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섭 교수의 삼국유사 인문학 유행 <1>

건국시조인 단군의 본뜻은 ‘산신’

민족국조이나 기독교는 우상 취급

조선(朝鮮)은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 이름이다. ‘조선’을 한자 그대로 풀면 ‘고요히 해 뜨는 아침의 나라’이다. 하지만 조선은 ‘목초(牧草) 꼴인 선(蘚)을 따라 이동하며 순록을 치는 부족의 이름’이기도 하다.

순록 유목단계에서는 ‘소욘’(蘚)족과 ‘차아탕’, 즉 ‘조족’(朝族) 또는 ‘코리치’(高麗族)로 불렸다. 이것은 순록유목단계에 진입한 조족(朝族)과 방목하는 선족(鮮族)을 구분한 것이다. 바로 이 유목하는 차아탕, 즉 조족이 선족을 통합해 세운 ‘예맥(濊貊) 단단국(檀檀國)’이 단군조선이라 불린 것이다. 이들 동이족[朝鮮, 濊貊, 韓, 夫餘, 沃沮, 肅愼(靺鞨 또는 ?婁], 즉 북방유목민족은 한족(漢族)과 달리 소리글자를 우선하며, 두 음절 국가명을 사용한다. 우리 역사에는 다섯 개의 조선이 있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과 위만조선과 이씨조선과 김씨조선이다. 기자와 위만 조선은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었다. 해서 동이족의 조선은 단군과 이조(李朝)와 김조(金朝) 셋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이야기는 천지창조 신화와 건국신화가 융합된 것이다. 천신인 환인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환웅으로 대표되는 북방민족이 중앙아시아 혹은 시베리아에서 이주했음을 암시한다. 환웅집단의 언어는 알타이어 계통 중 퉁구스어 계통으로 짐작되며 이 어계를 따라 퉁구스족이라고 한다. 이들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토착세력이었던 곰 부족과 범 부족과 관계를 맺었다. 결국 환웅은 웅녀로 상징되는 토착민을 정복하고 새로운 신시를 건설했다. 그런데 곰 부족과 인연을 맺은 환웅집단은 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환웅을 환인의 서자(庶子)라고 기술한 것은 모계사회를 이해하지 못한 유학자가 유교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도 고대의 모계 계승을 따라 서자는 모계를 따랐다. 때문에 환웅을 서자로 기술한 것은 곧 부계적 해석이었으며, 서자는 또한 말자상속제(末子相續制)와도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다시 말해서 부계의 장자 상속원리와 달리 모계의 성격상 마지막으로 집에 남은 딸이 혈통을 잇게 되는 것이다.

해서 환웅은 모계사회의 서자이면서 아울러 부계사회로의 전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최근 중국 요하일대에서 발견된 신석기 만기의 홍산(紅山) 우하량(牛河梁) 문화(기원전 3500~3000년)에서 발견된 여신묘의 두상에서 확인된다.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은 곰 토템족이었으며 웅녀족(熊女族)=단군=모계에서 부계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로서 주목받고 있다. 홍산문화 만기는 모계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천신인 환인은 모계사회에서 살았고, 그 아들인 환웅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기를 살았으며, 단군은 초기의 부계사회를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의 초원과 산지에 자리를 잡고 있던 곰 부족은 모계사회 혹은 모계적 전통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범 부족은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에서 남방에 이르는 산지에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곰 부족인 웅녀에게서 태어난 단군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옮겨가는 전환기에 살았다. 이것은 곰(신앙)이 사라지고 범[산신(령)신앙] 신앙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군 왕검’의 의미

조선의 건국 시조인 단군(壇君, 檀君)의 본뜻은 ‘산신’ 혹은 ‘무당’으로 불린다. 이것은 무당의 이름인 ‘당굴’의 음을 베낀[寫音] 것이며 ‘제사장’(祭司長)의 뜻을 지니고 있다. ‘단군’의 표기 역시 ‘제단 단’자와 ‘박달나무 단’자로 혼용해 쓰고 있다. 대부분의 기록에서 ‘박달나무 단’자를 쓰고 있는 점에 근거해 보면 처음에는 이 나무가 신이 내려오는 길인 세계수(世界樹)로서의 의미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나무 아래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제의(祭儀)를 거행하면서 점차 ‘제단 단’자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일연 역시 불경에 근거해 ‘단월’(檀越) 또는 ‘단나’(檀那)를 ‘베푸는 사람’[檀君] 혹은 ‘베푸는 이’[壇君]라는 뜻으로 이해한 것은 아닐까?

그 결과 단군이 산신이 돼 산 속 무당집(城隍堂)에서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는 ‘단골네’ 또는 ‘당굴네’로 불리며 백성들의 점복과 장수 및 재복 등의 노력을 베푸는 ‘충복’(忠僕) 또는 ‘심복’(心腹)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단군은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린 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그는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 뒤에 다시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됐는데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이것은 단군조선이 세상을 다스리던 47세계(世系)의 기간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치세 기간을 살펴보면 단군조선은 아마도 신석기에서 청동기를 걸쳐 존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철기로 무장한 위만 등의 새로운 세력에 의해 통치를 마감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신화적 담론이 형성됐다는 것은 단군의 탄생(개국)과 죽음(망국) 시점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지배세력의 교체, 다시 말해서 곰의 모계사회가 사라지고 범의 부계사회가 등장한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왕검은 ‘엉큼’ 또는 ‘검’을 가리킨다. 즉 ‘큰 사람’[大人] 혹은 ‘신성한 사람’[神聖人] 또는 ‘정치적 지배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군이 조선왕의 ‘직함’ 또는 ‘통치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 도읍인 ‘왕검’은 땅이름(李奇 주장) 혹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던 성이름(臣讚 주장)이라고 했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보면 왕검은 땅이름 또는 성이름이기보다는 통치자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단군은 무조(巫祖)이자 국조(國祖)이며, 신라의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니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의 샤먼 킹이나 왕의 ‘직함’과도 상통한다. 반면 왕검은 그 샤먼 킹의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북방에서 이주한 세력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혁거세’나 가야의 ‘수로’ 역시 샤먼 킹이자 정치적 지배자의 이름이었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이자 상징이다. 동시에 우리 민족 정체성의 근거가 된다.

한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단군은 재해석돼 왔다. 때문에 단군은 분단 상황인 오늘에도 남북한 양쪽에서 크게 선창되고 있다. 북한은 평양에 거대한 단군릉을 세워 우리 민족의 주체의식을 단군과 연결시켜 해석해 왔다. 남한 역시 오래 전부터 단군학회를 결성했고 한민족 연합이라는 단체는 360개의 단군상을 전국의 초중고교에 세웠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 단체들이 단군상을 파괴하는 일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때문에 단군은 여전히 우리 민족의 국조이면서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상’(偶像)으로 인식돼 있다. 하지만 단군은 통일을 앞두고 있는 현재에도 남북한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기제임이 분명하다. 단군 이외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강력한 상징은 없다. 해서 우리 모두가 한국어를 쓰고 있고 한민족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 단군은 우리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공유하기 위한 유일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주산과 무대천신인 환인의 아들인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웠던 과연 아사달은 어디일까? ‘아사달’을 한자로 표기하면 ‘조양’(朝陽)이 된다. 지금의 요녕성 조양이라 할 수 있다. 조양은 ‘조선의양지바른 땅’을 일컫는다. 이곳은 단군 왕검이 조선을 연 도읍이다. 환웅은 하늘에서 요녕성(遼寧城) 북진(北鎭)시에 있는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여기서 태백산은 ‘의무려산’(醫巫閭山)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연은 이 백악산(白岳山)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지금의 묘향산이라고 비정했다. 고려 후기에 살았던 일연은 중국의 지리지인 〈산해경〉을 인용해 ‘무엽산’(無葉山) 또는 ‘백악’(白岳)이며 ‘백주’(白州)에 있다고 하고 그곳을 개성(開城)이자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라고 했다. 이것은 단군 왕검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고조선’의 첫 도읍지인 난하(?河) 건너편 요서지역의 ‘아사달’(朝陽, 옛 營州)의 흰 바위로 된 백악산(白岳山)인 의무려산을 인식하지 못하고 ‘신조선’의 도읍지인 대동강 유역의 평양(平壤)으로 잘못 비정했기 때문이다. 의무려산은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인 조선의 수도가 있던 현재의 요녕성 북진시에 있는 산이다. 환웅의 아들 단군 왕검은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고 아사달(조양)에 도읍으로 삼았다. 중국은 주나라 이후 요서지역 너머 동북 지역을 통칭하여 조선이라고 불렀다.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조선 최초의 헌법서인 〈조선경국전〉에는 조선이란 국호가 정해진 내력이 소개돼 있다.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뒤 명나라의 황제(朱元璋)에게 나라의 후보 이름이었던 ‘화령’(花翎)과 ‘조선’(朝鮮) 가운데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됐으므로 그 이름을 사용하라”고 권하자 조선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미루어보면 중국은 일찍부터 단군 왕검이 세웠던 조선의 존재를 알고서 이성계의 나라를 그것과 변별하여 (신)‘조선’을 권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옛부터 우리 민족의 진정한 주산은 백두산이 아니라 의무려산이었다. 이 의무려산에서 뻗어나간 동쪽 내맥이 백두산이 된 것이다. 그러면 민족의 주산이 왜 이렇게 변화됐을까? 우리는 환웅이 그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내려온 태백산을 어디로 비정할 것인가? 일연은 이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고조선의 주요 무대였던 요서지역의 조양(아사달)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평양’(平壤)이란 지명 역시 ‘평평한 토양’을 지닌 요서 지역의 조양 인근을 일컫는 것이다. 이것은 고조선 관련 사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일연 앞시대 역사가들이 연(燕)나라의 위만(魏滿)에게 밀려나 새롭게 건국한 신조선의 도읍인 평양을 고조선의 도읍으로 잘못 기록한 것에 연유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조선조 이래 다수의 학자들 역시 민족의 주산을 의무려산으로 보았다. 미수 허목은 “진산(鎭山)인 의무려산 아래에 고구려 주몽 씨가 졸본부여(의 수도)를 도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을 다녀왔던 담헌 홍대용은 “의무려산은 동이족과 중국족이 만나는 곳으로서 동북의 명산이다”고 했다.

구한말의 위암 장지연은 “북방 영토의 주산이 의무려산인데 그 내맥이 백두산이 됐다”고 했다. 이처럼 조선조 학자들 역시 고조선 이래 우리 민족의 주요 활동무대가 의무려산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고조선이 위만조선에 의해 밀려나고 위만조선 역시 한나라에 의해 평정되고 진번·임둔·낙랑·현도의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우리는 요서지역의 활동 무대를 상실하고 요동지역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우리 민족의 시원지였던 만리장성 바깥 동북 삼성의 광대한 영토를 무대로 했던 고조선의 영광은 재현되지 못했다. 고조선을 이은 부여와 고구려 및 대발해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중원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일연 이전 사가들의 역사 인식은 대발해 이후 대동강 전후를 넘나드는 반도 중심의 영토관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냉철한 역사적 감각을 지녔던 일연이 보여준 〈삼국유사〉의 영토 인식 역시 요서 및 요동의 광활한 무대를 담아내지 못했다.

참고문헌

윤내현, 〈고조선연구〉(일지사, 1994; 2004)

주채혁 〈순록치기가 본 조선 고구려 몽골〉(혜안, 200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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