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한 사회복지법인 춘강 이사장

장애인들 재활과 직업 훈련에 ‘최선’

제22회 호암상 사회봉사상 수상

국제빈곤구호사업에도 힘쓸 터

“장애인이라고 특별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배고프다고 빵만 주면 자립 할 수가 없어요. 기술을 통해 스스로 설 수 있어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비장애인들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을 갖추어야 해요. 저의 서원은 장애인들이 당당히 자기 실력을 쌓아 세상과 발맞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생구제의 원을 세우고 이 땅에 오신 부처님의 뜻을 되새기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동한(62세, 법명 춘강)사회복지법인 춘강 이사장은 지난 6월 1일 제 22회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오랜 시간 장애인 복지에 매진하며 보시행을 실천한 그의 서원에 세상도 감동한 것이다. 이 이사장은 지난 1987년 11월 사회복지법인 춘강을 설립해 사회복지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본인 역시 2세 때 앓은 소아마비로 2급 중증장애인이지만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은 육체적 장애마저 무색하게 했다.

 

장애인도 자립 기반 마련해야

“저는 장애를 가졌지만 다행히 사업을 통해 자립 기반을 마련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아가는 것이 늘 안타까웠지요. 그들을 돕고 싶었어요. 하지만 막연히 돕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생산 복지 경제 복지 모두가 이뤄져야 해요. 장애인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제 사명이라 생각했어요”

그는 장애인복지관에 작업 재활 시설과 더불어 작업장을 만들게 된다. “중증장애인이나 집에서 돌봐줄 수 없는 장애인들을 제외하고 작업 능력을 갖춘 장애인 1천여명을 고용하면 생산성 있는 기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들이 재활 시설을 통해 신체적 어려움을 조금씩 극복하고 또 기술을 익혀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 좋을 것이라 생각 했어요”

이 이사장은 이후 장애인들을 고용해 직업 훈련을 시키고 다양한 사업에 도전한다. 세탁 공장, 창호 공장, 피혁ㆍ귀공속ㆍ목 공예 칼라 믹스 등의 사업을 시도하며 생산성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펼치는 모든 사업에 있어 목표는 하나였다. 장애인이 단순히 제품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품 그 자체로 인정받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당시 장애인이 만드는 제품이라고 하면 사회 전반적으로 인식이 안 좋았어요. 조잡한 물건 만들어서 싸게 팔며 사람들 동정심에 호소한다는 인식이 강했죠. 저는 품질 향상을 가장 우선으로 했지요. 장애인이라서 팔아준다 그런 말 듣기 싫었어요. 정말 제품이 좋아서 팔아준다는 말을 듣고 싶었죠.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했어요. 늘 직원들이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게끔 배려했죠”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이룩한 사업들은 장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꾸준한 노력 끝에 피혁 공예 사업은 6만불 수출이라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그리고 춘강은 장애인 고용개발의 모델이 되었다. 이런 그의 성과를 인정받아 춘강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유망 중소기업 중 하나로 선정됐다. “사회복지법인이 만든 기업에서 이런 성과를 낸 것은 최초일 겁니다. 춘강은 장애인 고용시설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모두가 함께 노력한 결과죠”

 

사회사업가 어머니를 본받다

그가 이렇게 장애인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늘 이웃의 고통을 함께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 오태인 여사는 제주도에서 유명한 사회사업가였다. “어머니는 배고픈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면 발벗고 나섰어요. 제주도 바닥에서 우리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또 베풀었죠. 제주도민들에게 수여되는 만덕 봉사상, 제주도 적십자사 봉사 대상을 받을 정도로 지역에서 인정받던 분이셨어요. 잘 곳 없는 보부상들이 제일 먼저 들리는 집도 우리집이었죠. 먹을 것이 없어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된장 고추장 찬거리 등을 아낌 없이 나눠 주셨어요. 남을 돕는 일에는 팔을 걷어 부치셨죠. 그렇게 어머니는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원천이요 밑거름이셨던 분이에요”

그의 어머니가 더 존경스러운 이유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쪼개서 이웃들에게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제가 3살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홀몸으로 포목상을 하며 6남매를 키워야 했는데 형편이 그리 넉넉지가 않았어요. 그래도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없는 살림에 밥을 차려주고 잠자리를 제공했죠.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늘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어머니는 제 삶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꿋꿋한 어머니에게도 장애인 아들은 늘 가슴 아픈 현실 그 자체였다. 7살이 되어서야 겨우 목발 짚고 걸을 수 있는 아들의 장애가 자신 탓이라는 죄책감이 그녀 마음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온 몸에 흙탕물 범벅이 돼서 들어온 이 이사장을 붙들고 설움에 복받혀 대성 통곡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결심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자. 강인한 의지를 갖고 비장애인들과의 경쟁에서 지지 말자’ 늘 어머니를 존경해 마지않던 이 이사장은 누구를 원망히기 보다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위해 노력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많은 책을 읽으며 모범생이 됐다. 어머니가 우울해 보이는 날은 회심곡(부모은중경)을 불러주며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장애인에게 냉혹했던 세상을 만나다

이렇게 어머니의 따뜻한 보호를 받던 그가 세상의 냉혹함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진학 과정에서다. “의대에 진학하고 싶어서 일단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보자고 마음 먹었어요. 당시 보성고로 입학 시험을 치렀는데 체력장 점수가 30점이 포함돼 있는 거에요. 저는 장애 때문에 체력장을 치를 수 없으니까 0점 처리가 됐지요. 당연히 보성고는 떨어졌지요. 그때 세상이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냉혹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이후 이 이사장은 고향인 제주의 학교로 진학하며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찾기 시작했고 고민 끝에 기술 시험에 매달리게 된다. 그는 제주도 계량기사 자격증 1호를 취득하고 더불어 상수도 시공기술 자격증도 딴다. 제주도서 최초 계량기 사업을 시작해 사업에도 성공하게 된다. 또한 83년에는 조경면허 자격증도 취득하게 되는데 이 또한 제주도 조경면호 1호로 인정받으며 조경사업에도 뛰어드는 발판이 됐다.

이렇게 잇따라 사업에 성공하면서 그는 복지 사업을 일으키는 발판을 마련한다. 이후 더불어 살며 이웃과 나누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이 이사장은 장애인복지 전문 법인인 춘강을 설립해 장애인종합복지관과 서귀포시장애인종합복지관, 춘강장애인근로센터, 직업재활시설 어울림터, 제주춘강의원 등을 개원해 제주지역 장애인복지 증진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한국장애인복지관협회장과 한국장애인재활병의원협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회장과 제주사회복지협의회장 등을 맡고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제가 늘 사업을 해서 복지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 했거든요. 88올림픽을 기점으로 복지관 건립이 활성화 되면서 본격적으로 복지사업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생각보다 일찍 기회가 찾아왔어요. 늘 장애인들과 더불어 가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나를 지켜주는 기도의 힘

그의 이런 성과 뒤에는 중생의 고통을 함께하겠다는 기도의 힘이 있었다. 그의 기도는 신실한 불자로 늘 기도하며 남을 돕던 어머니의 삶을 본받은 것이었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은 조석으로 염불하는 모습이었죠. 해가 뜨면 일광보살님께 달이 뜨면 원공 보살님께 부엌에 가면 조왕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기도가 생활화된 분이셨어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저도 불교를 공부했고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리고 어머니가 그랬듯이 보살도를 실천하며 이웃과 함께하는 불자로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이런 어머니의 원력을 본받아 춘강복지법인에 춘강정사를 설립하고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늘 기도하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직원들도 이 이사장의 하루가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무리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기도는 절실하다.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으니 저도 조석으로 집에서 또 직장에서 불공드리고 기도하는 것이 제 삶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집을 비우는 날에는 아내나 자녀들이 대신 기도를 하죠.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기도가 오늘의 저와 저희 복지법인을 있게 한 원동력입니다”

늘 손님들로 북적였던 그의 집에는 스님들도 자주 들러 법문을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저희 집에 자주 들리던 스님들이 많았어요. 당시 스님들이 한 자락 씩 들려준 법문들이 다 인생의 밑거름이 됐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법문 중 하나가 어느 스님이 해주신 의상대사 말씀이었어요. ‘중생은 자기 그릇만큼 받을 수 있다’는 그 말씀은 제 인생의 좌우명이 됐어요. 상황을 원망하기 보다는 제 자신을 긍정하고 세상을 도울 수 있는 그릇이 되고 싶다는 서원을 했죠”

 

이동한 이사장은 지난 6월 1일 호암상을 수상했다.

‘해외 구호사업’의 서원을 세우다

이런 그의 서원은 사업과도 연관성을 맺게 된다. 지난해 4월 개원한 세계 최대 규모 미로공원 ‘메이즈랜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수익금은 국제빈곤아동 구호사업으로 회향하는 것은 물론 직원들의 3분의 1을 장애인, 이주노동자, 은퇴 노인 등으로 구성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메이즈랜드의 돌 미로 바람 미로 등은 온갖 번뇌와 고통으로 살아가며 갈림길에 서 있는 인간의 여정을 표현했죠. 아직은 초기 투자비용 때문에 적자 상태지만 앞으로 생기는 수익금은 국제빈곤구호사업으로 사용할 겁니다”

이제 그는 국내를 넘어 해외 장애인들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원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이번 6월 1일 수상한 호암상 수상금 3억원 전액 역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했다. “전쟁 등으로 팔과 다리를 잃고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는 동남아 장애인들에게 의족과 의수 등을 지원하고자 합니다. 또한 동남아 국가에 우리 복지관 모델을 전파하고 싶어요. 그들 나라는 아직 복지관 개념이 뚜렷하지 않아요. 우리나라 복지관 문화는 그들에게는 훌륭한 롤모델이 될 겁니다. 앞으로도 국내를 넘어 국외에서도 장애인들에게 무외시(無畏施)를 실천하는 불자로 여생을 살아가겠습니다”

한편, 이 이사장은 ▷한국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회장▷제주도사회복지협의회장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대의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요 포상경력으로는 ▷국민훈장 석류장 제16730호 ▷국민포장 제4149호 ▷제주시민상 ▷ 적십자 박애장 금장 등을 수여했다.

글=정혜숙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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