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② 한번 앉아서 일을 마치다

천장암서 누더기 입고 1년 장좌불와

숨쉬는 등신불 같던 용맹정진 끝에

심신 습기 조복받아

생사자재행함 없고 한가로운 오도가 불러

동학사 법회서 강주 스님이

“곧은 나무라야 쓸모 있다” 하자

경허 스님 법석 올라 말하기를

“삐뚠 것은 삐뚠 대로 곧은 것”

계룡산 동학사에서 젊고 유능한 강사로 명망이 높은 경허 스님에게 수학하려고 밀려드는 학인들의 수는 나날이 많아져 갔다.하지만 발심한 경허 스님은 강사를 그만두고 조용한 수도처를 찾았다. 이는 생사의 무상함을 깊이 느껴 장부의 대사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동학사에서 주장자와 발우를 거둔 뒤 스님이 찾은 수행처는 홍주 내포였다. 오늘날 충남 서산군 연암산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이다.바랑을 풀고, 경허 스님은 마음껏 용맹 정진했다. 천장암은 학인·신도 등 누구도 찾지 않는 조용한 암자로 정진하기에는 다시 없는 곳이었다.

경허 스님의 수행은 철저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스님은 일반인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치열하게 수행했다. 스님은 솜을 덧대어 지은 누더기 한 벌을 입고 꼬박 1년 동안 장좌불와를 했다. 공양을 하거나 대소변을 보는 일 이외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좌선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세수나 양치, 목욕하는 일까지 돌보지 않고 언제나 오직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잠을 자기 위해 눕거나 벽에 기대는 일도 전혀 없었다. 숨쉬는 등신불과 같아 때로는 사람들이 절에 와 소란을 피워도 경계에 마음쏠림이 없었다. 스님이 1년간 면벽하는 동안 몸도 씻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아 땀에 찌든 누더기 옷과 머리에는 싸락눈이 내린 것처럼 이가 들끓었다.

이가 너무나 많아 마치 두부를 짠 비지를 온몸에 문질러 놓은 것처럼 허옇게 될 정도였다.보다 못해 사람들이 새 옷을 수행방 밖에 가져다 놓고 ‘스님, 제발 옷 좀 갈아입으세요’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스님은 일체 용납하지 않았다. 경허 스님은 철저한 용맹 정진 속에서 안으로 일어나는 번뇌의 습성과 밖에서 오는 유혹의 경계에 동요되지 않는 마음과 몸의 습기(習機)를 조복 받았다.

스님은 생사에 자재 할 수 있는 경계에서 수행을 계속했다.이와 같은 정진을 계속해 1년을 채운 날 경허 스님은 주장자를 문 밖에 내 던지고 입었던 옷을 활짝 벗어 던지며 쾌활한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경허 스님의 오도가다.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頓覺三千是我家(돈각삼천시아가)

六月燕巖山下路(유월연암산하로)

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 듣고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 집임을 몰록 깨달았네유월 연암산 아랫길에들 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확철대오한 경허 스님은 천장암에서 유유자적하며 낮에는 맑은 바람과 사귀고 밤에는 밝은 달과 벗하였다.

스님은 때로는 구멍 없는 피리를 불고 때로는 줄 없는 거문고를 타면서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든 일 없는 사람이었다. 또 행함이 없는 참사람이며 한가로운 도인이었다. 깨우친 경허 스님에 대한 일화다. 어느날 밤 만공 스님이 큰 방에 볼 일이 있어 호롱불을 들고 들어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큰 뱀 한 마리가 경허 스님의 배 위에서 놀고 있기 때문이었다.만공 스님이 “스님 배 위에 뱀이 걸쳐 있습니다”고 말하자 경허 스님은 놀라지도 않고 그대로 누운 채 “가만히 내버려 두어라, 실컷 나와 놀다 가도록 내버려두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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