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6호 5월 2일]

학승이 물었다.
“대중이 운집했습니다. 무슨 일에 대한 것을 함께 담론하시겠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오늘은 나무를 끌고 와서 승당을 세워볼까한다.”
학승이 물었다.
“그것은 결국 학인을 교화하는 일과 관련된 일 아닙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노승은 주사위도 놀이도 모르고 장행(長行)도 알지 못한다네.”

問 大衆雲集合談何事
師云 今日拽木頭豎僧堂
云莫只者箇便是接學人也無
師云 老僧不解雙陸 不解長行

쌍육과 장행이 당시의 놀음판이나 게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중국 1200 년 전의 일이라 불분명하다. 여기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쌍육을 주사위로 풀어보았다.

선원(禪院)에서도 규율을 풀고 편안하게 쉬며 하루를 보내는 날이 있다. 바로 설날 같은 때이다. 이때에는 선원마다 다르지만 어떤 선원은 그냥 하루를 조용히 쉬기도 하고, 혹은 차담을 먹으면서 담론하기도 하고, 어떤 선원은 편을 갈라 윷놀이를 한다.

조주 선사가 있는 절에서도 명절 같은 날을 맞게 되었던 모양이다. 대중이 모이고 큰스님을 불렀다. 큰스님이 오시자, 어떤 학인이 무엇에 대하여 함께 담론하시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오늘은 나무를 끌어와 승당 짓는 일을 담론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학인이 “그것은 결국 교화사업과 관련된 일 아닙니까? 스님, 오늘은 편히 쉬면서 놀이나 담론을 즐기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말하자, “나는 그런 놀이에는 관심도 없고 할 줄도 몰라”라고 잘라서 말한 것이다.

사람을 규율로 너무 가두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그래서 일 년에 한번 정도는 휴식을 허락하고 있지만, 그 시간에도 110세 이상의 노화상 조주 스님은 한사람이라도 더 진실을 깨닫게 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오늘날 걸식을 업으로 하는 수행자는 조주 화상의 이 정신을 깊이 본받아야 한다. 골프, 호화 승용차, 화려한 외국 여행 등은 모두 수행자에게 적합하지 않다. 언젠가 고통으로 되갚을 날이 있을 것임을 명심하라.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인체의 진실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춘하추동이야.”
학승이 물었다.
“그 말씀은 학인이 알기 어렵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너는 나에게 인체의 진실을 물었잖아.”

問 如何是眞實人體
師云 春夏秋冬
云與麽卽學人難會
師 你問我眞實人體


인체(人體) 그 자체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 몸의 진실은 무엇인가? 춘하추동과 같다. 태어날 때는 봄이고, 성장기는 여름이며, 중년기는 가을이며, 노년기는 겨울과 같다. 계절이 어김없이 다가오듯 인생 또한 어김없이 질병, 늙음, 죽음이 다가온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는다. 죽으면 원래 없는 곳으로 되돌아간다. 죽은 뒤에도 나는 없다. 나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 몸은 지수화풍 4대가 인연을 따라 만들어진 임시적 존재이다. 순수한 영혼이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빌려 입은 영혼의 옷이다. 시간이 되면 옷을 벗고 떠난다.

순수한 영혼은 무엇인가? 부처가 잠자고 있는 영혼이다. 우주의 근원이다. 부처의 심성이 있어서 순수하다고 말한다. 어찌해서 부처가 잠자게 되었는가? 만물은 부처의 분신이다. 만물은 깨어날 필요 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중생은 영혼이 있어 스스로 깨어날 수 있다. 만물은 깨어나야 자기를 안다. 중생은 잠에서 깨어나 자기를 알 수 있다.

이 허망한 육신이 재물을 얻고 명예를 얻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큰 스님 법문에 이 몸은 제분기(製糞機)라 했다. 순수하게 이 몸이 하는 일은 평생 똥을 만들어내는 일 뿐이라는 말이다. 참 뜻 깊은 법문이다. 그 제분기에 명품을 걸쳐놓고 근사한 모자를 쓴다고 냄새가 안 나겠는가? 온갖 격식을 갖춘다고 고귀해질 것인가? 모두 헛된 만족이고 자기도취이다. 진실이 잠자는 영혼이 추구하는 세계는 헛된 세계이다. 욕망의 세계는 추구하는 만큼 고통이 따른다. 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중생의 잠에서 깨어나면 즉시 붓다의 세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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