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원망하기 이전에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릴 줄 알아야

▲ 삽화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러면 그것을 리드해나가는데 어떻게 리드해나가야 되느냐? 부처님 법은 이렇게 한다도 없고 저렇게 한다도 없습니다. 왠 줄 아십니까? 고정되게 딱 붙어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마다 닥치는 대로 대치해나갈 수 있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바로 함이 없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가 이거를 한다 하고 하는 게 부처님 법이 아니라, 내가 힘이 있으면 그대로 함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대치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놓고 아파하는 거는 어쩔 수 없는 거죠.

삼풍백화점에 그 난리가 난 것도 바깥으로만 끄달리고 자기 콩씨는 짐작해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거죠.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자기를 침착하게 들여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벌써 이런 공부하는 분들은, 진짜로 자기 콩씨를 믿고 그런다면은 그렇게 무너지게 짓지도 않겠지만 어느 옆이 잘못됐으면, 벌써 통하게 되죠. 통하질 못하면 하다못해 꿈으로라도 그냥 보여줘요. 이런 예가 있죠. 집을 짓는데 이 공부 하는 사람의 꿈에 그러더랍니다. “야! 이쪽이 잘못됐으니까 이쪽을 봐봐. 가서 봐봐. 거기를 한번 이렇게 헤치고 봐봐!” 이러더랍니다. 그래서 보니까 거기 뭐가 딱 그냥 모래하고 양회가 같이 들어가서 콱 메워져서 그냥 요지부동이더랍니다. 그거를 만약에 다 해놓고 그랬으면, 집 반쪽을 다 헐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됐으니까 아주 탄복을 했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공부 하는 자체가 벌써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콩씨가 콩싹을 형성시켜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산다고 아주 그냥 야단들이거든요. 자기가 사는 게 뭐 있습니까? 물 한 모금을 먹어도 혼자 먹지 않고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서로서로 먹고 사는데. 이거는 과학적이기도 하고 천문학적이기도 하고 의학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하고 어느 과목이든 들어가지 않는 과목이 없어서 심성천체물리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禪)과 학(學)은 둘이 아닙니다. 몸과 자기 불성도 둘이 아닙니다. 콩씨와 콩싹이 둘이 아니듯이 떼려야 뗄 수가 없죠, 그거는. 콩싹이 없어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콩싹이 없으니깐요. 진짜로 ‘아이고, 나는 바빠서 할 사이가 없어서 못합니다.’ 요러는 사람도 있거든요, 또. 하하하. 그럴 때 보면요, 난 저절로 웃음이 나고 아주 죽겠어요, 그냥. 허허허. 아니, 세상 살아나가는 게 그냥, 자기가 태어나서 살아나가는 게 자기가 태어났으면 콩씨가 콩싹을 형성시켜서, 자기가 또 콩씨를 만들려고 이렇게 하는 건데, 그러고는 살아나가는데 아이, 글쎄 누가 백일 기도를 하랬나, 누가 삼천배 절을 하랬나, 응?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좀 앉아서 ‘주인공(主人空), 너만이 네가 있다는 증명을 해줄 수 있어.’ 하고 관(觀)하고, 또 여유가 없으면 그냥 서서 일하면서도 그렇게 관하고, 앉으나 서나 변소에 가나 ,더럽고 깨끗한 게 불법엔 없으니까, 변소에 가나 어딜 가나 자기가 있는 자리에 있으니까 다 그냥 통하는데 뭐가 바빠서 못합니까, 글쎄. ‘난 참, 아이 바빠서.’ 하하하. 이렇게 모르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바깥으로만 끄달리던 분들도 안으로 관하기가 그렇게 어렵답니다, 그렇게.

그러니 여러분은 진짜 내가 있으니깐 모두가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고, ‘콩씨와 콩싹은 떼려야 뗄 수 없구나’ 하는 걸 생각하세요. 또 자손들도 그렇습니다. 업으로 자손을 낳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원수로 자식이 생기는 수도 있고 또 선업으로 자식이 생기는 일도 있고 천차만별입니다, 그 자식이라는 게. 그렇다면은, 자손들도 원수로 태어났다면 말도 못하게 가슴에 못을 박게 됩니다. 또 선업으로 태어났다면 그 가슴에 그렇게 좋은 결과를 주어서 흥락하게 만듭니다. 또 원수가 아니고 업장으로다가 만났다 이런다 하면은, 극하게 그렇게 나가서 그냥 온통 그 속을 썩힙니다.

그러니 그것을 녹이려면은 말로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때려도 아니 됩니다. 말로 한다면 오히려 더 빗나가요. 아주 듣기도 싫어하구요. 그리고 만약에 때렸다 하면은 ‘아이 요놈, 때렸어?’ 하곤 그냥 또 나가죠. 허허허. 여러분 참 경험 많이 하실 겁니다. 그런데 요거를 녹이는 방법이 어떤 거냐. ‘업장이 생기게 한 것도 너고 업장이 안 생기게 한 것도 너고 그러니까 나는 더불어 같이 공(空)했어. 나는 내가 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저지른 것도 아니고, 모두가 너만이 해결을 할 수 있어.’ 그러곤 그냥 딱 거기다가 맡겨놓고 지켜보기만 하라 이런 겁니다. 개미도 나가서 자기가 배가 고프면 먹을 줄 아는데 어찌 사람이 나갔는데 자기 살 궁리 안 하겠습니까?

또 한편으로는 돈을 많이 줘서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려움을 몰라요, 귀한 거를 모르고. 얼마나 어렵게 돈을 벌어서 산다는 그 자체를 또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마구 사는 거죠. 그러면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돈을 주는 것도 너무 적게 줘도 안 되고 너무 많이 줘도 안 된다 이겁니다. 그리고 항상 마음으로 그렇게 같이 불이 들어오게, 항상 같이 들어오게 하십시오. 한방에서 같이 사는 식구인데 착이라고 할 건 없지만 어찌 사랑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진짜 사랑을 하려면 ‘너의 주인공과 내 주인공이 둘이 아니거늘 어찌 너한테는 불이 안 켜지랴. 다 한마음으로서, 밝은 마음으로서 대치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도 주인공, 바로 너뿐이 아니냐.’ 하고 자꾸 관해준다면 나갔던 놈도 그냥 기를 쓰고 들어올 겁니다, 아마. 이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때는 주인공, 주인공 이름만 찾고 그러고선 “아휴! 나갔던 사람이 안 들어옵니다.” 이러거든요. 그리고 “아팠던 사람도 이렇게 잘 낫질 않습니다” 이러거든. 그래 내가 의사냐? 하하하. “내가 의사라서 그렇게 고쳐주냐? 너한테 너 자체의 한마음이 천차만별로 화해서, 마음이 화해서 돌아가는데 어찌 의사는 안 되겠느냐? 아프면 의사가 돼주고, 명이 짧으면 칠성(七星)이 돼주고, 또는 좋은 데로 못 가면 지장(地藏)이 돼주고, 가난하고 일이 생기면 관세음(觀世音)이 돼주고, 물에서 사는 사람은 용신(龍神)이 돼주고, 조왕이 돼주고, 지신이 돼주고 다 그렇게 천차만별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돼주는데 뭐가, 뭐가 잘못됐느냐? 네가 마음이 잘못됐기 때문이니까 너 알아서 해. 내가 만약에 할 줄 알아서 내가 해줬다 하면은 너는 아주 구할 길이 없어.” 이렇게 해나가고 이렇게 겪어나가고 있습니다.
허, 나도 애로가 없다고는 못 보나 때로는 이럽니다. ‘에이, 그냥 그럭하는 거, 그냥 자기 탓인데, 뭐. 과거로부터 자기가 지어서 자기 탓으로 온 건데, 뭐. 그렇게 복잡한 거를 나한테다가 뭐 어쩌구저쩌구. 아이그, 다 알아서 해.’ 이러고는 팽개쳐버리려 해도, 그렇게 마음이 울적했다가도 ‘아니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럽니다. 나 같은 사람 뭘 보고서 왔겠는가. 나의 고깃덩어리를 보고 오지는 않았을 텐데. 잘났든 못났든 그 마음이 아리땁지 못하다면, 그리고 같이 한마음이 돼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사랑보다도 자비가 없다면 내가 될 수 없고, 내 아픔이 될 수 없고, 내 도량이 될 수 없고, 바로 더불어 같이 살 수 없으니 어찌 내가 아니랴.

한 사람을 건지려면은 과거로 수백 번 돌아가고 수천 번 돌아갔다 오고, 이렇게 마음이 이런 짓을 해야만이 그것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지어가지고 현실에 모두 나온 사람들이 만약에 짐승으로 돼 있다거나 사람으로 돼 있다거나 그러면 그쪽으로 또 몇 집을 걸러야 되겠죠? 여러분은 알지 못하니까 아, 내가 과거에 어떠한 사람하고 어떻게 인연이 돼서 이렇게 됐나 하고 괴로워하시겠지만 괴로워할 것도 없죠. 내가 할 일만 하면 되니까.

질문하실 분 있으면 질문하세요. 어느 때든 내가 시원찮게 얘길 하더라도, 용어가 잘 되지 못해서 시원찮게 얘기를 하더라도 직감적으로 여러분이, 배운 여러분이 생각을 잘 해서 지혜롭게 들으세요. 그래서 아주 마음 깊이 지니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목적을 두시고 진지하게 생각하세요.

질문자1(남): 큰스님, 큰스님의 자비한 은혜에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큰스님의 자비하신 말씀에 언제나 삶의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수행해가고 있습니다. 제가 또다시 큰스님의 자비의 말씀을 듣고자 이 자리에 질문을 올리게 됨을 무한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왜 죽어가는 이 육신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의 길을 걸어가는지요?
큰스님: 아까도 얘기했지 않습니까? 콩씨를 믿고 콩싹은, 예를 들어서 댁의 몸뚱이 속에 들어 있는 생명체들이 전체 살고 있는데 댁은 그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관리인이며, 즉 말하자면 집합소밖에는 될 수 없죠. 그런데 항상 내가 산다고 하니까 거기서 돌봐주지 않는 거예요. 한마음이 돼야 이게 작용을 해줄 텐데 한마음이 돼주지 않는다면은 대뇌로 통신이 되질 않아요. 대뇌에 통신이 돼야 중뇌에서 책정을 내려서 사대(四大)로 통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아프다고 집착만 하지 마시고 전체 주인공에, 말하자면 전체 주인공의 일이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댁의 몸뚱이 한 덩어리에 생명체들이 헤아릴 수 없이 산다면 한 덩어리가 한마음으로 살고 있는 어떤 한 개체지, 혼자 살고 있습니까? 그러니 좀 마음을 넉넉히 써서 ‘네가 끌고 가는 거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고 좀 맡겨봐요. 그리고 죽는다 산다를 떠나봐요, 좀. 응? 죽이든지 살리든지 제가 끌고가는 거 제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제삼자인 내가 그렇게 애씁니까? 아, 생각해봐요, 글쎄. 자기가 형성시켜서 자기가 끌고 가는 집이 헐어졌으면 집주인이 고쳐야지, 왜 집이 걱정을 해야 합니까? 응? 이 집이 헐어졌으면 이 집 지은 사람이 고쳐야지, 왜 이 집이 걱정을 해야 합니까? 안 그래요?

질문자1(남): 네. 그리고 우리는 왜 사람들끼리 서로가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며 타인을 헐뜯어야 하는지요. 이것도 이때까지 지내온 습과 인연의 소치인지요?

큰스님: 뭐라고 그랬는지 잠깐 어디 갔다 왔는데, 내가. 하하하

질문자1(남): 왜 사람들끼리 서로가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며 타인을 헐뜯어야 하는지요? 이것도 이때까지 지내온 습과 인연의 소치인지요?

큰스님:그렇습니다. 그것이 모두가 내가 이 세상에 났기 때문에 세상도 벌어졌고 상대성도 생겼고, 종교도 생겼고, 가정도 생겼고, 자식도 생겼고 그런 건데, 내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잘하든 못하든 남의 탓으로 돌리니깐 그렇죠. 기껏 투자를 해놓고 그게 잘못되면 그탓으로 돌리는 거야. 그냥 가게도 기껏 얻어서 그게 잘못되면은 네가 잘못해서 그랬느니 마느니 하고 싸우고 헤어지기도 하고 별짓 다 하죠. 이게 뭣들입니까? 이게 부처가 될 수 있는, 99%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사는 행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모두 남의 탓을 하지 말라 이거죠. 

그리고 자식이 잘못해도 자식의 탓을 해서는 안 되죠. 절대로입니다, 이거는. 그건 내 탓입니다, 다 각자. 아내가 잘못해도 그렇고 남편이 잘못해도 그렇고, 또 자식이 잘못해도 그렇고, 내 탓으로 돌려야 그 무질서한 업이 다 그냥 지워집니다, 싹 쳐 그냥. 그런데 그렇질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남을 원망하고 네가 벌었느니 내가 벌었느니 하고, 네 돈이니 내 돈이니 하고, 내가 했지 네가 했니 하고 이러니 그런 문제들이 많이 생기죠. 그러니까 그러지 않게 제일등 가는 인간이 되어서, 제일등 가는 부처로서, 제일등 가는 에너지를 자유스럽게 펼쳐서, 모든 사람들이, 또 모든 생명들이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도량이 돼야죠, 마음의 도량이요.

질문자1(남): 그렇다면 진정한 즐거움과 고통이 무엇인지 큰스님의 자비하신 법문을 재차 상세하게 듣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진정한 고통이라는 것은요, 사실 알고 보면 하나도 없어요. 진정한 고통이라는 것이 왜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내가 있다는 거, 내가 있으니까 무엇을 요구하고 욕망이 있고 착이 있고 욕심이 있는 거지, 이런 것들 때문에 고통이 있는 거지 만약에 내 생명까지도 다 팽개쳤다면 아무것도 붙을 게 없어요. 이 하늘이 지금 당장 무너져서 그냥 납작해진다 하더라도 “허허! 그래?” 이러고 웃을 거예요, 아마. ‘그래.’ 그러고 웃게끔 될 수 있어야 그거를 (손바닥으로 허공을 받쳐 보이시며) 떠받칠 수 있어요, 아시겠어요? 그러니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내가 여러분한테 진정 걱정이 되는 것은 여러분이 하루속히 그저 콩싹이 콩씨를 알아서 영원토록 그 콩씨로 인해서 모두 먹고 콩씨가 되남고, 또 먹고 되남아도 영원하리라고, 끝간 데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공부하시느냐 그것이 제일 걱정이죠, 뭐. 그냥은요, 여러분이 걱정이 있다고 그러는 거, 나는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에 뭔 걱정이 있을까? 지금 당장 그냥 밥을 굶는다 해도 ‘허어, 밥 굶게 하는 것도 너니까 알아서 해.’ 그러고 달랑 나가자빠지란 말입니다. 하하하.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래서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체험한 것을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실천해나가는 그 도리를 모두 기록해서 세계적으로 내보낼 수 있는 공부 재료가 됐으면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우리가 모두 알아져서, 그래서 이러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 불교 하면은 경전이 팔만대장경이 있는데, 팔만대장경으로 이렇게 나누어서 『법화경』이니 『화엄경』이니 또 『금강경』이니 이렇게 모두 있고, 또 강원이나 승가대학, 동국대학에서 배우는 거 이런 것을 볼 때에, 모두가 그 재료로써 내가 배울 수 있게끔 체계를 세워놓지를 않았고, 우리가 또 체계를 세워놓지 않았는가 하면은 그거를 글자 풀이로써만이 해도 아니 되고, 이거는 무(無)의 세계와 유(有)의 세계 즉,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같이 혼합해서 엮어져야만이 되는 일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앞으로 세계적으로도 이런 것을 모두 교재로 내보내서 단란한 우리 지구도, 즉 말하자면은 홀랑 승천해버리게끔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질문자2(여): 큰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쌍파울로 브라질에서 왔습니다.

큰스님: 네.

질문자2(여): 저는 쌍파울로에서 진각사란 절에 다녔습니다. 전 큰스님 말씀마따나 갖다 빌고 내가 달라는 것만 알았지 제 마음공부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을 알고부터는 제 마음공부도 하면서 그렇게 마음공부를 하게 된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고 큰스님 뵙게 된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제가 꿈을 꾸니까 큰스님께서 보따리를 이렇게 조그맣게 가지시고 제 안방에 오셨더라고요.
그 이후에 한국으로 나와가지고 여기에 언니들도 있고 또 우리 동생도 있어서, 한마음선원이 너무너무 이 마음공부하는 데 좋고 그러니 같이 가자고 제가 이끌고 큰스님을 한번 뵈었어요. 그런데 큰스님께서 “개같이 놀면 개로 태어나고, 사람같이 놀면은 사람으로 태어나니까 마음 정진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쌍파울로 브라질에서 옷장사를 해요. 그리고 원단도 수입을 해서 팔고 원단을 또 옷을 만들어서 제가 입은 이 옷도 제가 만들고 제가 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 한국에서 갈 때 너무 애절했어요. 왜? 제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외국생활 하면서 참 한푼 두푼 모으다 보니까 조그만 돈이고 마음은 있지만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큰스님 마음 좀 내주세요.” 그랬더니 “가서 잘 살어.” 그러시더라구요, 큰스님께서. 그런데 아, 지금 제가 한국을 나와서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제가 믿는 법도 틀렸고, 모든 걸 둘로 보았습니다. 제가 주인공을 믿었다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제가 둘로 봤기 때문에 여기 나와서 큰스님 법문을 듣고 정식으로 이 주인공을 믿게 하기 위해서 저를 이끌고 나온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리고 저는요, 마음을 내서 진짜 제 모든 사업이 잘되어 저도 물질이 따라서 지원을 꼭 내고 싶습니다. 큰스님, 마음 좀 내주세요.

스님: 잘 해봐요. 허허허. 댁에가 잘하면 또 갈 수 있는 스님네가 생길 거고 그러니깐요. 댁네가 모두 잘하지 않는다면 스님네들이 있다고 해도 무슨 필요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댁네들이 잘하는 대로 스님네들이 생기는 거지, 허허허. 잘못하면 스님네들이 안 생기지. 그건 그릇대로 가는 거니까. 다 됐습니까, 이제?

 

※위 법문은 1995년 7월 16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863호 6월 20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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