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기행 14-화엄사(상)
연기조사 창건 ‘화엄종찰’의 터전 다져
의상 도선 각성 등 시대별 고승이 중창
전각마다 주련 해석한 동판 부착 이해도와
24개 기둥이 받친 보제루 ‘용도와 미학’ 조화
화엄(華嚴).
동국역경원에서 펴낸 <불교사전>(운허 역)에는 “<화엄경>을 가리키는 경우와, 이 경에 의하여 세운 화엄종을 가리키는 경우와, 또 그 교의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화엄’이라는 말 자체는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된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로 이해되지만, <화엄경>이라는 경전과 그 경전이 담고 있는 사상과 그 가르침을 근간으로 형성된 종파로서의 ‘화엄종’ 등의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불교신자들에게 화엄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줄임말 정도로 이해되거나 매우 아름답게 치장된 모습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내용을 음미하는 21일간에 설해진 경전이 <화엄경>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다. 고은의 ‘소설 화엄경’과 장선우 감독의 영화 ‘화엄경’도 대중적 관심을 끌었고 ‘입법계품’의 53선지식을 찾아다니는 선재동자의 구법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법정 스님의 <신역 화엄경>(동국역경원, 1990년) 해제의 한 대목을 읽어 보자.
화엄경의 원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대방광은 부처를 수식한 말, 즉 무한 광대한 부처란 뜻. 다른 경전은 ‘부처님이’ 법을 설하지만 이 화엄경은 보살이 ‘부처님을’ 설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보살이 부처님의 광대한 덕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이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한다는 뜻. 장미나 모란처럼 한 동안 피었다가 져버리는 그런 꽃이 아니라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다. 청정하고 올바르고 덕스러운 보살의 행에 비유한 것. 세상에 덕이 될 수 있는 꽃은 결코 시들지 않기 때문이다.
화엄경은 60권 본(이를 60화엄이라 함), 80권 본, 40권 본으로 유통된다. 물론 한자로 된 것들이다. (중략) 화엄경은 맨 처음부터 이와 같이 하나로 통일된 경전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각 장이 독립된 경전으로 유통되다가 뒷날 현재와 같은 화엄경으로 집대성 된 것이다. 화엄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 시기는 대강 4세기경이고 장소는 중앙아시아 쪽이 아니겠느냐고 추정하고 있다.
화엄사 가는 길은 찬란했다. 늦가을 오후 햇살을 받은 단풍이 길바닥에 붉은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만 같았다. 더러 말라버린 잎들도 있지만 아직 화엄사 계곡은 ‘단풍화엄’이었다.
“어쩜 단풍이 저렇게 고울까?”
지혜장이 감탄사를 이어가는 동안 차는 매표소를 지나 주차장에 닿았다. 주차장 주변도 온통 단풍잔치였다. 새로 놓은 다리를 건너니 바로 일주문 앞이다. 일주문의 오른쪽에는 붉은 단풍나무가 왼쪽에는 빨간 우체통이 서 있다. 나름 절묘한 조화다. 살짝 빛바랜 단청과 막돌로 쌓은 담장이 정겹다. 단풍나무 아래 절의 역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화엄사(華嚴寺).
화엄사는 6세기 중엽(544 백제 성왕) 인도에서 온 연기(緣起) 조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신라의 자장율사와 의상대사,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 등 여러 고승에 의해 중창되어 조선 세종 6년(1424)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의 건물이 전소되고 주지였던 설흥대사는 3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왜군에 대항하다 전사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석조물을 제외하고 현재 남아 있는 전각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 보제루 앞마당에 들어서면 높이 쌓아 올린 대석단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승방과 강당 등의 수행공간이, 위로는 대웅전과 각황전을 비롯한 예불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눈여겨 볼 것은 각황전과 대웅전을 중심으로 절묘하게 조화된 가람배치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사사자삼층석탑과 공양석등에 전해 오는 연기조사와 어머니의 효 이야기도 발목을 끌고, 각황전 앞의 석등과 모과나무 기둥이 독특한 구층암 등도 화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들이다.
일주문은 양쪽에 문짝을 달고 있다. 문턱을 넘어서니 앞으로는 금강문이 보이고 오른쪽은 기념품가게, 왼쪽은 안내소다.
“와, 여기 깔린 돌 좀 봐. 화강암인데 무지 넓다.”
양쪽에 물길을 둔 진입로는 넓이가 네발걸음에 길이가 여섯 발걸음 쯤 되는 넓은 돌 판이었다. 그래서인지 금강문까지의 경사가 지루해 보이지 않았고 평지를 걷는 느낌이었다.
진입로 중간 지점에서 오른쪽에 서 있는 비는 벽암국일도대선사비(碧巖國一都大禪師碑)다. 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 등이 양호한 영태를 유지하고 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거북은 몸을 좀 움츠린 듯한 모습이지만 두툼한 등껍질과 굳게 다문 입은 강한 인상을 풍긴다. 이수의 구름문양은 화려한데 여러 마리의 용이 조각되지는 않고 중간에 커다란 용두가 강조되어 있다. 나팔수 씨가 백일홍 나무 아래 놓인 안내판을 내려다보며 읽었다.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의 탑비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조선후기 사회에
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 하였다. 또한 전란 후에는 화엄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법주사 등의 여러 사찰의 중수를 주도하여 조선후기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이 스님이 대웅전 등 여러 불사를 했고 제자인 계파 스님이 각황전을 새로 지은 걸로 알고 있어.”
벽암 스님은 오늘날의 화엄사를 이룩한 주역이다. 전쟁 중에는 사명대사로부터 명장이라 칭송받았으며 전후에는 남한산성 축성을 지휘했다. 인조2년(1624) 팔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독려해 3년 만에 남한산성을 마무리했다. 인조는 벽암 스님에게 ‘국일도대선사’라는 호칭을 내렸고 3년 뒤에는 ‘대화엄종주’라는 호칭도 하사했다.
금강문의 석축은 오래된 것 같지만 올라가는 계단은 새 돌이다. 절은 시간이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켜켜이 쌓이는 곳인가 보다. 옛 건물에 새로 기와를 올리고 옛 길에 새로 돌을 갈기도 한다. 그래서 옛날에 다듬은 돌과 새로 다듬은 돌이 어우러져 한 채의 집을 받들고 있다. 어쩌면 돌이 아니라 시간이 집을 받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금강문 안에는 금강역사와 문수동자 보현동자가 양쪽으로 나뉘어 모셔졌고 가운데가 통로다. 오른쪽에 나라연금강이 두 주먹으로 공격 자세를 취하고 서 있고 그 옆에 문수동자가 사자를 타고 있다. 왼쪽의 밀적금강은 방저적인 자세로 서 있고 보현동자가 코끼리를 타고 앉아 있다.
“두 역사나 동자 코끼리와 사자 등이 매우 질박하게 조성되어 무섭거나 경건하지 않고 편하고 친근해 보이네요.”
천왕문도 새로 만든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중앙에 통로가 있고 좌우에는 천왕들이 두 분씩 나눠 서 있다. 앞쪽의 주련에는 사천왕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묘사돼 있다. 화엄사는 기둥에 걸린 주련 내용의 원문과 뜻풀이를 동판에 새겨 기둥 아래쪽에 붙여 두었다.
“이렇게 주련을 읽으니까 건물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겠어.”
“그래 맞아요. 천왕문에 사천왕을 찬탄하는 글이 적힌 것처럼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관음전에는 관음보살님을 찬탄하는 글이 주련에 담기게 마련이지. 이렇게 주련의 내용을 해석해서 붙이는 절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다행이지.”
“아무래도 한국 사람은 영어만큼이나 한자도 공부해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천왕문을 지나니 앞쪽에 제법 높은 돌계단이 버티고 있다. 그 위로 백골을 드러낸 보제루가 고향집에서 기다리는 어머니처럼 서 있다. 지혜장은 한 걸음에 계단을 올라가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지만 참았다. 지혜장의 눈이 오른쪽 석축 아래에 고정됐다. 석축 위는 새로 지은 운고각(雲鼓閣), 그 아래 모과나무에 굵은 모과가 주렁주렁 달려있고 우람한 당간지주 한 쌍이 서 있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키가 2.9m인 당간지주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모서리의 각을 없애 매우 안정감 있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키가 훤칠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발치에 놓인 표지석에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식수 1964년 9월 7일’이라고 적혀있다.
“기둥이 완전 숏다리네.”
보제루(전남지방유형문화재 제49호)의 1층은 어른 키 정도 되는 높이의 굵은 기둥 24개가 2층을 떠받치고 있는 구조. 대개의 누각은 1층 기둥이 높아 그 아래로 사람이 다니는데 화엄사 보제루는 그렇지 않았다. 뒤쪽 마당 높이에 맞춰 2층을 1층처럼 쓸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원래 마당 쪽(보제루의 뒤쪽)으로는 벽을 치지 않고 개방했었다. 안마당에는 쌍탑이 서 있고 석축위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에서 법회 등의 행사가 열릴 때 보제루에도 사람들이 앉아서 법당을 향해 행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절집의 모든 건물은 용도에 맞추면서도 미학적으로 최고의 기법을 동원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