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2호 6월 13일]

학승이 물었다. “밤에는 도솔천에 올라가고 낮에는 염부제에 내려오는데 그 가운데에 왜 마니보주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무엇을 말하는 거야?”
학승이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비바시불이 일찍이 거기에 마음을 머무르고 있었고, 바로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아직 그 묘리(妙理)를 얻지 못했다.”

問 夜昇兜率晝降閻浮 其中爲什?摩尼不現 師云 道什? 僧再問 師云 毗婆尸佛早留心 直至如今不得妙

대승불교를 높이 천양했던 무착보살(無着菩薩)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지을 때에 밤에는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낮에는 남 염부제인 사바세계에 내려와서 유가사지론을 집필했다고 하는 설화가 있다.
도솔천은 33개의 천국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천국인데, 천국 중에서도 으뜸가는 곳이다. 석가모니불이 사바세계에 오기 전에 머무르던 곳이고, 미륵보살도 미래의 사바세계 부처가 되기 위하여 현재 대기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바시불은 석가모니불 보다 먼저 성불한 6명의 부처님 중에 최초로 부처님이 된 사람이다. 마니보주는 ‘사람의 성품’을 말한다. 사람의 성품은 신비해 때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을 낸다. 그러나 체(體)는 투명해 정작 자신의 색깔은 나타낸 적이 없다. 그렇지만 무착 보살이라면 남다르게 신통이 자재했으니까, 마니보주가 자기 색을 나타나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선사는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우주가 생길 때 최초로 성불한 비바시불 때부터 거기에 마음을 머무르고 있었고, 지금 수많은 조사들도 그것을 사용하고 있으나 그 묘한 것의 정체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옷 속의 보물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무엇을 싫어해서 한 질문이냐?”
학인이 물었다. “그것은 질문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이 보물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그러다간 옷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야.”

問 如何是衣中寶 師云 者一問嫌什? 云者箇是問 如何是寶 師云 與?卽衣也失?

<법화경>에 옷 속의 보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두 사람의 친구가 있었는데 나중에 한 사람은 가난한 자가 되었고, 한 사람은 부자가 되었다. 하루는 가난한 친구가 부자 친구를 찾아갔는데 부자는 가난한 친구가 잠이 든 새에 옷 속에 보물을 넣어놓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가난한 사람이 다시 부자 친구를 찾아갔다. 부자친구는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자네 왜 그러고 다니나?”
“무슨 말인가, 가난한 자가 이렇지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음, 사실 지난번 자네가 잠들었을 때 나는 자네의 옷섶에 보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네. 나는 때가 되면 자네가 그것으로 부자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자네 그 보물을 어떻게 했나?”
가난한 사람은 그때서야 옷섶을 뒤져보니 정말 보물이 있었고 알고 보니 자기는 큰 부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설화의 뜻은 중생은 원래 부처이고 행복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스승을 만나서야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을 싫어해서 한 질문이냐?”라는 말은 네가 이미 보물을 가지고 있는데, 또 무슨 보물을 찾느냐는 반문이다. 그러자, 학인이 곧 알아듣고 그러면 무엇이 보물인가 물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그러다간 옷마저 잃어버리고 말 것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하고 다니면 손해가 더 많다는 말이다.
자기 팔과 다리에 대해서 남에게 질문할 필요가 없다. 자기 신체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가 더 잘 알아야 정상이다. 매순간 보물을 쓰고 있으면서 자기가 쓰고 있는 물건에 대해 남에게 묻는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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