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한 생각이 삼만 번 절하는 것보다 낫다

▲ 그림 최주현

여러분!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한국 불교 자체가 기복으로 전락된 지도 무척 오래됐습니다. 여러분은 정신계와 물질계가 동시에 움죽거려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해야 하는 이 지금 현시대를 똑똑히 보시면서 행하십시오. 기복으로 전락이 된 것뿐만 아니라 너무 구태의연하게 변함도 없고 발전도 없고, 차라리 예전 삼천년 전에 하던 그 식으로만 해도 좋을 텐데, 이조 말엽 때에 그 탄압에 못 이겨서 모두 방편상 세워놓고 가져오는 것들을 가지고 공부들을 하면서 이런 첨단의 시대에도 그대로 지금까지 개선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좀더 참답게 이것을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진화돼서 창조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 자재권을 가지고 있으며, 해탈권을 가지고 있고 부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100%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잊어버릴까봐 지금 내가 생각 나는 대로 말합니다.

부처님은 하나인 것입니다. 왜 하나냐고요? 부처님이 찰나에 나투시면서 응(應)해주시는 그 응신(應身)이 바로 풀 한 포기에도 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보시를 달라고 한다면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도 자동적으로 응해주신다 이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만 분이 성불을 했고 열반계(涅槃界)를 마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지 둘이 아닙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하나도 어느 몸이 내 몸이 아닌 게 없이 나투시고, 어느 마음도 내 마음 아닌 게 없이 나투시고, 어느 자리도 내 자리 아닌 게 없이 나투시고, 어느 모습 하나도 내 모습 아닌 게 없느니라 하신 까닭에, 부처님이라는 그 이름은 어느 것이 될 때에 부처님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입니다.

내가 항상 얘기하죠. 가정에서 부모가 아버지 노릇 하고 아들 노릇 하고, 남편 노릇 하고 형 노릇 하고 사위 노릇 하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처럼 지금 금속이 아니 쓰이는 데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금속 하나가 아니 쓰이는 데 없죠? 전력도 그렇습니다. 이 전력 하나가 천차만별로 쓰이고 있습니다. 부처님 마음도 그러하다 이겁니다. 즉 말하자면 ‘광석이나 또는 전력과 같아서 어느 한 군데도 안 쓰이는 데가 없다.’ 이렇게 아시면 이해가 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용도로 내가 썼다고 할 때에 전력이 썼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 가정에서 아버지다 어머니다 하고 이렇게 이름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마음은 아촉도 되고 아미타도 되고 관세음도 되고 지장도 되고 칠성도 되고 산신도 되고 용신도 되고 약사도 되고 지신도 되고 신중도 되고, 모든 게, 아니 되는 게 없다 이겁니다. 그 전력 하나로 여러 용도를 다 쓰듯이….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한 분을 모셔놓은 것도 우리 모르는 중생들을 위해서 해놓은 방편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방편으로 모셔놓은 그 자체를 알고보면은 그게 실체라고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내 몸이요, 내 형상이요 바로 내 마음이요 내 생명이요 둘이 아닌 까닭에 그대롭니다, 그대로. 그래서 우리는 모습으로 움죽거리지마는, 우리의 마음이 한마음으로 조성이 된 이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들이 다 거기에 포함돼서 나고 든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우리 공부하는 데는 한 분만 모셔놔도 족하다는 것은 그래야 우리가 마음을 한데 모아서 헛갈리지 않고 잘 공부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방생입니다. 방생은 예전에 물이 오르고 다시 내려올 때에 고기들 또는 지렁이, 미꾸라지 또는 남생이,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모두 그냥 산에 떨어지거나 길에 떨어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예가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예전엔 그랬습니다. 그래서 스님네들이 물 바깥에 흩어진 그 생명들을 위해서 이만한 그릇에다 물을 담아가지고 거기다 주워담아서 물에다 넣어줬다 이겁니다. 그것이 유래가 돼서 이렇게 방생이라는 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시대가 발전이 되는 이 시점에서 그런 것을 한번 생각해서 마음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방생이라는 거는 물 바깥에 난 것만 방생이 아닙니다. 물을 잃고 바깥에 나선 것을 바로 물에 넣어주는 것이 방생이요, 돈이 없어서 사람들이 방을 얻지 못하고 거리로 나앉은 것도 도와 주면은 방생이요, 먹지 못해서 굶어서 비실비실하는 것도 도와 주면은 방생이요, 취직을 못하고 식구가 다 굶을 정도로 됐을 때에 취직을 시켜주는 것도 방생이요, 어려울 때에 무주상 보시(無住相布施)로써 도와주는 것도 방생입니다. 또는 부모가 없이 자라는 애들한테 보시를 하는 것도 방생이요, 어느 거 하나 방생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방생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개선해야 되지 않을까요? 잘 노는 고기들을 잡아다가 잡는 데 죽이고, 잡아다 놓는 데 죽이고, 또 방생해서 물에 갖다 넣는 데 죽입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그런 말을 가끔 합니다마는 8·15 해방 되기 전의 얘깁니다. 탄광으로 붙들려가고, 모두 징용으로 붙들려가고, 정신대로 붙들려가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다 붙들려갔습니다. 붙들려가서 8·15 해방이 되니까 와 쏟아졌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자기네 집들을 찾으러 산지사방으로 흐트러져서 그냥 그 차 꼭대기에도 타고 오고, 위도 타고 또 어디 타지 못하고 걸어오면서, 이렇게 하면서 그냥 무수히 죽어갔습니다.

그와 같이 고기도 자기 놀던 집이 있습니다. 미꾸라지는 미꾸라지대로 진흙물이 자기 집이요 또는 어떠한 고기라도 물에 넣어주면 몇 십리라도 자기 놀던 데로 갑니다. 우리 인간이 자기 집 찾아가듯. 그러다가 중간쯤 가서 죽고, 중간도 못 가서 죽고 이럽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거는 놀부짓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방생은 그래서 지금 고기들 잡아가지고 그렇게 하는 방생은 폐지해야 됩니다.

셋째 천도재, 제사 이런 걸 말하겠습니다. 천도라는 것은 우리가 육의 부모의 조상이나, 법의 부모의 조상이나 조상은 크고 작을 뿐이지 다 똑같습니다. 왜 똑같으냐? 자식이 물에 빠지면은 부모는 자기가 물에 빠져죽더라도 그 자식을 건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라지 않는 마음,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렇죠? 그건 부정 못하죠?

마음의 밝음!
마음의 등이라는 것은
아무리 소낙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어서
온통 나무가 쓰러지고 불이 다 꺼져도
마음의 불이라는 것은 꺼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등을 켜십시오.
이러한 등을 켜시는 것이 우리에게 공덕이 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에 이 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에서만이 그런 것이고, 이 법의 부모는 전체의 부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적든 크든 그 아리따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조건 없는 마음, 이 마음은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조상은 다 한자립니다. 여러분이 “한자리가 아니야!” 하면은 한자리가 아니게 됩니다. 이 생각이라는 게 아주 기구하고 운명적이고 묘한 것이고 광대한 것입니다, 이 생각 하나가. 생각 하나가 구덩이에 빠뜨리고, 그냥 부도가 나게 하고 생각 하나가 모두 망하게 하느냐, 회사를 일으키느냐 이런 것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생각하나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떡을, 찰떡을 뚱그렇게 하나 해서 놓고 초, 향, 물 이렇게 놓고 지내는 것에 불평 불만이 없었습니까? 그렇게 지내는 그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공양’이라고 하죠. ‘떡 공양’합니다. 떡 공양 하면은 그 떡 하나로 인해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먹고도 남음이 있다 이겁니다. 되남는다 이겁니다. 즉 말하자면 수박을 죄 먹고 그 씨를 되심어서 또 수박이 나면, 수박을 되먹고 또 씨가 남고 이러듯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두의 떡 공양입니다, 그래서. 공양, 전체가 다 먹을 수 있다. 원자가 입자가 되고 분자가 돼서 수효가 말할 수 없이 많이 있어도, 다 통신이 되고 전달이 되고 이렇게 같이같이 어울려서 돌아가면서 원자가 됐다 입자가 됐다 분자가 됐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리가 그렇게 많아도 다 통신이 돼서 내려먹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이 마음들도 부처님 공양 한 그릇 하면 공양, 이 공양 한 그릇 할 때에 벌써 공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향! 누구가 덜 먹고 더 먹고 이런 게 없이 이 전부 허공이 다, 전체가 다 먹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나물, 국 뭐, 이런 거는 사람이 살던 습관에 의해서 부모를 위한다고 그렇게 전부 차려놓습니다. 그러면 그 차려놓은 것만 영령(英靈)이 보지 그 외의 것은 보지 못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자식들이 차려놓은 요거를 요렇게 차리고 요렇게 차렸다는 마음이 있는데 자기가 차린 거 자기가 모르겠습니까? 그 마음을 본다 이겁니다, 조상이. 그 마음을 보고 그 차려놓은 것이 얼마만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허공 전체가 내 것 아님이 없이 그 떡 하나로써 해놓는다면, 떡 공양을 해놓는다면 이 전체 돌아가는 그 광대무변한 법을 조상들이 다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아쉬운 게 없어집니다, 내 것 아님이 없기 때문에. 내 자리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것 아님이 없고, 모두가 내 아픔 아님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사랑, 의리, 도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역력하게 부처님과 한자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차려놓고선 오히려 여러분의 적은 마음에서 정성을 한다고 또 때로는 니가 더 댔느니 내가 더 댔느니 또는 너는 마음에도 없는 거 했느니 말았느니 하고 서로 말다툼을 해가면서, 그 음식도 돈을 더 댔느니 덜 댔느니 하면서 차립니다, 그거나마도. 그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길러준 은혜, 낳아준 은혜 또는 모든 은혜를 생각해서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덕 향을 올려라. 이 마음은 밝은 마음으로서 지혜롭게 마음을 아주 선명하고 광대하게 내어서, 그것은 향입니다. 마음을 내어서 이 떡 공양을 올릴 때 모두가 부처님 한자리로 올려질 때에 모두가 통신이 되고 하달이 되고 그래서 모두가 다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 내 거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거나 안 보이는 거나, 생각이 있는 거나 없는 거나 모두 다 받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한다면 무명이 저절로 벗겨진다 이 소립니다. 돌아가신 부모들도 무명이 저절로, 얽히고설키고 묶여있던 무명이 그냥 벗겨진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한자리를 하게 되는 겁니다.

또 한마디를 마저 해야죠. 사람이 죽으면 인과로 인해서 뭉쳐져 있는 그 업식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이 다 그렇게 한다면 어느 사이에 그 공덕을 받아서 자연적으로 그 무명이, 묶였던 무명이 바로 무너지면서 풀어지면서 이것은 자유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이거 지내고 또 저거 지내고…, 이것이 목탁으로 두들기고 염불만 해서 천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음식을 많이 차려놓는다고 해서 영령(英靈)들이 다 먹는 게 아닙니다. 그건 살아생전에 살아오던 습 때문에, 그 습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떠나질 못하고 그냥 뱅뱅 돌고 돌면서 아는 집으로 돌고 떠나질 못하고, 반찬이나 국이나 이런 거 해놓는 것만 그 냄새나 맡으려고 하고, 이렇게 오히려 자손들이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이 개선해야 한다 이겁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천도재도 그렇지마는 제사도 그렇습니다. 똑같습니다. 그거는 둘이 아니기에 항상 제사도 집에서 지낼 때에 그렇게 향, 초, 다기, 물, 물은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밝게, 초는 밝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밝은 마음으로써 아주 발전적인 마음을 내는 게 향입니다. 마음의 향! 그런데다가 바로 떡 공양을 하면서 제사를 올리면서, 세 번 절하고 네 번째 가서 ‘이 모든 일체 부처님 자리에 한자리 하게 하는 것도 주인공밖에 없어.' 하고 거기다가 맡겨놓으면은 그대로입니다.

제사 지내는 것은 부모님이 승천을 했다고 해서 안 지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 기리는 마음이니깐 말입니다. “천도재를 지냈는데 왜 제사는 지내?” 이러는 분들도 있겠죠.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언제나, 언제든지, 부모한테만 은혜가 있는 게 아니라 지수화풍에도 그 감사한 은혜가 있고, 국민의 은혜, 일체 만물의 은혜, 하다못해 이 돌의 은혜, 모든 식물의 은혜, 이 은혜가 아니 되는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포함해서 모두 한마음에 그저 둥글리는 마음으로써 한생각으로 둥글려 놓고 참, 참다운 생각을 한 번 한다면, 그거는 삼만 번을 절하는 거보다 낫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침착하게 개선해나가고 마음으로써 발전을 해서,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이 없이 타개할 수 있고 물리가 터지게 해서 지혜로운 삶을 살게끔 하는 것이 모두 좋은 일이며, 스님네들이나 여러분이 다 그러합니다. 스님네들은 부처님의 대리로서, 여러분이 볼 때는 방편으로 대리 역할이요, 진실로서는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뜻과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그 이치를, 진리를 그대로 우리는 받아서 행해야 될 것입니다.

또 넷째, 예수재 등을 하고들 있습니다. 예수재를 얼른 쉽게 말하면은, 여러분이 요다음에 목돈을 쓰기 위해서 은행에다가 돈을 예치를 하는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 예치를 한 돈을 은행원들이 예치를 해서 통장에다가 딱 넣어주고 그러면 됐지, 그 돈을 부숴뜨려서 음식을 만들고 닷새 엿새 이레까지 두들기고 온통 해봤자 오히려 그 예치한 사람들의 손해란 말입니다. 예치를 한 돈에서 부쉈으니까, 그러니까 예금을 찾아갈 때에 외려 예금한 돈이 줄어든다 이겁니다. 우리가 지금 냉철하게 말하면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외려 줄어든다 이겁니다. 줄어도 아주 많이 줄어들죠. 왜냐?

그렇게 부숴뜨리죠, ‘인제는 이렇게 해줬으니까 내 거다.’ 이러고 쓰죠? 아, 이러니 공덕이 하나나 될 게 뭐 있습니까? 요다음에 나올 때에 예금통장커녕 아무것도 가져 나올 게 없어져. 부숴뜨려놓은 뒤에도 그 돈이 바로 내 절에 들어온 거니까 내 거다, 내가 마음대로 이렇게 해버리는 수가 많거든요. 그러니 쓸 데다가 써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공덕이 안된다 이겁니다. 해주는 사람과 해달라는 사람과 같이 맞아야 불이 들어오게 돼 있죠. 그런데 예수재를 올릴 때에 제가 생각할 때는 은행에다가 올리게 되면은 상부에까지 지시가 갑니다, 이 돈 문제가. 즉 자재천(自在天)에까지. 그래서 경리과에서, 경리과에까지 하달이 됩니다. 그래서 경리과에서 이 사람이 아무 때 연분에 이렇게 했는데, 아무 때 연분에 나갈 때는 이 통장을 찾아가지고 나간다는 기록까지도 다 예치가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아는 것을 우리가 전부 알고, 이 세상에 만물만생이 전부 우주간 법계에 다 전달이 돼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짓이라는 건 없어요! 절대적입니다. 가게 물건을 사러 갔을 때에 돈대로 물건 사지 내가 물건 사고 싶다고 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철칙입니다. 그러니 예수재라는 게 두들겨서만 되는 게 아니고, 마음씨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스님네들 피곤하지 또 예금한 거 부숴지지 또는 아무렇게나 써서 온통 공덕이 되질 않아서 남이 정작 찾아가지고 나갈 땐 맨손 들고 나가게 한다면 그 업보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다면 구렁이밖에 더 되겠습니까? 수없이 모습을 갈아서 바꿔서 무명을 쓰고 나오는데 말입니다. 허! 이 도리를 안다면은 참 무서운 도리죠. 그러나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이 그대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주 그대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아주 좋습니다.

다섯번째, 초파일 등(燈)입니다. 하하하. 이 초파일 등, 전자에 보면 말입니다, 갖은 사찰에 돈 많이 내는 사람은 큰 등, 돈 적게 내는 사람은 작은 등, 얼마짜리 얼마짜리 얼마짜리 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다 똑같듯이, 이것도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등은 누구나가 다 똑같이 달아야 합니다. 똑같으니까. 그러나 불을 켜는 사람에 의해서 이거는 철두철명하고 에누리가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가 백만 원을 했으면 백만 원의 물건을 가져갈 거고 만 원을 냈으면 만 원짜리 물건을 가져갈 거고, 그건 자기네들 자유지, 자기네들이 어떠한 애고에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 그렇게 자유스럽게 할 뿐이지, 왜 스님네들이 걱정을 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이 스님네들은 남이 얼마만큼 아픈지 얼마나 어떠한 용도인지 그것도 자세히 모릅니다. 그런데 본인은 너무 잘 알거든요. 내가 애고가 이런 것이 있다, 병고에 이렇게 휘달린다, 내가 취직을 못하고 놀아서 가정이 아주 살기가 어렵다 뭐 이런 등등, 여러 가지로 이렇게 다가왔을 때에 자기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자기 거짓이 없이, 자기가 쓰레기가 많아 치울 것이 몇 트럭이라면은 몇 트럭 값을 있으면 내야 하고, 몇 트럭 치울 거라도 내가 몇 트럭 치울 금액을 줄 수가 없을 때, 어려워서 줄 수가 없을 때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등을 켜야 되지 않을까요? 다만 얼마라도 내고 말입니다.

그러니만큼 이거는 등도 똑같아야 하고, 정성은 정성대로 여러분의 차원대로 정성을 지극하게 해서 하시는 게 바로 사월초파일날 등입니다. 마음의 밝음! 그래서 마음의 등이라는 것은 아무리 소낙비가 쏟아지지 않아 천하 없어도, 바람이 불어서 온통 나무가 쓰러지고 불이 다 꺼져도 마음의 불이라는 것은 꺼지질 않습니다. 이러한 등을 켜십시오. 이러한 등을 켜시는 것이, 우리에게 공덕이 될 뿐만 아니라 삶의 보람을 갖게 되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게 되고, 세세생생에 이 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심사숙고하고 잘 들어서 그대로 행하시면 이 시대에서 아주 빠지지 않는 삶을 누릴 거고, 빠지지 않는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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