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3호 6월 20일]

 학승이 물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집집마다 문 앞은 장안(서울)으로 통하고 있어.”

 

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師云 家家門前通長安

 

본 〈조주록〉 132번째에 한번 나온 질문이다. 부처님이나 옛 조사 스님들은 움직일 줄 아는 자는 다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불성(佛性), 즉 부처의 성품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한다면 과연 개도 불성이 있을까? 이것이 이 질문의 요지였다. 이 질문에 대해 조주 선사는 ‘없다[無]’고 잘라서 말했다. 비록 축생의 업식성이 강하다고 해도 성품은 변함없는 불성일 것인데, 왜 없다고 대답한 것일까? 이것이 화두가 되었다.

그런데, 같은 질문에 이번 답변은 불성을 인정하고 있다. ‘문 앞의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은 곧 축생도 당연 불성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여기서는 개의 불성을 인정하고, 앞의 132문에서는 왜 개의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이것에 대해서 본 납자가 한 마디로 평을 하자면, 이것이 바로 조주 스님의 정확한 가풍이라고 하겠다.

 

학승이 물었다.

“눈앞에 내놓습니다. 이것이 대의(大意)를 다 보인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저구(底口)!”

학승이 말했다.

“거두어들여도 얻지 못할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자네에게 저구(低口)라고 말했네.”

 

問 覿面相呈 還盡大意也無

師云 低口

云收不得處如何

師云 向你道低口

 

저구(底口)란 ‘입이 바닥에 붙었다’ ‘입이 낮아 졌다’는 뜻이니 ‘할 말이 없어’ 라는 뜻이다. 고난도의 선문답이다. ‘눈앞에 내놓습니다’ 라는 말을 했을 때 분명 도(道)를 들어내 보인 것이 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도를 다 들어낸 것인가? 이에 대해 조주 스님은 가타부타 뭐라고 말이 없었다.

도가 밖으로 나왔다면, 그것을 도로 거두어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거두어들인다 해도 절대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에 대해서 선사는 어떻게 생각할까? 조주 선사는 이에 대해서도 말이 없었다. 왜 조주 스님은 말이 없었는가?

조주 스님의 저구에 대해 본 납자가 평을 한다면, “조주 스님은 절대 밥을 굶지 않는다고 하겠다.” 제방의 납자들이여, 조주 선사가 왜 입을 닫았는지 한번 일러보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눈앞의 일구(目前一句)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나는 자네와 같지 않아.”

 

問 如何是目前一句

師云 老僧不如你

 

선객들은 대개 선사가 한 마디 던지는 목전일구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많은 말을 싫어하고 조촐한 한 마디를 툭 던질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선사들의 목전일구는 그만큼 매우 함축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예를 들어, 저 앞에서 나온 330문 자가본의(自家本意)에 대한 질문에서 학승이 “무엇이 자가본의입니까(如何是自家本意)?”하고 묻는 말에 조주 스님은 “노승은 소 잡는 칼 따위는 쓰지 않아(老僧不用牛刀).”라고 한 마디 던졌는데, 이 목전일구는 사실 대단한 의미가 들어있다. 옛 선사의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았고, 또 자기의 얼굴에도 먹칠하지 않는 기막힌 한 마디이다. 도가 무르익는 납자라면 이 한 마디에 최후의 알을 깨고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번 학승은 목전일구에 대해 직접 물었다. 조주 스님 또한 대수롭지 않게 한 마디를 던졌는데, “나는 자네와 같지 않아.” 라는 말이다. 언뜻 들으면 평범한 말 같지만, 여기서도 선적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들어난 뜻은 당연한 말이다. 질문하는 자와 대답하는 자가 다르고, 선사와 객승이 다르고, 도의 경계가 다르고, 노승과 청년 승이 다르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이 속에 깊은 뜻이 있다. 길 조심해라, 밥 먹을 때 흘리지 마라, 상관이 되어도 겸손해라, 인간은 누구나 붓다이다, 문단속 잘해라 등등의 평범한 말들 속에도 은밀한 뜻이 있다. 납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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