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 마하왁가〉

▲ 삽화 박구원

왜 부처님께서는 항상 미소만 짓고 계실까? 나는 이토록 도탄에 빠져서 힘들어 하고, 괴로워 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한탄할 수 있다. 원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소설이 김동리(金東里) 선생의 『등신불』이다.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으로부터 탈출한 주인공은 바로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다. 적어도 수많은 불상 중에서 하나라도 중생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서 고통받는 부처님을 형상화한 작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럴 때 비로소 중생들은 위로를 받으리라는 생각이다. 주인공은 마침내 소신(燒身)공양을 한 부처님, 즉 등신불을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불교소설로 유명하였으나, 곰곰이 따져보면 불교정신에 투철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다. “중생이 아프므로 내가 아프다”라는 유마거사의 아픔은, 대승불교의 정수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마거사의 얼굴이 언제나 중생의 얼굴을 닮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이 티끌세상에 산다고 해서, 부처님도 티끌세상에 사시는 것일까? 객관적으로 볼 때 동일한 주소지를 갖는다 하더라도,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는 서로 다른 장소이다. 중생은 예토(穢土)를 살고, 부처님은 정토(淨土)를 사신다.

정토를 사시는 부처님께서는 예토를 살고 있는 중생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래 우리 함께 예토에 살자”라고 하실까? “너는 정토에 살아라, 내가 예토에 살께”라고 하실까?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자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어서 오너라. 여기는 정토야, 이리 와”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다. 당신이 사시고 있는 정토가 정토임을 밝힘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그래, 우리도 부처님 같이 정토로 가자”라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실 것이다.

미소 지을때 희망이 있다
부처님 손잡고 정토로 가자

 

직접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여기에는 괴로운 것이 없다. 여기에는 고통이 없다.”(일아스님 역편,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민족사) 얼마나 멋있는 선언인가! 얼마나 힘있는 선언인가!
이 자비로운 손은 야사라는 젊은 청년에게 내밀어져 있다. “거기에는 괴로운 것이 있다. 거기에는 고통이 있다.”라는 것이다. 거기는 어디이고, 여기는 어디일까? 주민센터에 가서 물어보면, 동일한 주소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번지수는 같은데, 부처님은 정토를 사시고 중생은 예토를 산다. 정토에 사시므로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띄시고, 예토에 살고 있기에 중생들은 얼굴을 찡그린다.

우리에게 부처님은 정토라는 탈출구를 제시해 주시는 어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소지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도 똑같이 우리처럼 찡그린 얼굴, 고통스런 얼굴이라면 우리에게는 탈출구가 없게 된다. 희망이 없게 된다. 동리선생의 불교이해가 깊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하는 까닭이다.

“여기 와서 앉거라”고 하시면서, 내밀어 주시는 부처님의 손을 우리가 잡는다면 우리의 삶도 달라지리라. ‘거기의 삶’이 아니라 ‘여기의 삶’이 시작될 것이기에.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에 의해서 지배받는 삶이 아니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의해서 자유로워지는 삶 말이다. 그 정토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 부처님의 미소 띈 얼굴이다. 이 세상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부처님의 얼굴은 하나도 없어야 하며, 있을 수도 없는 까닭이다. (885호 4월 25일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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