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호 4월 25일]

진부대왕이 질문했다.
학승이 물었다.
“노스님은 춘추가 높으신데 치아가 몇 개나 남아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한 대뿐입니다.”
대왕이 말했다.
“그것으로 어떻게 물건을 씹으실 수 있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하나하나 씹습니다.”

鎭府大王問 師尊年有幾箇齒在 師云 只有一箇牙 大王云 爭喫得物 師云 雖然一箇 下下咬著

추월용민(秋月龍珉)씨는 하하교저(下下咬著)가 다른 사본에 일일교저(一一咬著)로 되어있는 곳이 있다 했고, 또 변문집 교기(校記)에 현재 화북(華北)지방 방언 하하(下下)는 낱낱(一一)이라는 의미로 기록되어있다고도 했다.
이 대목은 조주 선사의 신변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선사들은 더우면 덮다하고 추우면 춥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말한다. 조주 스님은 110세경이 되자 그동안 이빨은 다 빠져 오직 한 개만 남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빨이 1개만 있어도 좋다. 산중의 노승은 급할 것이 없다. 음식물을 하나하나 씹으면 된다. 이빨이 다 빠져 잇몸만 남아도 좋다. 그대로 적응하면서 음식물을 넘길 뿐이다. 공연히 노승을 걱정하지 말라. 어떤 상태가 되어도, 심한 고통을 받는 중병이 들어도, 도인의 마음은 항상 평평(平平)하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학인의 구슬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큰 소리로 물어라.”
학승이 예배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질문하는 법을 모르는 구나. 왜 높고 낮은 것은 불문하고 ‘무엇이 저의 구슬입니까’ 하고 묻지 않는 것이냐?”
그러자 학인이 다시 되물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하마터면 이 사나이를 그냥 놓칠 뻔했어.”

問 如何是學人珠 師云 高聲問 僧禮拜 師云 不解問 何不道高下卽不問 如何是學人珠 何不與?問 僧便再問 師云 ?合放過者漢

구슬은 자기의 주인공을 말한다. 그 구슬은 이리저리 굴러가도 변함없이 그 빛을 유지한다. 설사 선사가 ‘큰 소리로 물어라’ 라고 독촉해도 큰 소리도 아니고 작은 소리도 아닌 자기의 목소리, 처음 물었을 때의 그 톤으로 묻는 것이 바로 학인 자신의 본래 구술이다.
선사의 한 마디에 높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절을 하고 물러서거나, 선사가 큰 소리로 물으라고 했다하여 선사의 지시대로 큰 소리로 묻는 것은 말을 따라가는 것이다. 학인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질문은 적당한 크기의 질문이면 충분하다. 그 톤을 유지하면서 낭낭하게 다시 한 번 더 “무엇이 학인의 구슬입니까?”하고 물었다면 조주 스님은 “음, 참 좋은 구슬이야.” 하고 말했을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이변(二邊)이 적적(寂寂:고요)하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선포하시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금년은 풍파가 없다 하겠네.”

問 二邊寂寂 師如何闡揚 師云 今年無風波

이변(二邊)은 양변(兩邊)이다. 두 가지 상대적인 개념이다. 선악, 시비, 남녀, 부귀와 빈천, 부처님과 중생, 더러움과 깨끗함, 공(空)과 색(色) 등이다. 세상의 언어는 이렇게 상반된 개념을 세워서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은 어디까지나 언어를 소통시키기 위한 하나의 표현일 뿐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이 양변 속에 있지 않다. 양변을 떠난 사람이 나타난다면 적어도 그해는 재난이 없다. 하늘도 땅도 축복으로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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