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같고 캔버스 같은 녹색 숲 길…사유의 숲 길
악보 같고 캔버스 같은 녹색 숲 길…사유의 숲 길
  • 글ㆍ사진=박재완 기자
  • 승인 2012.06.09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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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북한산 ‘명상길’ 그리고 심곡암(深谷菴)

북한산 둘레길 5구간인 '명상길'에 들어서면 진면목을 드러낸 녹색의 숲과 그 숲에서 들려오는 태고의 새소리 그리고 산들바람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오악(五嶽)의 하나인 북한산은 서울을 품고 있는 산이다. 아니 서울이 안겨 있는 산이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인 천 만이 낮과 밤을 허물고 치열하게 살고 있는 서울. 물기 없는 도시에 물을 대고, 인정 없는 도시에 숨을 대고 있었으니, 그것은 녹색의 ‘자연’이고 서울의 ‘녹색’은 북한산이다. 또한 그 수학책 같은 도시 저편에 음악책과 미술책을 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 서울의 수원(水原)이자 기원(氣原)인 북한산에 둘레길이 들어섰다. 지난 2011년 6월에 총 21가지 테마를 가진 둘레길이 완성됐다. 그 중 ‘명상길’이란 이름이 붙은 5구간을 걸었다.

정릉 북한산탐방안내소 뒤편 주차장 쪽 북한산 둘레길 5구간 '명상길' 입구
5구간은 4구간인 ‘솔샘길’이 끝나는 정릉주차장에서 형제봉까지의 길로 약 2.4km이고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20분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주차장까지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북한산탐방안내소를 찾아간다. 뒤쪽 주차장에 ‘명상길’이란 안내판이 있고 길이 시작된다. ‘둘레길’이란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안내에 따라 걷기 쉽게 해 놓았다. 초반에는 가파른 길이 조금 있지만 계단이 놓여 있어 걷는데 불편하지 않다.

“이른 아침의 걷기는 하루를 위한 축복이다.” 숲을 사랑했던 <월든>의 소로우가 말했다. 둘레길 곳곳엔 ‘명상길’에 걸 맞는 금언들이 숨이 가빠올 때 쯤 하나 씩 나타난다. 바쁜 숨을 늦추고 잠시 마주하는 금언의 안내판은 악보 같고 캔버스 같다. 걷기 좋은 계절이다. 걸음은 걷는 대로 땀이 되고, 가벼워진 몸이 닫힌 가슴을 열기 시작한다. 넓어진 가슴이 걸음 속에 사유를 들인다. 걷는 즐거움이다. 진면목을 드러낸 녹색의 숲. 그 숲에서 들려오는 태고의 새소리. 숲과 숲 사이에 깃든 건강한 햇살.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산들바람.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하늘. 보일 듯 말 듯 한 한 줄짜리 거미줄에 걸려 걸음을 멈춰서면, 길은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멈춰 서서 앞서간 것들을 바라보는 것 또한 길 위에서 할 일이었다. 다시 길을 걷는다.

북한산 둘레길 5구간 '명상길'

21가지 테마 둘레길 중 5구간 ‘명상길’
서광사, 영불사, 심곡암 등 세 절 있어
봄꽃·가을꽃 피면 심곡암 음악회 열어
 

중생이 살고, 중생이 드나드는 길에 절이 없을 수 없다. ‘명상길’ 주변에도 크고 작은 절들이 있었다. 우선 2km를 못 간 지점에서 쉼터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서 둘레길을 잠시 접고 오른 편으로 약 150m 정도 오르면 세 곳의 절을 만날 수 있다. 서광사, 영불사, 그리고 심곡암이다. 서광사는 가파른 계단을 많이 올라야 한다. 아담한 사찰이다. 서광사를 내려와 다시 둘레길에서 빠져 나와 걷던 방향으로 계속 걸으면 영불사가 나오고, 그 왼편으로 심곡암 이정표가 있다. 영불사에서는 대중이 모여 재를 모시고 있었다. 심곡암 가는 길에는 등산로가 없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절은 있는데 등산로는 이어지지 않으니 등산객은 알아서 하라는 뜻 같았다. 그것까지는 알겠는데, 절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안내문이 없어 처음 와본 이는 길에 들어서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절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의심을 품고 걷는 길은 헛걸음에 대한, 보상 받지 못할 시간과 고단함을 먼저 생각하게 했다. 그 때 멀리서 백구 한 마리가 짖었다. 절은 있겠다 싶어 계속 올라갔다. 가파른 길을 50m 쯤 올랐을 때 도량이 있음을 알았다. 도량에 들어서고 보니 너럭바위와 산사음악회로 유명한 심곡암이었다. 모른다는 것이 그토록 어두운 것인지를 또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백구가 더 크게 짖는다. 나가란 소린지. 어서 들어오란 소린지. 세상엔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더 많았다. “안녕하세요?” 채소밭에 물을 주고 계시던 주지(원경ㆍ조계종 종회의원) 스님이 백구 소리 끝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중생에게 합장을 하신다.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목구멍으로 뜨거운 녹차가 단비처럼 흘러내려갔다. “그토록 유명한 심곡암이 이렇게 조용하게 숨어있었다는 걸 오늘 알았습니다.” 스님이 웃으셨다. “절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이 들어서 많이 망설이며 길을 왔습니다.” 왜 적극적으로 절이 있음을 알리지 않는지 묻자 스님이 대답했다. “처사님처럼 올 사람은 다 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 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심곡암은 글자 그대로 심곡암이었다. “깃들고 싶은 사람만 깃들었으면 해요. 도량엔 그런 사람들만 오면 돼요.” 스님은 산사음악회 공연이 있을 때도 특별히 안내문이나 이정표를 세우지 않는다고 했다. “작은 것은 작게, 큰 것은 크게.” 스님은 15년 전에 주지로 와서 처음 한 일이 심곡사였던 도량의 이름을 심곡암으로 고친 것이었다고 한다. 도량 크기에 비해 도량 이름이 너무 큰 것 같아 ‘사’를 ‘암’으로 바꿨다고 한다. 거꾸로 바꾸는 일은 많아도 드문 일이다.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지키겠다는 것 또한 흔치 않은 일이다. 너럭바위 옆에는 110년 된 졸참나무(보호수)가 한 그루 있다. “심곡암은 자연이 아름다운 절이에요. 꽃들이 혼자 피고지면 아깝잖아요. 그래서 산사음악회를 해요. 돈 많이 안들이고 자연무대(너럭바위) 위에서 음악회하면서 심곡암 보여주려고요.” 스님은 전각불사보다는 문화불사를 통해 심곡암이 현실정토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스님은 관념 속의 정토보다는 현실정토가 더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며 심곡암이 그 현실정토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가을에 산사음악회 또 합니다.”

심곡암 주지 원경 스님이 텃밭에 물을 주고 있다.
이름처럼 드러나지 않게 숲에 깃들어 있는 심곡암.
심곡암의 너럭바위와 110년 된 보호수 졸참나무.
녹차 두 주전자를 비우고 나니 어느 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는데 조금 난감했다. 서둘러 자리를 일어섰다. ‘명상길’ 구간은 아직 3분의1 쯤 남아있었다. 날이 저물어 갈 수 없을 것 같아 국민대길로 바로 내려왔다. 약 400m 길이다. 명상길 코스는 형제봉까지 가야하지만 힘든 사람은 기자처럼 심곡암에 들러 주지 스님께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국민대 앞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길이 꼭 정해져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걷고 싶은 만큼 걸으면 될 것이다. 북한산에 가을이 오고 가을꽃들이 피면 숲 깊은 곳에서 음악이 들려올 것이다. 북한산 둘레길 ‘명상길’에는 꽃이 홀로 피고 지는 것을 아까워하는 스님과 그 때마다 음악소리 들려오는 작은 정토가 있었다.
 
둘레길을 찾은 등산객이 '명상길'을 걷고 있다.

■북한산 둘레길은
기존의 샛길을 연결하고 다듬어서 북한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 산책로다. 길은 전체 71.8km 중 서울시 구간과 우이령길을 포함하여 2010년 9월 7일 45.7km가 개통됐고, 2011년 6월 30일 나머지 26.1km 구간이 개통됐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어 걷는 둘레길은 물길, 흙길, 숲길과 마을길 산책로 등 각각의 21가지 테마로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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