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의 동자승들

스리랑카에 처음 가서 가장 깊은 감명 깊었던 것은 수많은 동자승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리랑카의 고대 도시이자 불치사(佛齒寺, 부처님의 불치사리를 봉안한 스리랑카 최고의 사찰)가 위치한 산악도시 ‘캔디’의 어느 동물원에서 만난 수백명의 동자승들은 진정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라의 미래가 그 아이들에 있듯이 종교의 미래도 가장 젊은 성직자들에게 있다. 도제교육(徒弟敎育)은 불교가 그 혜맥(慧脈)을 잇고, 교세를 넓힐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식인 것이다. 미국의 어느 기독교 종파 중에 특이한 종파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종단의 특징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은 그 종단의 마지막 남은 신도인 어린 소년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았는데, 그 소년도 결국은 어린 나이에 죽어 종단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은 인재불사(人才佛事)가 인간만사(人間萬事)의 종결적인 방안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웠던 일은 스리랑카 사찰들의 운영상황이었다. 스리랑카의 사찰들에는 신도들이 돈을 직접 시주하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가 생필품을 직접 시주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신도들이 시주한 물품들을 모아 팔아서 사찰의 운영경비를 조달하는 방식으로 사찰경영을 지탱하고 있다. 사찰에 있는 많은 동자승들의 도제교육비가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한 유엔의 어느 기관에서 몇 백만 달러의 보조예산을 배정해서 나눠졌다고 하나 역시 그 예산도 사찰운영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결국 많은 스리랑카의 동자승들은 정식교육을 받지 못한 채, 전통적인 사원교육제도인 ‘피레베나’에서 교리?수행?일반교양? 불경 등을 배우고 있다.


8세기 중반 아누라다푸라 시대 당시에는 스리랑카는 대승불교의 세계적인 근거지였다고 한다. 중국에서조차 스님들이 찾아와서 많은 경전을 가지고 갔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정릉 보국사에 처음 갔을 때 영정사진의 자운(慈雲)노스님이 남방가사를 가지런히 수(收)하신 채 그윽하게 웃고 계신 것을 보았다.
스님께서는 단일계단이 설립되기 이전인 1980년까지 해인사와 통도사 금강계단의 전계사로 비구 876명, 비구니 953명, 사미 207명, 사미니 212 등 2248명에게 계를 설하고, 1982년부터 8년간 1076명의 수계자를 배출하는데, 수계제자가 10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자운(慈雲) 노스님께서는 남방가사를 입고 계신 것일까? 끊어진 계맥을 스리랑카와 태국 같은 남방불교국가에서 이어오셨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와 미얀마, 태국 등은 자국의 불교가 쇠퇴하여 법통이 끊어지면, 이웃 나라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법통을 잇는 관습이 있다.


11세기에 미얀마, 13세기에 태국, 14세기에는 캄보디아로 불교를 전파한 스리랑카는 네덜란드 지배 당시(1655에서 1799)에 승단의 법통이 끊어졌을 때, 미얀마에서 비구를 초빙해 법통을 잇고 17세기 후반에는 태국에서 다시 전법을 받는다.
스리랑카의 도제교육(徒弟敎育)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대한불교조계종의 문제인 것이다. 청정(淸淨)을 지닌 스리랑카 동자승들의 얼굴에 지성(智性)의 혜안(慧眼)이 빛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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