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 소견(所見)

학승 혜원ㆍ시인 도연명ㆍ도사 육수정
만남 한중일에 전파…新사상 수용의 예  

대표적인 중국의 삼대(三大)사상은 불교와 유교 도교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토착화(土着化)되는 과정에서 많은 불교적 변용(變容)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가장 현저한 변화 중 하나는 사상과 종교와의 타협이다.

 중국의 불교는 인도와는 다르게 상당히 다양한 면에서 그야말로 중국적인 사상이라고 할 정도로 시기적으로 점차 변해가다가 완전히 정착한 상태의 불교를 한반도로 전해준다. 현재 한국의 불교는 사실 당(唐)나라 방식의 선불교(禪佛敎)의 변용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를 토착화시키려는 중국의 승려들과 불자들은 그 타협하는 과정에서 권력에 도전(挑戰)하기도 하고 엄청난 분량의 중국적인 불교 위경(僞經)을 지어내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공산주의라는 사상의 지배하에 있지만 결국은 중국을 대표하는 최대 종교로서의 현재를 만들어냈다.

그런 과정에서 그려진 그림이 바로 호계삼소(虎溪三笑)이다. 남송(南宋)의 진성유(陳聖兪)가 지은 <여산기>(廬山記)에 보면 동진(東晋)의 유명한 학승인 혜원(慧遠)이 사는 여산 동림사(東林寺)에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당대의 시인인 도연명(陶淵明)과 도교(道敎)교학을 대성한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이 찾아온다.

당시(當時) 혜원 화상은 동림사에 살면서 서원하기를 평생 산문(山門)밖을 나서지 않기로 하였다 한다. 적어도 30년간 혜원스님은 속세(俗世)와 산중(山中)을 가르는 경계인 호계(虎溪)넘어간 적이 없었다. 혜원스님이 호계를 넘으려 하면 호랑이가 크게 울어 경고(警告)를 하기에 혜원스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유교(儒敎)를 대표하는 선비인 도연명과 도사(道士) 육수정이 찾아와 종일 차담을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교유(交遊)를 즐겼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돌아가는 길을 배웅하면서 재미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호계에 걸친 다리를 지나버렸다. 그 순간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를 듣고 서원을 깬 것을 알고도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한다.

여산(廬山) 혜원(慧遠)은 유교를 어릴 때 익히고, 이어서 노장(老莊)의 도를 닦다가 20여세가 넘어 출가해서 여산에서 불교역경(佛敎譯經)에 전념했다.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을 모아 염불결사인 '백련사(白蓮社)'라는 결사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평소 '影不出山 跡不入俗‘(그림자 산을 벗어나지 아니하고, 발자취는 속세에 들이지 않는다)는 글을 써서 걸어 두고 살았다 한다.

그러나 사실(史實)을 확인해 보면, 이 이야기는 삼교(三敎)의 화합(和合)을 위한 위조된 이야기다. 왜냐하면 육수정이 여산에 처음 도착한 것은 원가(元嘉, 424-453) 말년이었다. 이 때는 이미 혜원이 입적(入寂)한 30년 후이며 도연명이 죽은 20년 후이기에 세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은 한ㆍ중ㆍ일 동양 삼국의 나라에서 그 이후 계속해서 그려지고 감상되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이 그린 그림이 전하고 일본과 중국에서는 웬만한 대가들은 다 한 번씩 그리는 인기 있는 주제다.

그리하여 최근에 종교간 갈등을 심각하게 겪고 있는 한국에서는 비구니, 원불교 교무, 가톨릭 수녀회가 모임을 같이 하면서 그 이름을 딴 ‘삼소회(三笑會)’라는 만남도 이루어졌다.

그건 그렇고, 종교간 갈등이 심화되는 이 시대에 호전적(好戰的)이고, 배타적(排他的)인 두 가지 특성을 지닌 미국식 한국기독교가 한국사회의 화합을 저해하는 이 상황에서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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