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① - 시체 즐비한 마을서 발심

나하나 살고 죽는 문제도 수습할 줄 모르면서

중생을 인도 하겠다니참으로 어리석은 것

날카로운 송곳 턱밑에 놓고수마 쫓으며 참선 정진

백천법문 문득 재가 되니한국 근대선의 서막 올라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은 한국불교 중흥조이다. 스님은 1849년 전주에서 출생해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 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했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경허 스님은 억불숭유로 바람 앞 촛불과 같던 때 선맥을 되살린 선지식이다.

큰 깨달음을 얻어 대자유인의 경지에 오른 스님의 도리가 얼마나 깊고 높은지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가 없다. 경허 스님의 행적은 어떤 때는 심산유곡에 깃들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시끄러운 저자 한복판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스님은 ‘고삐 뚫을 구멍 없는 소’를 확연히 안 뒤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경허 스님 열반 100주년을 맞아 만행보살 경허 스님의 일화 연재를 통해 선지식의 진면목을 들여다본다.


경허 스님은 20대에 동학사(東鶴寺)에서 대강사로 이름을 떨친 대강백이었다. 스님은 경(經)은 물론이고 〈장자〉(莊子) 곧 〈남화경〉(南華經)까지 숙독(熟讀)해 내ㆍ외전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대강백이 머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동학사 강원은 사방에서 구름같이 몰려드는 학인들로 초만원을 이뤘다.1879년 여름, 강사 8년으로 30대에 접어든 경허 스님이 옛 은사 계허(桂虛) 스님을 뵈려고 경기 안양 근교 청계사(淸溪寺)로 향했다.

길을 가던 중 천안 근처에서 였다. 경허 스님은 갑작스런 뇌성 벽력과 함께 억수같이 퍼붓는 소낙비를 만나 어느 초가 처마 밑에 있어야 했다. 얼마 후 집 주인이 나타났다.“송장 치우기에 진력이 났는데 누가 또 와 있담. 죽더라도 내 집에선 나가 죽으시오, 어서!”

혀를 차며 다짜고짜 스님의 등을 밀어내 그 집 멀리로 내 쫓았다. 경허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다른 집으로 가 비를 피하려 했지만 이집도 마찬가지로 밖으로 내 모는 게 아닌가.

“괴질로 사람이 다 죽어가는 판인데 뭐 하러 여기 왔소? 여기까지 왔으니 스님도 살아가긴 어렵겠구려, 제발 이 집만은 떠나 주시오.”

집집마다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쓰러진 주검들이 즐비했다. 당시 콜레라는 전국적으로 불치의 전염병이었다. 세찬 비바람 속에 그 촌락을 벗어난 경허 스님은 심한 현기증으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나 또한 전염병에 걸리면 죽지 않을 수 없다.

저 송장들과 다를 바 없는 나 역시 생사(生死)의 낭떠러지에 와 있지 않은가. 나 하나 살고 죽는 문제도 수습할 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며 철없이 중 노릇을 하다니, 교리문자(敎理文字)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자신도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부처님의 길로 중생을 인도한다 함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이제라도 스스로가 생사를 영단(永斷)하는 길이 있다면 오직 참선(參禪)하는 길 밖에 더 있겠는가!’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스님은 한시가 소중했다.

경허 스님은 은사스님을 뵈러 청계사로 향하던 발걸음을 동학사로 되돌렸다. 돌아오는 동안에도 스님은 어서 생사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분심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무리 1700공안의 화두를 헤아려 보았으나 의심의 구름은 좀처럼 걷힐 줄 몰라 캄캄 절벽이었다.

갑자기 한 화두가 스님을 사로잡았다.나귀의 일 아직 안했는데 [驢事未去]말의 일이 닥쳐 왔음이여 [馬事到來]스님의 화두에 대한 의심은 더 큰 의심의 구름을 일으킬 뿐이었다. 한 생각에 젖어 든 경허 스님은 동학사에 돌아오자마자 강원의 학인들을 다 흩어 버리고 조실 방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경허 스님은 영운(靈雲) 선사의 화두 ‘나귀의 일, 말의 일’을 참구했다. 좌선 삼매 중 졸음이 몰려왔다. 조는 시간도 아까웠다. 스님은 수마를 쫓기 위해 물리치고자 날카로운 송곳을 턱 밑에 세워놓고 참선을 했다. 스님이 정진하다 깜빡 깜빡 졸 때마다 스님의 이마에는 선혈이 흘렀다. 살이 찔린 자리에는 피가 엉겨 붙었다. 얼굴은 흡사 두꺼비 등껍질과 같았다.

마침내! 경허 스님은 수마(睡魔)의 조복을 받으며 화두에 대한 의심이 샘물 솟듯 하여 한 생각이 영원에 이르는 경지에 다달았다. 스님의 화두를 향한 일념은 은산철벽도 꿰뚫을 기세였다. 경허 스님은 용맹정진을 이어갔다.참선 석 달만의 어느 날이었다.

동짓달 보름께 동학사 학명도일(學明道一) 스님이 아래 마을에 출타했다가 이 진사(李 進士)라는 처사를 만났다.

“스님, 요새 중노릇을 어떻게 하십니까?”

“경 읽고 염불하며 주력(呪力)하고 가람수호하는 일과의 연속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중 노릇을 잘못하시면 소가 되고 맙니다.”

“아이고, 그럼 어떻게 해야 소가 안 됩니까?”

산승의 물음에 이 진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소가 돼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고 해야죠.”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

진사의 말에 학명 스님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 옆에 있던 사미승 동은(東隱)도 마찬가지였다.동은 사미는 이 진사의 아들 이원규로 동학사에서 행자 수업 중이었다. 학명 스님과 동은 사미승은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절에 올라오자마자 여러 대중들 앞에서 물었다.

“대중들은 중 노릇 잘못하면 소가 되는 이치를 아십니까?”

“소가 돼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 말을 들은 대중 가운데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들 궁금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는 대중이 아무도 없자 학명 스님은 ‘정진 중인 조실 스님께 여쭤야겠다’고 생각했다.

학명 스님이 경허 스님 방을 두드렸다.

“스님께서는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의 깊은 뜻을 아십니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경허 스님은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의 도리를 묻는 물음에 활연 대오(豁然 大悟)했다.때는 1879년 11월 보름 무렵이었다. 경허 스님의 대오각성은 한 수좌의 한 소식을 뛰어넘을 한국 근대선의 서막이 오름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 순간, 천하대지가 송두리째 빠져나가고 물아(物我)가 함께 공(空)해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한 묘의(妙意)가 한 생각에 문득 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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