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硏 탁효정 박사 학위청구논문서 고찰


억불숭유 정책을 펼쳤던 조선시대였지만 왕실만은 예외였다. 왕실은 왕들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꾸준히 불교신앙을 이어나갔다. 원당(願堂)을 통한 내세추복(來世追福) 의식은 유교의 효(孝) 사상과도 연관돼 쉽게 폐지될 수 없었다.

최근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는 최근 박사학위청구논문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왕실원당이 어떤 형태로 유지됐고, 그것이 조선시대 불교계 운영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규명했다. 또, 왕실원당이 설치된 이유를 분석해 조선시대 불교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신앙적 특징을 규명했다.

탁 박사는 “원당은 조선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내세신앙과 천도의례, 효사상, 기복신앙의 접점에 위치한 대상물이다”라고 말했다.

왕실에서 원당을 설치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선왕ㆍ선후의 명복을 발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원당은 불교적 시설물임에도 유교에서 중시하는 효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왕을 위한 일이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며 원당 혁파를 주장하는 관료들의 청을 물리친 기록도 있다.

탁효정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왕실과 원당과의 관계는 일방적인 수혜관계에 가까웠다. 왕실에서 특정 사찰을 조성ㆍ지원함으로써 원당에 소요되는 경제적 부분들을 부담했고, 왕실의 특권 또한 이들 사찰에 부여해 정치적 보호까지 받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조선후기에는 왕비ㆍ후궁이 득남발원 후 왕자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설치하는 원당이 늘어났다. 특히 조선시대에 연로한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명예기구인 기로소(耆老所)와 원당이 결합돼 기로소원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원당이 고운사ㆍ송광사 등에 설치됐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원당이 갖던 추천(追薦)ㆍ추복(追福)의 성격이 약해지고, 유교적 의례를 보완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탁효정 박사는 조선시대 왕실원당의 특징을 ①왕실원당은 유교ㆍ불교의 접점에 위치한 시설물이었다. ②불교식 국가의례의 폐지에 따라 왕실의 기복행위가 원당으로 집중됐다. ③왕실원당이 왕권강화 내지 왕실 권위의 대외적 표명 수단으로 활용됐다. ④조선후기로 갈수록 유학자 관료 사이에서 불교에 대한 이단 시비가 사라지고 불교 시설물에 대한 거부감이 줄었다. ⑤조선후기 왕실 불교신앙은 구도가 아닌 기복에 치중됐다. ⑥조선후기에는 왕실원당이 궁방의 재정원으로 활용됐다. ⑦조선후기에는 왕실원당도 막대한 잡역에 시달렸다. ⑧조선후기 왕실 능묘나 진전을 관리하는 사찰을 지칭하는 조포사(造泡寺)라는 새로운 형태의 원당이 등장했다고 분류ㆍ정리했다.

탁 박사는 “현재 한국불교가 지닌 기복신앙, 내세추복적 성격은 조선시대 불교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왕실원당이 조선5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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