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佛牌)의 기능과 의미

유교 선비 난동 막기 위해
삼보와 함께 발원패 조성 

 

불패는 부처님이나 큰스님들을 주로 모시는 위패(位牌)로 경전명이나 불보살님들의 명호 큰스님들의 법명이나 발원내용들을 적어 불단에 함께 모시는 위패를 말한다.

보통 그 형태는 내용이 적힌 아름다운 조각이 되어있는 위패를 연화대(蓮花臺)위에 놓는다. 위패의 주위를 채운(彩雲)모습이나 보주(寶珠) 등의 모습으로 조각하고 그 안에 모란 연꽃 같은 화훼나 운용(雲龍)같은 문양을 화려한 모습으로 조각해 상단(上壇)에 모신다. 


불패는 보통 하부(下部) 좌대와 상부(上部)의 패신으로 나뉘는데 상단의 모습은 주로 구름을 도상화(圖像化)한다. 그리고 앞면 중앙에 직사각형의 액(額)을 만드는데 그 속에 여러 가지 발원문이나 불명을 넣어 발원하는 경우가 많다.

동화사(桐華寺)에도 여러 개의 불패가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삼보패(三寶牌)와 발원패(發願牌)로 나뉜다. 삼보패는 말 그대로 삼보를 선양하는 세 점의 불패다. 각각 그 액(額)에 나무(南無) 진여(眞如) 불보(佛寶), 나무(南無) 심심(甚深) 법보(法寶), 나무(南無) 청정(淸淨) 승보(僧寶)라고 쓰여 있어서 삼보인 불법승을 모시는 불패임을 알 수 있다.

발원패는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와 세자저하수천세(世子低下壽千歲)라는 두 개의 불패가 있는데 모든 불패가 다 청룡과 황룡이 어우러져 있는 복잡한 문양을 보인다. 더 쉬운 조각방식인 부조방식으로 만들어진 삼보패에 비해 발원패는 황룡과 청룡이 여의주를 쥐고 상당히 어려운 조각방식인 투각(透刻)으로 조각된 유려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그렇다면 왜 불가 최고의 삼보(三寶)와 함께 발원패를 만들어야만 했을까? 그 이유는 의외로 슬픈 사연을 지니고 있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결정한 신라시대를 거쳐 세계 최고의 불교미술품들을 양산한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에 이르러서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한다. 조선의 창건자가 독실한 불교 신자이고 불교의 위력으로 나라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상당히 잔혹한 핍박과 압제를 가한 것이다. 


승려의 도성출입이 금지되고, 여러 종파가 정부의 명령으로 합병되거나 인수되기도 하고, 승려의 숫자를 국가에서 관리하고, 사찰에 속한 직원과 토지를 자의로 수용하기도 했다. 또한 승려들에게 특산물을 생산해 바치게 하는 등 수많은 압박수단을 자행한 것이다.


우리나라 종교사에 있어 기독교의 목사들로 이루어진 군대, 카톨릭의 수사나 신부로 이루어진 장병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의 큰 전쟁에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천, 수만명의 승병을 이끌고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고 청나라의 침입 때도 많은 승병들이 미리 궐기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승가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교 선비들과 관리들은 수시로 사찰에 침입해 승려들을 괴롭히고 사찰에 폐해를 끼치곤 했다. 그 폐혜와 사단(事端)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만든 것이 바로 발원패다. 주상전하와 세자전하의 장수(長壽)를 비는 발원패를 대웅전 부처님 바로 앞에 놓음으로써 유교세력의 행패를 미연에 차단하려하였던 것이다.

주상전하의 발원패가 있는 곳에서 감히 관원이나 선비가 행패를 부릴 수는 없었기에 발원패는 바로 사찰과 삼보(三寶)의 보디가드였던 것이다. 지금 한국불교의 수호자는 누구일까? 흔들리는 위상은 바람 앞의 등불 같은데...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