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죽지 않는다면 죽은세상 어떻게 맛보겠습니까

 

▲ 삽화 최주현

여러분을 만나뵌 지 몇 달 된 것 같습니다. 12일 만에 왔는데도 이번에는 상당히 오래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우리가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전부터 말씀드렸지만 여러분이 이런 공부를 함으로써 첫째는 이 세상을 바로잡아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고, 또 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고, 내 가정을 잘 다스릴 수 있고,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릴 수 있어서 모두 자유스럽게 끄달리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여러분이 사대(四大)로 흩어져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요다음에 뚜껑만 열면은 승(僧)으로서 이 세상을 감당하리만큼, 아마도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모습을 하면서 행도 중용을 하면서…, 아마도 저 깊은 바다가 흘러도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들고 남이 없이 용을 하는 것은 바로 법신(法身) 문수(文殊)의 설(說)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푸르른 저 청정한 산과 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 승가(僧家)의 설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그것이 모두 둘이냐 하면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푸르름은 절로 푸르르고, 꽃 핀 거는 꽃 핀 것이고, 물 흐르는 것은 물 흐르는 것입니다.

지금 공부하는 분들이 아집과 아상을 가지고 ‘내가 이만하면 이런 위치에서 이런 학위를 땄고 하나도 아쉬움이 없는 대업을 하고 있고, 내 가정이 돈이 없어서 질질 매지도 않는데 내가 뭐 배울 게 있나.’ 이러지마는 잠시 잠깐입니다. 그런 걸로 인해서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하고 자기가 고개를 숙이지 못한다면 바로 쭉정이를 낳는 벼이삭과 같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실천을 옮길 수가 없고, 모든 것은 사람이 돼가지고 사람 노릇을 못하는 격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죠.

처음 오신 분들을 위해서 한마디 하겠는데, 여러분은 항상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지금도 역시 과거를 현재에 가져왔고 미래는 현재에 가져왔으니 여러분이 지금 짊어지고 가고 오고, 죽고 살고, 먹고 똥누고 일하고, 앉고 서고 자고 하는 것이 전부 참선이라고 그전부터 얘기했습니다. 그게 뭐냐? 왜 참선이 되느냐? 여러분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체 만법이라 하면은 일체 만행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해서 결정 지으면서 그 행을 하면서 들이고 내는 것이 어떤 놈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답답한 것도 답답하지 않은 것도 전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각자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답답한 사람도 답답한 마음도 그 마음에서 나오는 거, 답답하지 않은 마음도 그 마음에서 나오는 거, 또는 즐겁게 생각하는 것도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그러죠, 일체 만법이 다 마음에서 나온다고요. 여러분의 마음에서 조작을 하고 여러분의 마음에서 도깨비 장난을 하고 여러분 마음에서 법신이 되고 보살이 되고 이러는 것입니다.

내가 가끔 열두 시에 내려와서 여러분을 접할 때 어떤 땐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마는 내가 만약에 그것이 내 모습이라고 생각을 안 했더라면 내가 답답할 일도 하나도 없죠. 그러나 여러분이 바로 내 고통이요, 내 몸이요, 내 모습이니 말이야. 그런데 여러분은 도대체 믿음이 상실되고 내 마음속의 그 믿음이 여지없이 흩어지고 있으니….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여러분을 여러분 자체 내에서 끌고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걸 모르고 물질세계의 50%만 보고선 항상 바람에 날림과 같이 노예가 돼서 이리저리 끌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나왔다면 자기 자신이 자기를 이끌어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말에 속고 또는 남의 행을 보고선 거기에 쏠리고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다 보니까 자기를 끌고다니는 자기 주처의 참자기를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죠.

나는 예전에 이렇게 했었죠. “이 세상을 다 줘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이시여! 당신은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자비하신데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했습니다. 스무살 안쪽이죠. 그런데 그때 “색경을 봐라! 거기에 있느니라.” 색경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못생긴 내 얼굴만 보이지 도대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건 왜냐하면은 부(父)와 자(子)가 상봉을 하고도, 내가 경(經)을 봤습니까, 설법을 들었습니까? 그랬으니 그걸 모를 수밖에.

그렇게 자비하고 그렇게 같이 하면서도 볼 수 없었으니 그 모습이 그리웠던 겁니다. “당신의 모습은, 얼마나 그렇게 자비한데 당신은 모습이 없고 모습을 안 보이십니까?” 그렇게 어리석었어요. “색경을 봐라. 네가 손을 쳐들면 거기서도 손을 쳐들고, 네가 찌푸리면 거기서도 찌푸리고, 네가 울면 거기서도 눈물을 흘리느니라. 네가 마음이 괴롭고 언짢으면, 그리고 고독하면 바로 나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네 그릇이 크다면 나도 클 것이고, 네 그릇이 작다면 나도 작을 것이다. 네가 울면 나도 같이 따라 우는 것이고 내가 울면 네가 같이 따라 우는 것이니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소리를 듣고서 하염없이 울면서 하루를 지내고 이틀을 지내도 몸이 고달프다는 생각도 없었고, 못 먹었다는 생각도 없었고, 괴롭다는 생각도 없고, 나 홀로라고 생각을 한 예도 없습니다.

여기 이렇게 앉았어도, 여러분과 같이 내가 높이 여기 앉았다고 해서 높이 앉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 가운데에 같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습만 보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 저렇게 위에 높이 있다고 해서 높이 계신 게 아니고 여러분이 생활하는 그 속에, 여러분 마음속에 같이 항상 자비를 베푸시면서 찰나찰나 들고 나십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 대로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의 그 여러 중생들, 이 세상의 보이는 중생,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중생들을 다 거두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대로 미꾸라지처럼 말입니다. 요리 빼끗 조리 빼끗, 그렇게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너무 물질에 젖고 너무 말 수단에 젖고, 너무 배워서 아는 게 많아서 젖고, 습에 젖어서 그렇게 벗어나질 못하고 떳떳하게 설 수가 없는 그런 이치가 아주 많이 보입니다.

무조건 죽지 않는다면 죽은 세상을 어떻게 맛볼 것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죽는다면 아주 죽는다면, 반쯤 죽는 게 아니라 아주 죽는다면 생산이 될 것입니다. 아주 죽는다면 다시 태어날 것이고 아주 죽지 못한다면 고생을 길게 하고 길게 아마 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판(理判)이다 사판(事判)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둘이 아닌 까닭에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이판 사판 아니겠습니까? 이래도 죽을 것이고 저래도 죽을 것인데 살면 얼마나 더 살 양으로 그렇게 애를 써야 하죠? 몸으로 죽으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마음이 죽는다면 몸도 항상 고개가 숙여지고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부드러운 말을 해줄 수 있고, 남들을 이익하게 해줄 수 있고, 일체 만법에 걸림이 없이 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됐을 겁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한다고 생각지 마세요.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면 ‘저이가 알면은 얼마나 알아?’ 하겠지만 그건 여러분의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닙니다.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죠. ‘저 스님은 비구니인데, 뭐.’ 이렇게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의 차원이지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죠. 풀 한 포기도 불교가 아닌 게 없고 도 아닌 게 없으리만큼 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차만별의 그 모든 생명들이, 바람과 물과 흙과 불과 산천초목의 나무 한 잎사귀도 불교 아닌 게 없거늘 어찌 사람이 돼서 비구닌데 모자라고 비구닌데 잘하고 이렇게 할 것입니까? 하다못해 돌 하나 굴러가는 걸 봐도 또는 발부리를 채여서 발이 짜개져도 이것이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라면 바로 증득(證得)할 것입니다.

돌도 생명이 있어서 돌아가고 지금 이 법상도 생명이 있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법상이라는 이름을 누가 지어 놨을까요? 그러니 하나하나가 생명이 있어서 하나하나가 이심전심으로 돌아가고 조화를 이루고 돌아가는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이 그 부처님의 가르침의 뜻에 따라 어김없이 끄달리지 않고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될 수 있을까요.

내가 여러분 앞에 이렇게 항상 하는 말이 우습지도 않고 딱딱하기만 하겠죠. 그러나 딱딱한 것은 바로 약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한테 재미있게 웃기기나 하고 과거 얘기나 하고 그런다면 여러분이 얼마나 실망하실는지, 여러분은 웃고 즐기고 그러시겠지만 여러분 속의 여러분은 아마 실망하실 겁니다.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여러분은 눈 뜨고 눈 감고, 일어나고 앉고 서고, 생활하는 일체 만법을 바로 여러분이 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바로 내 주인공이 이렇게 하고 있지. 그 주인공이 무엇인고?’ 하고 ‘그 하는 놈이 무엇인고?’ 하기 이전에 그놈이 하고 있다는 것으로 넘어가야 되겠죠. 지금 이 밝은 세상에 ‘그놈이 뭣고?’ ‘모두를 이렇게 들이고 내고 있는 놈이 무엇일꼬?’ 하기 이전에 ‘바로 그놈이 하는 것이구나.’ 하고 뛰어넘어야 되겠죠. 삼학년까지 공부를 잘하다가 너무 잘하니깐 사학년을 뛰어넘어서 공부를 해도 능히 하더랍니다.

그와 같이 지금은 우리가 생전에 이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감을 알고, 들은 사이 없이 듣는 걸 알고, 말하는 사이 없이 말하는 걸 알고, 책을 보되 보지 않는 걸 알고, 책이 나를 보지 않는 거를 알고, 모든 거 저 구름이 스스로서 오고 가는 걸 알고, 인간이 스스로서 생하고 멸하는 걸 알고, 이 모든 망상이 전부 망상이 아니라 네놈이 한다 하는 거를 모두 증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래도 죽을 것이고 저래도 죽을 것인데
살면 얼마나 더 살 양으로 그렇게 애를 쓰십니까.
몸으로 죽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마음이 죽는다면 몸도 항상 고개가 숙여지고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부드러운 말을 해줄 수 있고
남들을 이익하게 해줄 수 있고
일체 만법에 걸림이 없이 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렇게 해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요다음에 모습을 바꿔가지고 나올 때는 여지없이 중이 돼서, 중이라는 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중은 계(戒)·정(定)·혜(慧) 이러는데 계도 정에 들고, 혜도 정에 들어서 올바른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중이 돼서 이 소임을 맡든 저 소임을 맡든 수천 수만을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대장부로서 이 세상을 주름잡을 때 비로소 우리 국가의 역사는 거대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중이라는 것은 머리만 깎고 옷만 입었다고 해서 중이 되는 게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뿐만 아니라 저 산천초목도 쳐다보고 이 가슴속에 흘리는 눈물이 저 한 방울의 피와 같이 바다를 모두 메꿀 수 있는 한 방울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내 마음과 또는 일체제불의 마음이, 일체 조사의 마음이,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의 마음이 다 한마음으로서 접근이 된다면 이끌어가지 못할 게 없죠.
바로 여러분 마음 하나만이라도 접근이 돼야만이 그 모두가 접근이 되는 것이고 아주 여여하게 행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을 알아주실 수도 있고 일체제불 마음도 알아주실 수가 있고, 역대조사들의 마음도 알아주실 수가 있는가 하면 천백억화신의 마음도 알아주실 수가 있고, 이 산천초목도 변하지 않는 게 없으니 이 모든 마음들을, 바람의 마음도 알아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풀 한 포기의 마음도 알아주실 수가 있고요.


본래 나쁜 것은 없습니다. 본래 물도 나쁜 것도 없이 사람의 마음도 나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독이 들고 살아가면서 선인의 일을 하고 그러죠. 팔자 운명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지어서 팔자를 만들고 운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번에 미국에 갔다 오면서도 그랬습니다. “얘야!” 옆에 앉아 있는 우리 스님더러 그랬습니다. “저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게 보이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안 보입니다.” “그래 안 보이긴 하나 돌아가는 건 알지?” 그러니까 안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요. 그 돌아가는 데는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돌아가고 있죠. 우리가 지금 그런 식이죠. 보이지는 않지만 돌아간다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모두. 그런데 그 돌아가는 불바퀴, 여러분의 불바퀴에 어떠한 요건의 문제도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어떠한 게 닥친다 하더라도 거기에 맡겨놓으면은 그냥 녹아버립니다. 그냥 장난삼아 맡기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저 과학자들은 아주 여자도 불문에 붙이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혼자 산다 합디다, 그 연구하느라고.
그렇듯이, 보세요! 모든 것은 보이지는 않으나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거기다가 진실하게 ‘너만이 이것을 녹일 수가 있다.’ 하고 진실히 믿는다면, 믿는 마음이 물러서지 않는 반면에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른 행을 하고 그런다면 두려울 게 없죠. 또 남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즉 말하자면은 정의로써 아주 진실하게 말을 하되 남이 언짢다 하면은 거짓으로 해서라도 이 사람이 이익하다면 거짓을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융통성 있는 지혜라고 보는 것이죠. 모든 게, 사람 사는 것이 가슴이 넓어야 하고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못생겼든 잘생겼든 말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거기에 닿기만 하면, 그 프로펠러에 닿기만 하면, 그게 불바퀴라고 한다면, 닿기만 하면 그냥그냥 갈아져버리고 부서져버리고 녹아버리고 타버리고 이렇게 하는 반면에 참 여러분이 홀연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나타난 분에 한해서는 또 ‘내가 이만하면은 깨달았지.’ 하시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깨달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망상을 갖지 마십시오, 내가 깨달았다고, 나를 발견했다면 겨우 땅 속에서 씨가 나와서 겨우 싹이 한들한들 하면서 나오는 격입니다. 그것이 다 길러져서 이 세상에 모두 이심전심으로 둘이 아니게 조화를 이루고 돌아갈 때 그때에 바로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됩니다.
그래도 깨달았다고 말은 못 합니다. 열매가 맺어서 온 누리를 두루 하면서 씨가 앉아서 무르익었을 때, 그 씨를 심어서 세세생생에 끝간 데 없이 먹일 수가 있는 그런 실과가 돼야 하고, 남들이 그 익은 실과를 갖다 먹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서도 영원히 그 실과 하나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그 점, 바로 이름해서 구경경지(究竟境地)에 이르러서 과거삼(過去三)·현재삼(現在三)·미래삼(未來三)이 통달해서 인간이 제대로 돼야만이 자유인이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금 여기 다니신 지 여러 해가 되는 분들도 많고 새로 오신 분들도 많고 그런데 제가 한마디 질문할까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나한테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여지껏 공부한 게 공부를 어떻게 해야만이 잘해나가는 건지 여러분, 대답해보십시오.

신도1(여): 그냥요.
큰스님: 나와서 말해요.
신도1(여): 스님들도 계시고 많은 보살님도 계신데 나이 어린 제가 나와서 떨리기가 한이 없습니다.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합니다.
큰스님: 그냥?
신도1(여): 예, 그냥.
큰스님: 어, 그래.
신도1(여): 맞았습니까?
큰스님: 맞긴 뭘 맞어? 하하하.
신도1(여): 맞는 것도 놓는 것도 그냥입니다. 그냥입니다.
큰스님: 그냥…. 그래, 그냥 그냥이야.
신도1(여): 예.
큰스님: 그냥 해도 안 되고 그냥 그냥이야. 그대로 해봐!
신도1(여): 감사합니다, 스님. 하해와 같습니다.
큰스님: 그대로 잘 해나가.
신도1(여): 하해와 같습니다.
큰스님: 또 질문할 사람 없습니까?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데 어떻게 해야 잘해나가는 겁니까? 다 사람은 차원에 따라서 생각이 다를 테니깐요.

신도2(여): 저는 스님 앞에 말씀드리기가 너무 외람되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고만 봐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 그저….
큰스님: 허허허. (고개를 좌우로 흔드심.)
신도2(여): 그저….
큰스님: 허허허. 하여튼 이제 그만치 해도 알겠으니깐 가보세요. 또 누구 없습니까?

질문자1(남): 저는 질문을 하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큰스님: 그렇게 하십시오. 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자1(남): 예, 바로 그건데. 어떤 목적을 두고 공부를 해야 되는 건지…. 조금 전에 보살님이 그냥 한다고 그랬는데….
큰스님: 그거는 댁에서 모르는 일입니다.
질문자1(남): 예, 그걸 좀 묻고 싶습니다.
큰스님: 그거는 물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댁한테 지금 하고 싶은 공부를, 어떻게 마음의 공부를 해야 잘하는 건지 그걸 물었습니다, 지금.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1년 6월 16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890호 5월 30일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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