리고 만 생활이 다 이 한 점의 마음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게 나고 들고 하는 것이 이 한 점에 있기 때문에, 내 한 점의 마음을 알아야 모든 것을 그렇게 오관을 살펴서 정밀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거지만,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할지라도 올바로 진실을 안다면 그게 바로 깨달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바로 나 자체를 모르고 진실치 못하고 거짓으로만 나가거나, 나의 어떠한 이름이나 직위만 탐을 내는 그러한 가상스러운 인생살이는 하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나부터 진실하고 나부터 알아야 모든 살림살이가 아마 적당하고 소소영영하게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 햇빛이 따뜻하게 아주 쨍쨍 쪼여 보십시오.
그러면 입었던 옷도 훨훨 벗어버립니다, 원리가.
그러나 아주 그냥 강하게 추위가 닥치고 모진 바람이 몰아닥칠 때는
반드시 옷을 더 껴입고 더 옹그리고 더 조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도 어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그 자식이 되고 남편이 돼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시고
한번 안으로 굴려보는,
다시 한 번 바꿔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러한 그 마음의 굴림이
여러분의 삶의 의지와 보람 있는 삶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런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안 맞으면 말이 하기 싫어져요
문) 저는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서 상대가 제 마음에 맞지 않으면 말이 하기 싫어지고 그러다보니 관계가 서먹해집니다. 그러니까 집에서는 남편도 자식들도 저를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어떡하면 좀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요?
답) 왜 이런 게 있지요? 그 속으로다가 ‘아이구, 저놈이 저렇게 마음을 먹고 있고 저렇게 하고 있으니….’ 하다가도 그 사람하고 같이 얘기를 해 보면은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사정에 의해서 뭐가 있어요. 꼭 사정이 있단 얘깁니다. 그러면 이것을 대화를 하다 보면은, 자식하고나 부부지간이나 부모지간이나도 말을 해서 놓으면은 이것이 풀어진단 말입니다. 근데 자기 말은 없이 속으로 말은 안 하고 이것을 그냥 꾸욱 웅크려 물고선 그거를 아예 풀질 못하고는 있으면 영 그게 착이 되고 업이 된다는 뜻이죠. 그러니 그런 게 다 병도 되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그냥 웃으면서 말을 이렇게 해 버리는, 그 함이 없이 하는 말, 남이 듣기 좋은 말로 웃으면서 그냥 하면은 그쪽에서도 “내가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됐던 거야.” 하고 말이 좋게 나옵니다. 그러면 오해가 풀리는 겁니다. 그런데 모두가 자기 생각만 했지 남의 사정 있어서 그런 거는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이 한 번쯤 돼 보고 다시 한 번 안으로 굴려서 좋은 말로 옮기도록 노력해 보세요.

마음으로 안으로 굴리지 않는다면은 그 길은 밝아지지 않습니다. 이 마음의 굴림에 의해서 앞날이 펴지고 앞날이 밝아지지, 거죽으로만 ‘얘야, 너는 어떡하고 어떡하고 어떡하고’ 말이 많고, 이거는 똑바로 가르치겠다고 하는 그 말 자체가 바로 오히려 비뚜로 나가는 수가 100% 될 수가 있죠. 남편도 자꾸자꾸 이것을 이렇게 “당신은 왜 이렇게 합니까. 지금 세상에 이렇게 해 가지고 삽니까.” 하고 그렇게 해 봤던들 오히려 그런 걸 번연히 알면서도 이것은 주장을 잡지 못합니다. 오히려 파괴가 됩니다, 알면서도. 이걸 아셔야 됩니다.

저 햇빛이 따뜻하게 아주 쨍쨍 쪼여 보십시오. 그러면 입었던 옷도 훨훨 벗어 버립니다, 원리가. 그러나 아주 그냥 강하게 추위가 닥치고 모진 바람이 몰아닥칠 때는 반드시 옷을 더 껴입고 더 옹그리고 더 조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그 자식이 돼 봐 주는, 내가 자식이 돼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지고서 한번 안으로 굴려보는 그런 마음을 가지시면, 또 남편이 어떡할 때 내가 한번 남편이 돼서 다시 한 번 바꿔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그러한 그 마음의 굴림이 여러분의 삶의 의지와 보람 있는 삶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런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한 분만 모시는 이유
문) 다른 절에 가면 신중단이니 지장전이니 관음전이니 대웅전 외에도 여러 보살님들을 모시고 있는데 스님께서 부처님 한 분만 고집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답) 양 무제가 그렇게 절을 짓고 별의별 짓 다 하고, 옷을 갖다 주고 먹을 걸 다 갖다 주고 그렇게 시주를 많이 했는데도 달마 대사는 서슴지 않고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했다 할지라도 공덕은 하나도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타신을 찾아서 빌면 모든 것을 태산같이 차로 실어다가 놓고 빌어 봐도 그건 공덕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무를 본다면 그 나무 몸체와 가지와 잎새, 그 모든 것을 위해서라면 어디다 물을 줘야 됩니까? 뿌리에다 물을 줘야 바로 이파리도 싱싱하고 모든 게 다 싱싱하고 열매도 굵고 크게 열립니다. 뿌리에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해서 그렇게 가꿔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자기 뿌리에다 주질 않고 항상 남의 이름을 찾고 모습을 찾고 온통 야단입니다. 이 이름 찾고 저 이름 찾고, 칠성을 찾아서 명을 길게 해 달라고 빌질 않나, 또는 지장을 찾아서 좋은 데로 가게 해 달라고 그러질 않나, 또는 용신을 찾아서 물에 가더라도 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그러질 않나, 지신을 찾아서 길에 가다가 급살을 맞지 않게 해 달라고 하질 않나, 약사를 찾아서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그러질 않나. 그저 요기 놓고 빌고 조기 놓고 빌지 않으면 마음들이 개운칠 않아서, 만약에 요기 놓고 요기 놓질 않으면 ‘아이구, 우리 남편이 잘 안되면 어쩌나. 우리 자식이 잘 안되면 어쩌나?’ 이런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처럼 그 관습에 의해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한 아버지에다가만 약속을 하면 됐지, 한 아버지에게만 약속을 하면 그 아버지가 남편 노릇 할 때에 또 할 거고 자식 노릇 할 때도 할 거고 다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식이 따로 있고 남편이 따로 있고 아버지가 따로 있고 할머니가 따로 있고 형님이 따로 있는 줄 안단 말입니다, 모두. 부처님의 마음이, 그래서 생각을 내셔서 이름을 지어 놓은 것이 동방에는 아촉이요, 서방에는 아미타요, 이 세상 사바세계에는 관세음이요, 지천국에는 지장이요, 모든 사람들이 그 병고에 휘달리는 데에 응해 줄 수 있는 거는 바로 약사보살이요, 이렇게 이름을 지어 놨단 말입니다. 이래도 이해가 안 갑니까? 한 부처님이 하시는 거나 한 가정에 아버지가 하는 거나, 이게 비유를 한 겁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앞에 다 얘길 해도 되는 건데 그만 요기 갖다 놓고 빌고 조기 갖다 놓고 빌고….

그것이 어디서 생긴 거냐. 이조 때 불교를 탄압할 때, 스님들이 도대체 먹고 공부할 수가 없어서 산신이니 독성이니 칠성이니 죄 이렇게 이름을 붙여 놓은 겁니다. 예전에는 정성을 들이면 쌀 한 말이면 큰 됫박 말이었죠. 부처님한테 그거 한 말만 갖다 놓으면 뭘 먹고 공부를 합니까. 그러니까 여러 군데다가 갖다 놓고 빌어야만이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그렇게 했던 겁니다. 그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지는 이상에는 좀 그것을 알아서 좀 벗어나기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영 벗어나질 못하고 있어요. 이렇게 종교에 자유스럽고 한데도 말입니다.

삼독심에 대해서
문) 불교의 견해에서 보면 공부의 제일 큰 장애가 삼독심이라 알고 있는데요, 탐진치 삼독을 끊기란 참으로 보통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삼독심에 대해서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답) 탐진치는요, 남의 걸 탐을 내고 집착을 하고 욕심을 부리고,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분수를 모르고 뛰다가 물에 빠지는 격이죠. 그런 거를 삼독심이라고 합니다. 바로 우리 생활에 해당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욕심부리고 그러는 거, 그런 모든 걸 욕심 안 부리게 하는 것도 너뿐이야. 집착 안 하게 하는 것도 너뿐이야. 주인공, 너뿐이야. 집안에, 가정에 어떠한 일이 생겼을 때도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아프면 낫게 해주는 것도 너뿐이야. 의사들이 봐 준다고 해도 50%밖에는 못 봐 주니 50%만은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그냥 일임하셔야 합니다.

삼독심이 있다고 삼독심은 뭡니까, 뭡니까 그러다 보면 언제 여러분이 살다가 죽어도 모를 겁니다. 자기 주인공에 모든 걸 관하면서 그렇게 하다 보면 체험을 하게 되고 자기와 자기가 통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환하게 알아져요. 그러니 이 빛보다 더 빨리 초월해서 돌아가는 이 시대에 그것을 언제 배워서 언제 살다가 가렵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본래 욕심부린다는 것도 알고 있고, 집착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잘못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이렇게 하면 나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 겁니다, 본래. 전부 알고 계시죠? 그걸 좀 대담하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인공, 이런 거 나쁜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너만이 그렇게 안 하게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 일임하는 겁니다. 그러면 입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삼독심이라는 생각도 뛰어넘어야 될 수 있는 한계가 왔다고 봅니다. 
 

[894호 6월 27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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