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들기 하루 전 음악가 노영심씨는 스님 병실에 눈 맞은 동백꽃과 매화를 꽂아드렸다. “저녁에 꽃을 보시고는 ‘내가 못가니까 네가 왔구나. 예까지 올라오느라고 고생했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고향에서 온 꽃이잖아요.” 노영심씨에게 꽃을 들려 보낸 해남 땅 끝 마을 미황사 금강 스님(47) 말씀이다.

2010년 2월 초 미황사를 찾은 노영심씨에게 법정 스님이 병원에 계시다는 말을 처음 들은 금강 스님은 남달리 꽃을 좋아하는 법정 스님 모습을 떠올리고는 동백꽃을 꺾어 보내드렸다. 그 뒤 다시 미황사를 찾은 노영심씨가 불일암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소리에 함께 불일암을 찾은 금강 스님, 마침 눈만 박혀있는 매화가지가 눈에 띄자 바로 꺾어 노영심씨 편에 보냈다. “스님께 불일암 매화라고 말씀드리면 ‘왜 꺾었느냐’면서 벌떡 일어나지 않으실까? 농을 하면서 보내드렸는데 병실에서 피었대요.” 그 뒤에 법정 스님이 보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은 금강 스님은 새벽예불 전에 동백꽃과 매화 가지를 꺾어서 첫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스님께 드리면서 ‘남도에는 꽃이 활짝 피었는데 스님도 어서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그랬더니 스님 눈에 눈물이 고이시더라고요. 병실에서 가사장삼을 수하고 삼배 드리고 돌아왔어요.”

일본큐슈박물관에서 열리는 괘불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출국하려고 인천공항으로 가던 차안에서 법정 스님 열반 소식을 들은 금강 스님은 일본행을 취소하고 바로 길상사로 달려가 참배를 드렸다. 그리고 이튿날 운구를 따라 송광사로 내려갔다. 다음날 다비식에서 하화(下火)하자마자 김해공항으로 가서 출국, 그날 밤 일본에 도착했다. “이튿날 큐슈박물관에 갔어요. 우리나라 괘불은 모두 영산회상도를 모시는데, 박물관 로비에 펼쳐져 있는 괘불은 높이가 12미터 폭이 8미터나 되는 부처님 열반도였어요. 무성한 나무 아래 수많은 제자들 그리고 동서남북을 외호하던 사천왕도 모시던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으니 이젠 모실 분이 없다는 상실감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고 있더군요. 동물들까지도 슬피 우는 도상은 처음 봤어요. 우리나라에선 천에다가 괘불탱화를 모시는데 일본은 종이에다 그렸더군요. 미황사 괘불탱화역사하고 비슷한 시기인 270년 전에 고전사란 절에 모셨던 괘불탱화인데 너무 낡아서 보존처리를 하고 새 단장 기념 심포지엄을 열었어요.” 커다란 괘불이 한국에 100여점 있고, 일본엔 10여점이 있다.

“석가모니부처님 열반도를 보는 순간, 바로 전날 치룬 법정 스님 다비식이 겹치면서 그야말로 무여열반, 남아있는 것이 없는 세계로 가셨으니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상실감으로 휩싸였어요. 살아계시면 다음에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늘 있잖아요. 만남은 언제나 그 자체로 완성된 만남이고 그 다음 만남은 또 새로운 만남으로 순간순간 끝나는 것이지만, 일본에서 열반도를 보니까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끊겼음을 실감했어요. 단절. 열반도 앞에 아무것도 차려있지 않았어요. 기념품가게에서 돗자리를 빌려다 펴고 향을 사르고 한국식으로 예불을 했어요. 간절하게 혼자서. 목탁도 없이, 목소리로만 ‘계향…정향…해탈향…’ 예불을 올렸지요.” 금강 스님이 예불을 마치자 예불하는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던 노스님 한분이 곁으로 다가와 당신은 가사를 만드는 스님이라면서 명함을 건넸다. 예불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면서. “그 스님이 그해 12월에 꼼꼼히 손으로 바느질한 가사와 좌복 깔개를 지어 보냈어요. 향에 편지까지 넣어서.” 금강 스님이 펼쳐 보이는 가사와 깔개는 은은하게 향이 배어 그윽한 황금 빛깔이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를 잃은 17살 소년은 함께 신나게 놀던 친구들이 다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버리고, 혼자만 덩그마니 남았다. 하는 수 없이 중학교와 담하나 사이를 두고 있어 가기 싫어했던 고등학교에 진학, 공부에 흥미를 잃고 어영부영 한 학기를 보냈다. 2학기 초, 점심시간이면 늘 교무실에 앉아 좌선을 하던 물리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뭐하세요?” “참선” “참선은 왜 해요?” “참선을 하면 행복해져서 뭐든지 잘 할 수 있지.” “참선하면 영어도 잘할 수 있나요?” “그럼” 문답 끝에 선생님이 건넨 책이 〈육조단경〉이다. 그 책을 하루 밤새 다 읽고 일주일에 세 번이나 볼 만큼 푹 빠져버린 소년은 선생님에게 참선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대흥사로 지운스님을 찾아가라고 했다. “토요일에 바로 찾아갔어요. 스님이 지게를 지고 나오시더라고요. ‘이호곤 선생님이 찾아뵈라고 해서 왔습니다.’ ‘뭐하려고?’ ‘참선을 배우려고요.’ 그랬더니 씨익 웃고는 지게 지고 산으로 가버리셨어요. 스님을 쫓아 산에 올라가 나무하는 것을 도왔죠. 스님이 차려준 저녁밥을 먹고 스님과 같이 자고 일요일에 내려올 때 다음 주에 올 핑계거리를 만들려고, 책꽂이에서 책을 두 권 뽑아가지고 내려왔어요. 그 뒤로 주말마다 올라가 돌아올 때는 늘 책을 두 권 뽑아오곤 했어요. 서가에 법정 스님 책도 여러 권 있었어요. 〈서있는 사람들〉과 〈말과 침묵〉도 그때 읽었는데 특히 〈말과 침묵〉은 생생히 살아있는 부처님 말씀에 끌려 여러 번 거듭 읽었어요.” 술술 읽히는 법정 스님 책 덕분에 불교가 지닌 매력에 푹 빠졌던 소년이 바로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이다. 그렇게 한 학기를 절에 오르내리다가 겨울방학부터는 다시는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출가하겠다고 했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으면 중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절에 살면서 새벽에 일어나 스님 밥 차려 드리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빨래 해가면서 학교를 마쳤다. “내려가서 학교를 마치고 올라와도 되었을 텐데 그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내려가면 다시는 못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죽어라고 집에 가지 않았어요.” 졸업식을 한 다음날 첫차를 타고 해인사로 간 금강 스님은 해인사에서 정식으로 행자생활을 다시 했다.
1986년 구산스님 재일에 법정 스님과 처음 현품대조를 했다. “모시고 간 약사암 주지 종일 스님과 송광사 뜰에 서있는데 어떤 보살이 법정 스님한테 가서 ‘법정 스님이시죠?’하고 물으니까 법정 스님이 종일 스님을 가리키면서 저 스님이 법정 스님이라고 그러시고는 휘적휘적 가버리세요. 두 분이 닮으셨거든요. 종일 스님은 내가 아니라 저 스님이 법정 스님이라고 하고… 그렇게 주고받는 말씀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빙그레 웃고만 있었지요. 어른들 일이라.” 만남이라기보다 가벼운 마주침이었다. 그리고 1993년 길병원에서 운영하는 가천연수원에서 열린 사단법인 한국차문화협회 사범교육연수에 교육생으로 참석한 금강 스님은 강사로 오신 법정 스님과 사제 연을 맺는다. “스님이 반기면서 잘 챙겨주시더라고요. 저는 교육생일 뿐인데도 공양을 하거나 차담을 나눌 때 꼭 당신 옆자리에 앉히셨어요. 알고 보니까 법정 스님이 스님들을 잘 챙기지 않으시는 편이세요. 그런데 스님은 저를 늘 살갑게 맞아주셨어요. 제가 차를 좋아하고 세상 사람들과 폭넓게 교류하려 애쓰는 모습을 어여삐 보셨나 봐요.”

1996년 금강 스님은 해남 옥천면 청룡리라는 마을 앞을 지나다 연잎이 떠있는 것을 눈여겨 봐 두었다. 얼마 뒤 연꽃이 필 때쯤 다시 가보니 끝이 파르라니 눈이 시린 백련이 곱게 피었다. “무안 백련은 붉은빛이 도는데 끝이 파랗고 무척 탐스럽고 고왔어요. 법정 스님이 그 소식을 듣고 서둘러 내려오셨어요.” 이어 금강 스님은 어째서 이곳에 백련이 피게 되었는지 수소문했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 한 분이 강진 성전 금당리라는 마을에서 시집올 때 연 다섯 뿌리를 가지고 와서 집 앞 저수지에다가 심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강진 금당리를 찾은 금강 스님은 ‘백련당’이란 정자 앞에 있는 연못을 발견했다. 그 뒤에 법정 스님이 연꽃을 또 보러오셨을 때 ‘원조 연못이 있다.’며 스님을 모시고 금당리에 갔다. “귀한 손님 왔다며 차 한 잔 대접하겠다는 연못을 관리하는 할머니를 따라 집에 갔더니 다방 커피를 타주더라고요. 스님 표정이 묘하세요. 그래도 정성이니까 말없이 드시더군요. 그때 집 주인이 독립기념관 연못에 우리 연씨를 받아다가 심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불교 꽃이라고 해서 다 캐내버려 씁쓸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이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하는 글을 쓰셔서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른다면서 이야기를 한참해요. 앞에 계신 스님이 법정 스님인지도 모르고. 한바탕 웃고 나서 이 어른이 바로 법정 스님이라고 말씀드렸죠.”

법정 스님은 해남 나들이 길에 꼭 고즈넉이 미황사를 다녀가시면서 감춰두고 싶은 절이라고 말씀했다. “다른 스님들은 대개 대웅전만 참배하고 가는데 법정 스님은 남다르셨어요. 오시면 꼭 부도전부터 참배를 하셨어요. 서산대사 이후로 소요대사 법맥으로 100년 전까지 최근세 선사들 부도가 쫙 모셔져 있어요. 역사에도 밝으신 법정 스님은 옛 선사들을 모시는 마음이 지극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은 길을 닦아놔서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지만 예전에는 아주 좁다랬어요. 길이랄 것도 없는 길이라 고개 넘어 가다말고 길이 있는지 없는지 갈등을 하다가 거의 되돌아와요. 그런데도 빠뜨리지 않고 꼭 참배하시는 스님이 몹시 존경스러웠어요.”

금강 스님이 1989년 절이 비었다는 소리를 듣고 은사 지운 스님을 모시고 미황사에 처음 살러왔을 때만 해도 나무와 잡풀이 절 마당까지 들어차 법당에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망가진 절이었다. 2년여에 걸쳐 마당에 있는 나무를 베어내고 이곳 저곳을 다듬고 가꾸자 햇살이 경내를 어루만졌다. 예불시간을 빼고 일만 하는 금강 스님을 가리켜 사람들은 ‘지게 스님’이라고 불렀다. 금강 스님은 미황사 주지가 되기 바로 전인 1999년 참선수행에 빠져 내내 삼매에 들다시피 했다. “그 전에는 제가 얘길 해도 제 것이 아니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 제가 없어지고 사람들이고 사물들이 인정되어지고 마음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이제는 속지 않겠구나. 모양이나, 들리는 데, 경력에 속지 않고 살겠구나.’ 명확해지더군요. 그 뒤로 책을 보면 확연히 알겠어요. 법정 스님 수필집에는 자비심이 너무 많이 담겼고, 법문집을 보니까 ‘아! 이 분이 확실하구나.’하고 보이는 거예요. ‘이 어른, 뛰어넘으셨구나.’ 법문이 연기·중도·무아·공에 딱 맞아 떨어지잖아요. 행동도 마찬가지고.”

금강 스님은 미황사에서 어린이를 위한 ‘한문학당’, 쉼을 만끽할 수 있는 편안하고 넉넉한 산사체험 ‘템플스테이’, 나를 찾아가는 수행 ‘참사람 향기’ 프로그램을 운영, 너와 나, 일상과 수행이 둘이 아님을 퍼뜨린다. “템플스테이 원조인 참선프로그램은 법정 스님이 송광사에서 처음 만드셨지요. 현대인들이 경쟁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내려놓고 힘을 얻어가는 것이 참선 수련이잖아요. 지금은 법정 스님이 수련대회를 시작하셨던 때보다 사람들이 더 힘들어하고 과학과 정보가 뒤섞여서 경쟁이 더 치열해서 상처도 많이 받잖아요. 송광사에서 시작된 수련회는 여름에 한철만 할 뿐이지만, 미황사 ‘참 사람 향기’는 다달이 셋째 주 토요일에서 넷째 주 토요일까지 7박 8일합니다.” 그 바람에 법정 스님이 그토록 감춰두고 싶어 했던 미황사는 이제 한 해 10만도 넘는 사람이 찾는 대가람이 되었다. 금강 스님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미황사를 미얀마 마하시 선원이나 프랑스 플럼빌리지처럼 내외국인은 물론 출가, 재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언제든지 와서 치유와 휴식을 갖는 도량으로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위대한 까닭은 사람이 가진 한계, 생·노·병·사에서 비롯된 고뇌를 숙명으로 여겨 절대자인 신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게 한데 있잖아요. 현대인들이 겪는 문제도 약물 힘을 빌리거나 다른 데 의지하지 않고 제 스스로 수행을 해서 이겨낼 수 있음을 일깨워주고 싶어요.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이 차별이 없는 ‘승가’라는 공동체 모델을 만드셨듯이, 미황사도 출가자만을 위한 수행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하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미국, 일본, 태국, 미얀마, 인도 세계도처에 있는 어지간한 수행센터는 거의 다녀왔어요. 여건은 천년이 넘는 역사 기반이 있는 한국이 훨씬 좋아요.” 사부대중을 끌어안는 원융회통(圓融回通)을 이루려는 작은 거인 금강 스님.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마음병을 치유하고 진정으로 자기 삶이 소중함을 일깨우고, 내 행복과 평화로움을 가꾸어야 할 사람은 나뿐이라는 깨달음을 주어 자신감을 갖고 살게 하고 싶단다.

그러나 이 같은 성인 프로그램에 앞서 자성을 갖춘 올곧은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 태교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금강 스님, 태교 템플스테이도 준비한다. “어머니가 아이한테 직접 무엇을 해줄 수 있을 때는 뱃속에 있을 때뿐입니다. 이미 태어나 개체가 되었을 때는 해줄 수 없어요.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할뿐이지. 그러나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는 어머니가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느낌으로 바로 전달이 되지요. 절은 새벽 세시부터 여섯시까지 만물이 모두 깨어나는 가장 맑은 시간에 시작하는, 세상에서 가장 맑은 공간이잖아요. 이 뒤 숲속만 해도 약육강식이 존재하지만 이곳만큼은 싸움과 차별이 없는 순수하고 향기로운 공간이에요. 맑은 물과 천년이 넘게 내려오는 수행 기운들이 넘치는 곳에 아이를 가진 어머니들이 와서 잠시 있더라도 맑은 기운을 품을 수 있지 않겠어요? 이곳에서 새소리를 듣고 바람소리를 듣는 태교와 음악을 틀어주는 태교는 견줄 수가 없어요. 옛날 사람들은 합방하기 전에 백일기도를 먼저 했잖아요. 생명을 하나 태어나게 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이에요. 부처님을 만들 수도 있어요.” 어제로 불기 2556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았다. 세상 부처님 씨앗이 모두 움터서 모든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날을 고대하며….


현각 스님의
禪心으로 만나는 세상
위대한 탄생
부처님, 깨달은 사람이란 의미
‘베품의 미덕’보여주려 출현
불탄일을 ‘부처님오신날’로
위대한 탄생. 부처님 오신 날이다. 부처님이라고 하면 그 개념이 막연한 듯 하여 어려운 말로 다가온다. 그러나 부처님의 의미는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지금의 네팔인 가비라국의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탄생한 실달태자를 이르는 말이다. 둘째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비단 실달태자 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은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포괄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평등의 불교가 된 것이다. 마야부인은 흰코끼리가 일곱 색 무지개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불본생경>에 태자는 태어나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라고 외쳤다고 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말은 번역된 말이므로 그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svar쮄ga ham asmi loka 라는 범어를 번역한 것이다. sva는 ‘스스로’, r쮄ga는 ‘집착’, ham 은 ‘버리다’, asmi 는 ‘내가 존재한다’, loka 는 ‘눈에 보이는 세계’ 즉 중생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종합해 보면 ‘집착을 다 버리고 나면 하늘의 광명이 중생세계에 스스로 비쳐 내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부처님은 애당초 집착을 멀리한다는 것이 수행의 기본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생세계를 달리 사바세계라고도 한다. 사바(saha)가 ‘참는다’는 뜻이므로 사바세계란 참는 세계라는 말이다. 일상의 어떤 상황을 놓고 이래저래 헤아려 보아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 말을 한다. 부처님의 분상에서 보거나 가르침은 하여튼 참았어야 상책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석가 세존은 생사유전하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원을 가지고 세상에 몸을 나투셨다. 긴 긴 49년 간 설법하고 교화하는데 앞장섰다. 한 때는 태자가 타락했다고 비난하며 떠났던 다섯 비구를 구제하고자 도를 이룬 부다가야에서 꼬박 열하루 걸려 녹야원에 당도하여 사제법을 설하였다. 어느 곳에서는 45년 동안 설법했다고도 한다. 45년 설법의 경우는 29세에 출가하고 35세에 성도하여 80세에 입적한 것이고, 49년 설법의 경우는 19세에 출가하여 12년 동안 수행을 하고 31세에 성도하여 80세에 입적한 것으로 말한다.
원에는 일반적인 원이 있고 종교적인 원이 있다. 일반적인 원이란 욕망의 소산이다. 욕망은 부표(浮漂)가 없다. 그러므로 욕망 때문에 항상 익사할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욕망을 감당하지 못하고 해협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반면에 종교적인 원은 나보다 상대를 챙긴다. 그래서 나와 상대가 동시에 불도를 이루기 바라는 ‘자타일시성불도’를 발원하는 것이다.
태자가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다. 바로 기연을 만난 것이다. 기연이란 시기인연의 줄인 말이다. 범어로 kal쮄-쮄.saya 라고 한다. kal쮄는 ‘시간’, ‘순간’이란 말이고, 쮄.saya 는 ‘쉰다’, ‘정지한다’ 혹은 ‘마음의 정리’라는 말이다. 도를 이루기 전까지의 ‘그 동안의 잡다한 생각이 한 순간에 정리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별이란 대상을 보는 순간 온갖 망상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조사들의 경우 소리를 듣고 깨닫는 기연을 만나는 사례가 무수히 나오고 있다.
연전에 방송에서 신행상담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청신녀의 질문내용이 <금강경> 법신비상분의 사구게였다.

약이색견아 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 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 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 不能見如來
만일 색신에서 나의 참 모습을 보려 하거나
설법하는 음성서 내 참 모습 구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빗나간 도를 행하는 자이므로
여래의 참 모습인 법신은 보지 못하리라.

석가여래의 위대한 탄생을 음미해 본다. 세상에는 없어도 될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녀리도 그 몫이 있다.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여래는 혼탁한 세상에 빛으로 몸을 나투셨다. 그래서 색신이나 음성으로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소유에 탐닉하는 중생에게 베품의 미덕을 보여주려고 출현하였다. 지니는 즐거움보다 나눔의 즐거움이 더욱 수승하다고 몸소 실천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부처님 오신날’이 지금과 같이 일반화 되기 전에는 초파일을 불탄일, 욕불일 이라고 하였다. 초파일을 현대어로 어떻게 할 것인가 총무원 공모가 있었는데 동국대학교에 근무했던 김운학 스님의 ‘부처님 오신날’이 채택되었다. 내친김에 초파일을 맞아 그 내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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