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달화상 진영과 the Composition by Mondrian

-공산개조 극달화상지진영

 

 

동화사사적기(桐華寺史蹟記)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知王, ? - 500) 15년(493)에 극달 존숙(尊宿) 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師)라고 부르다가 흥덕왕(興德王) 7년(832) 심지(心地) 왕사(王師)가 중창할 때 오동(梧桐)나무가 겨울에 상서롭게 꽃 피웠다고 하여 ‘오동나무꽃절’이라고 이름을 고친 절이 바로 동화사이다.

그런데 극달화상의 창건설은 사실 일반 사서(史書)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지 1931년 김정래 선생이 지은 조선불교 선교양종 제일 수사찰 대본산 경북 달성군 공산면 동화사적비(朝鮮佛敎禪敎兩宗第一首寺刹大本山慶北達城郡公山面桐華寺蹟碑)에 위의 사실(史實)이 나올 따름이다. 그럼에도 갓바위 부처님을 관리하는 선본사(禪本寺)와 북지장사(北地藏寺)도 극달 화상께서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동화사 성보박물관 전시실에는 원래 조사전에 모셔져있던 공산개조극달화상지진영(公山開祖極達和尙之眞影)이라는 해제(解題)가 붙은 111.7㎝×77.2㎝의 영정이 걸려있다. 탱화라는 명칭에 걸맞는 극달존자의 형형(熒熒)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 큰 귀를 지녔다. 균형 잡힌 얼굴, 파르라니 깍은 수염과 잘깍은 잔디밭 같은 머리, 회색의 장삼과 붉은 가사를 입고 있다.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침착하게 앉아계신 모습을 보면 과연 경상도를 대표하는 대찰의 창건주답다.

재미있는 부분은 존자(尊者)의 뒤쪽에 펼쳐져 있는 병풍이다. 흰색 바탕에 세 폭의 병풍이 보이는데, 가장 좌측은 중단은 흰 여백에, 상단은 중간까지 붉은 비단으로 배접이 되어 있고, 하단은 파란색 비단으로 배접이 되어있다.

이 영정을 유독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 바로 병풍이다. 아무런 글씨도 써 있지 않은 병풍은 마치 조주(趙州)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그대로 표현한 것 같다. 또 중관(中觀)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공(空)을 웅변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정은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17ㆍ18세기에 경상도 지역의 상당수의 불화를 제작했던 의균(義均)스님이나 그 제자들 중 한 분이 그렸음에 틀림없다. 그럼 왜 이 영정이 그토록 특별할까? 그 것은 네덜란드의 화가이자 20세기 미술과 건축, 그래픽 디자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화가 중 한 사람인 몬드리안 덕택이다.

그가 초창(初創)한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라고 부른 비구상적인 형태인 ‘구성(構成)’이라고 불리는 컴퍼지션 시리즈는 가로와 세로의 검은 선의 격자(grid)와 삼원색(三原色)을 사용한 것들이 많다. 그는 그를 대표한 작품의 색채언어를 가장 기본적인 직각과 직선, 남성성을 보이는 수직선, 여성성을 상징하는 수평선으로 표현했다.

이 정도의 해설이면 불자(佛者)들은 왜 이 영정이 그토록 특별한 지 바로 깨달았을 것이다. 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디자인과 색채감각을 이미 200 여년 전의 우리 승려화가인 이름 없는 어느 화승(畵僧)이 이미 지니고 표현했던 것이다.

몬드리안의 목표는 순수함과 정결한 미(美)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회화를 통해 얻은 결론을 1937년에 ‘사람은 인류를 계몽함으로써 인류에 봉사한다’라고 썼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금어(金魚)라 불리우던 예전의 화승들은 탱화를 통해 깨달음을 전파한 전도자(前導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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