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호 5월 30일]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충언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너의 어머니는 추하고 못생겼다.”

問 如何是忠言 師云 ?娘醜陋

백 마디의 설명보다 직접 체험한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선사들은 학승이 느끼고 체험하게 하는 교육을 즐겨 사용한다. 조주 선사가 그대의 어머니를 면전에서 욕했다면 그대의 심리는 어떠하겠는가? 중생은 충언에 분노가 일어나고, 깨달은 자는 충언에 담담하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도 초월하는 것입니까?”
조주 스님은 박장대소했다.

問 如何是佛向上事 師便撫掌大笑

계율에 출가 수행자는 대저 큰소리로 웃고 떠들면 안 된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사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좌선이나 경을 읽고 있는데 나 혼자 떠들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출가 수행자의 계율은 그것을 범하면 갑자기 하늘이 내려앉을 정도의 큰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남을 배려하고 자비심을 내게 하는 차원에서 정해진 것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계율은 상당히 융통적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볼 때 원효 스님, 진묵 스님, 경허 스님 등은 다 술을 좋아했는데, 술을 마시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주로 자신에게 더 피해가 많이 가기 때문에 적당한 정도는 스님이라 해도 마셨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행위는 일단 부처님의 계율을 벗어난 행위이다. 당연히 문제가 될법한데도 고승들이 한결같이 문제 삼지 않는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 마지막 단계는 부처도 넘고 조사로 넘어가야 한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대저 계율이라는 것은 유치원에 간 어린 자들에게 질서를 위해 설정해놓은 것이지, 부처도 뛰어넘고 조사도 뛰어넘은 향상인(向上人)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다. 이런 향상인들이 많을수록 이 땅이 어지러워지는 것이 아니고 창의적인 불교가 되는 것이며, 태평한 세계가 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향상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자일까? 향상인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계율도 무시하고 조사도 밟아버리고 우주의 주인이 되어 하하하 박장대소를 할 수 있는 기개 있는 자이다.
학승이 물었다.
“하나의 등불이 백천 개의 등불을 불붙인다고 합니다만 그 하나의 등불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은 한쪽 신발을 발로 툭 차버렸다. 그리고 또 말했다.
“선장(禪匠)이라면 그렇게 묻지 않아.”

問 一燈燃百千燈 一燈未審從什?處發 師便?出一隻履 又云 作家卽不與?問

노대가의 답변이 뒤로 갈수록 지극한 선기(禪氣)를 담고 있다. 여기서 하나의 등불은 한 사람의 붓다이다. 한 붓다가 나오는 것은 한 밤중에 횃불을 가지고 나타난 것과 같다. 중생들은 암흑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불빛을 보면 모두 다가와 불을 붙여간다. 그리하여 암흑의 세상이 환한 대낮과 같이 밝아지게 된다.
그런데 수많은 등불을 붙이는 그 하나의 등불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붓다가 나와 세상을 밝힌다면 그 붓다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만 가지가 나온 근원을 묻는 것이다.
조주 선사는 이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해주었다. 바로 신발 한 짝을 발로 툭 찬 것이다. 납자들은 즉시 신발을 발로 툭 차보라. 거기에 수많은 등불을 밝히는 최초의 등불이 있으니 학인들은 그때 즉시 깨달으라.
또 본분을 아는 선문의 작가(作家: 禪匠)라면 그렇게 묻지 않는다 했으니, 선(禪)을 아는 납자는 어떻게 묻겠는가? 본 납자라면, “스님은 결국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고, 선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바로 염화실을 나와 버릴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